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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 :阿片戰爭(Opium Wars)

하늘벗삼아 2014. 2. 11. 00:05

아편전쟁 :阿片戰爭(Opium Wars)

 

 서구 열강이 중국에서 상품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과 벌인 2차례의 전쟁이다. 중국과 영국이 주체가 된 전쟁이므로 중.영 전쟁이라고 한다.

 

1 차 아편전쟁(1839~42)과 제2차 아편전쟁(1856~60)이 있었는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압축해서 보여준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아편전쟁의 과정을 보면 그들의 침략주의가 얼마나 명분이 없는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1차 아편전쟁)

 

아 편이란 양귀비의 덜 익은 열매에 흠을 내어 나오는 액을 모아 건조시켜서 얻는 마취체를 말한다. 여기서 나오는 액이란 ‘알칼로이드’성분을 말한다. 이것은 사람의 신경을 마비시키고 환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집트에서 사용하기 시작해 1세기부터 12세기까지는 소아시아(터키지역)에서만 사고 팔았다. 그런데 아랍 상인들이 중국, 인도와 교류를 하면서 13세기에는 중국에 아편이 전해진 것으로 본다. 처음에 중국에서 아편은 환자치료용으로 사용하였으나 17세기에는 아편을 담배처럼 흡연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아편문제가 심각해지자 청나라 초기인 옹정제 때(1729년)는 아편금지령이 내려졌었다. 이렇게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아편의 사용을 규제하자 그 후로는 밀수 형태로 중국에 들어왔다. 밀수의 주체국은 영국이었다.

영 국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다른 나라보다 식민지 건설에 적극적이었다. 산업혁명으로 많은 원료가 필요해지고 만든 물건들을 내다 팔 시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구가 많은 인도와 중국은 영국의 표적이 되었다. 영국은 이미 네덜란드 프랑스 세력을 물리치고 인도를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은 인도에서 면을 생산하고 판매하여 이윤을 극대화했으나 중국은 영국과의 무역에 있어 매우 폐쇄적이었다.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차(茶), 비단, 도자기를 수입했고, 영국산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를 수출했다. 그 때까지만해도 중국은 ‘우월주의’에 빠져 ‘우리는 그 어떤 나라에서도 수입할 것이 없다.’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다보니 무역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고 영국쪽에 크나큰 손실이 발생되는 '편무역'이 되어버렸다.

 

편무역 해결을 위해 건륭제를 찾아간 매카트니

 

 이 러한 사실은 중국 건륭제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영국은 청의 공행 무역(정부의 인정을 받은 공행을 통해서만 무역을 할 수 있게 한 것. 이것 때문에 영국은 중국 시장에 자신들의 물건을 팔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의 시정을 요구했다. 중국은 이러한 영국측에 이와 같은 답서를 보냈다.

“중 국의 물산은 풍부하고 없는 것이 없으므로, 외국 오랑캐 나라의 화물을 빌어서 유통시킬 필요가 없다. 다만 중국이 생산한 차, 도자기, 비단 등은 서양 각국과 너희 영국의 필수품으로 불쌍히 여겨 은혜를 베풀어 일용에 도움을 받고 이윤을 얻게 한 것이다.”

그 러면서 무역의 장소를 계속 ‘광저우 항’ 한 구역에만 국한시켜 놓아 영국의 수출 길은 거의 막힌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영국의 불만은 풍선처럼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영국은 주로 중국의 차(茶)수입에 매달렸는데 이제 중국의 차가 유럽인들의 기호식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차를 사려면 많은 은이 필요했는데 (은본위제) 중국과의 무역에서 적자를 보게 되니 은을 구할 길이 없었다. 결국 이러한 편무역의 적자를 메꾸기 위해 인도에서 재배한 양귀비로 아편을 만들어 중국에 밀수출을 했던 것이다. (인도의 국화(國華)가 양귀비라고 함)

 

(어여쁜 양귀비에서 무시무시한 마약인 아편이...)

