2월 혁명
1830년 7월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는 왕이 되었다. 그럼 루이 필리프는 어떤 사람일까?
그 역시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의 혈통이다.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시민들의 편에 서서 일해줄 사람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정부를 지지하는 진보적인 귀족들 편에 섰고, 1790년에 급진 혁명당인 자코뱅 클럽에 가담했으며 1792년 4월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이 벌어지자 북부 군단에 들어가 9월 중장으로 임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7월 혁명’을 일으킨 시민들의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 역시 왕가의 후손이다. 달라봤자 ‘같은 손’이다 언제든 수틀리면 ‘획’하고 뒤집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분명 그는 프랑스 혁명 때 시민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보면 그 역시 부르봉 왕조의 멸망을 원하지 않는 구제도를 원했던 인물인 것이다. 왕이 되기 전에 행했던 그의 계속적인 야당 활동은 분위기를 파악할 줄 아는 예지력 때문인지 모른다.
(루이 필리프)
부르주아들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된 그는 프랑스의 왕 ‘필리프 7세’가 아니라 프랑스 국민의 왕 ‘루이 필리프’로 호칭되었다. 그러나 시민의 바람대로 그는 행동하지 않았다.
그 는 왕당파(정통파:왕정과 귀족정을 지지하는 파)와 사회주의자를 비롯한 공화주의자들을 모두 인정했고 그 사이에서 중도노선을 지키면서 권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자 그는 억압적인 수단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과거의 왕들처럼 반대파들을 단두대로 보내고 어두운 감옥에 가두었다. 결국 1830년대 말에 이르러서 그의 반대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거나 은거지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리고 문제는 1830년의 7월 혁명이 모든 시민들의 혁명이 아니라 상층 부르주아들만을 위한 혁명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돈 많은 시민들은 거대한 자본을 이용해 공장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고용해 부를 축적했지만 장인들은 이 급속한 경제적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노동자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노동환경이 열악해진 상태에서 1846년~ 1847년에는 불경기로 인해 민중들의 삶이 더욱 궁핍해졌다. 민중들은 동요했다. 일부 사회주의 사상이 장인 지도자들 사이에 퍼졌다. 이들은 노동자들이 직접 소규모 회사를 소유하고 화합과 평등 속에서 회사와 노동을 통제할 수 있는 제도를 요구했다. 좀 더 광범위한 참정권(모든 남성에게 참정권을 허용하라.)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참정권(투표권)은 상층 부르주아(시민)들에게만 있었고, 하층 시민과 노동자(프롤레타리아)들에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 정부는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경찰을 동원했다. 1848년 2월의 일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분노에 불을 지폈고, 거리 폭동 행렬로 파리는 난장판이 되었다.
결 국 루이 필리프는 1848년 2월 24일 퇴위를 발표하고, 잉글랜드의 서리로 가 그 곳에서 죽었다. 2월 혁명으로 프랑스는 군주제가 폐지되고, 모든 성인 남자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임시적으로 공화정권이 성립되었다. 장인들은 국가로부터 직업에 대한 보호와 그밖의 이익을 얻고 싶어했지만, 나머지 혁명가들은 정치적 변화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장인 반란은 6월에 진압되었고, 공화정권은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을 대통령으로 뽑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루이 나폴레옹은 곧 제정을 선포하고 나폴레옹 3세라는 칭호를 채택했다.
다시금 공화정은 물 건너 간 것이다.
반 란은 주변지역인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헝가리, 보헤미아 및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으로 순식간에 퍼졌다. 봉건제도는 무너지고 각 지역마다 민족주의가 강화되었다. 여러 도시 국가들로 나누어져 있던 이탈리아와 수백 개의 영방으로 나누어져 있던 독일은 같은 민족임을 내세우면 통일을 촉구했다.
혁 명은 실패했지만 1848년의 봉기는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장원제도(봉건제도)는 독일 전역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땅에서 영원히 폐지되어 농민들이 새로운 권리를 얻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어 또 제정시대로 접어들었지만 민주주의적 통치가 이루어졌다. 모든 성인 남자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이 항구적인 제도로 확립되었다. 프로이센은 다시 보수주의의 손아귀에 들어갔지만, 의회가 창설되었다.
볼 프강 J 몸젠은 “1848년 혁명은 유럽대륙의 전통적 국가질서가 파열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 파열로 튕겨져 나온 씨앗은 군주가 아닌 민주, 왕정(제정) 체제가 아닌 공화제 이념의 실현과 확산이라는 열매를 맺었다고 평가했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도 이 시기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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