 

아 편이 중국에 들어오자 아편을 흡입하는 중국인들은 순식간에 늘어났다. 따라서 1807년 경에 영국은 아편만으로도 마음대로 차를 수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로는 오히려 중국의 은이 영국으로 유출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1729년 중국에 들어오는 아편은 연간 200상자였으나 1757년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인도의 아편 전매권을 갖게 되면서 그 양이 급증했는데

1776년에는 1000상자, 1790년에는 5000상자를 넘었으며, 엄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1820년대 후반부터는 1만 상자씩 들어왔다.

 

중 국 내 아편의 확산은 여러 가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빈민층의 아편 흡식은 농촌경제의 파탄과 구매력의 상실을 가져왔고, 관료와 병사의 아편 흡식은 국가의 기능을 마비시킬 지경이었다. 또한 은의 유출이 커짐에 따라 은값이 오르게 되자, 은으로 조세를 납부해야 하는 농민들의 부담이 커져 조세미납사태가 일어남으로써 재정의 궁핍이 초래되었다. 이렇게  청나라가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했으며, 황제는 아편 흡식을 아예 금지하자는 엄금론의 주장자인 임칙서(林則徐)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광둥에 파견하여 아편문제를 처리하도록 했다.

 

(임칙서)

 

 1839 년 3월 광저우에 도착한 후 임칙서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중국인 아편 관련자의 처벌은 물론이고 외국 상관(商館)을 무력으로 봉쇄하여 아편을 몰수·파기했다. 영국상인들은  마카오로 철수했고, 영국 정부는 10월 원정군 파견을 결정했다.

 

임칙서는 영국 여왕에게 이러한 서한을 보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영국에 아편을 팔고 영국인들을 부추겨서 아편을 사서 피우게 한다면, 당신은 아마 크게 분노하며 그들을 매우 증오할 것입니다.”

그러자 영국 의회는 다음과 같은 답서를 보내왔다.

“아편은 중국 상류 계급만 피우는 것으로, 이는 마치 영국의 상류 계층이 위스키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정말 '아편=위스키'일까? 이 의견에 동감하는 분 손 한 번 들어 주세요! 헉, 아무도 없음.)

 

1839 년 9월 4일 압박 해제를 요구하러 주룽(홍콩)에 갔던 엘리엇의 함대와 중국 해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첫 발포가 일어났다. 이어 11월 3일 촨비에서 양국 해군간에 전투가 벌어졌고 중국이 참패했다. 이로써 선전포고 없이 전쟁이 시작되었다. 12월 6일 임칙서는 영국과의 통상 정지를 선포했다. 이미 10월에 개전을 결정한 바 있던 영국 정부는 1840년 2월 조지 엘리엇을 전권대표로, 브레머를 사령관으로 하는 원정군을 파견했다. 의회에서도 4월에 전쟁을 승인했는데 여기에는 자본가집단의 압력이 작용했다고 한다. 영국은 대함대를 파견하여 중국의 해안지방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아편전쟁을 그린 그림이라고 하네요.)


전쟁의 결과는 중국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

제1차 아편 전쟁의 결과 난징 조약이 맺어졌다. 난징 조약(1842년)의 요점은

1. 홍콩의 할양(넘겨주기)

2. 광저우·샤먼·푸저우·닝푸·상하이의 개항, 개항장에 영국의 영사(무역 통상을 담당하는 정부기관) 설치

3. 배상금 지불(2,100만 달러)

4. 공행상인만 무역에 참여하도록 한 제도 폐지

5. 관세 협의

6. 양국 관리간의 대등한 문서왕복 등.

그 이후에는 후먼 조약이 맺어졌고(최혜국 대우 조관이 추가), 미국· 프랑스도 청나라와 망하조약(1844. 7. 3)을 맺어 중국이 영국에 준 혜택을 요구했다. 또한 황푸조약(1844. 8. 14)에서 프랑스는 개항장에서의 포교권(종교 알리기)을 규정했다. 관세자주권의 상실, 영사재판권, 최혜국대우 등의 규정을 통해 중국은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한 조약체제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이들 조약은 이후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발판이 되었다. 서구 열강은 홍콩의 할양이라든가 5개항의 개항을 통해 중국진출 기반을 확보한 것이다. 이제 중국에는 외국 군함이 자유로이 진입하게 되었고, 개항장에 "땅을 빌려 집을 짓고 영원히 거주"할 수 있게 함으로써 영사 재판권(자국의 범죄에 대해서는 자국이 재판한다: 치외법권)의 확보와 함께 조계제도(외국인 거주 지역)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로써 중국 사회의 반식민지화 기반이 닦인 셈이었다.

 

(2차 아편전쟁)

 

 

제2차 아편전쟁

 

제 1차 아편 전쟁 이후 광둥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배영운동(영국을 배척하는 운동)과 영국측의 조약개정 요구가 제2차 아편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배영운동은 대규모로 장기에 걸쳐 일어난 영국인의 광저우 입성 저지운동이었다. 외교상의 교섭으로도 입성에 실패한 영국은 다시 한번 중국을 무력으로 굴복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1차 아편 전쟁의 주요원인이었던 중국무역이 뜻대로 신장되지 않자, 자국의 공업제품 수출을 증대시키기 위해 중국 깊숙이 진입하고 북쪽 항구를 개방시킬 필요를 느꼈다. 이를 위해 중국과의 조약개정을 위한 활동을 벌였으나 청나라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영국은 무력을 사용할 빌미를 찾고 있던 중 애로호 사건이 일어나서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1856 년 10월 8일 광저우 앞 주장강에 정박하고 있던 범선(돛단배) 애로호에 중국 관헌이 올라가서 중국인 승무원 12명을 해적혐의로 연행해갔다. 애로호는 중국인 소유의 배로, 선원도 중국인이었지만, 선장이 영국인으로 선적을 홍콩에 두고 있었다. 광저우의 영국 영사는 승무원을 즉각 송환하고 배에 걸려 있던 영국기를 함부로 내린 데 대해 공개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양광총독은 당시 배에 영국 국기가 걸려 있지도 않았고 중국인 소유의 배이므로 영국이 나설 까닭이 없다고 일축했다. 그래도 승무원들을 모두 영국 영사관으로 보냈는데도 영사는 접수를 거부했으며, 이튿날 돌연 영국군이 광저우를 공격하고 총독관저에까지 침입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은 이미 중국을 공격하려고 작정하고 있었으므로 에로호 사건은 핑계일 뿐인 것이다. 프랑스도 자국의 선교사가 중국 관리에게 처형된 사건을 명목으로 영국과 공동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1857년 12월 12일 양광총독이 영국과 프랑스의 최후통첩을 거부하자 28일 공격을 개시하여 청나라는 패배를 했고, 톈진 조약을 맺었다. 조약은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 순으로 맺어졌는데,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외국공사의 베이징 주재

2. 양쯔 강 유역과 북부 및 기타 지역의 10개 항구 개항

3. 여행·통상·포교의 자유

4. 영사재판권의 확대

5. 양쯔 강 및 각 통상항으로의 군함 진입권

6. 전쟁 배상금

등 이었다. 그러나 외국인의 수도 입성을 꺼린 청나라가 톈진 조약의 규정에 있는 베이징 대신 상하이에서 비준서를 교환하려 하자, 영국·프랑스군은 1859년 6월 베이징에서의 비준을 강행하기 위해 북상하다가 다구에서 중국 포대의 포격을 받아 대파되었다. 영국·프랑스군은 1860년 10월 베이징을 함락하고 베이징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는 톈진 조약을 인정한 위에 톈진을 추가로 개항하며 중국 노동자의 이민을 허가하고 주룽쓰를 영국에 할양하도록 했다. 또한 몰수한 가톨릭 교회당을 상환하고 교회가 각 성의 토지를 임대·구매하여 교회를 건립할 수 있게 했으며, 배상금을 증액시켰다.

 

중 국은 아편전쟁을 통해 유럽 열강에 무릅을 꿇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보아 홍콩·주룽스가 영국에 할양되었고, 헤이룽 강 유역의 방대한 영토가 러시아에 할양되었을 뿐 아니라 공사관·조계·외국인세무사 제도가 생겨났다. 개항장이 16개로 확대되어 중국은 서양의 상품시장 및 원료 시장이 되었다. 특히 외국상품에 대한 세금 경감은 중국 민족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아편무역과 쿨리(중국인 노예) 무역의 합법화는 중국에게 있어 굴욕이었다. 사상적·문화적 측면에서도 외국 선교사가 자유로이 교회를 설립하고 포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깃발 아래 들어온 그리스도교는 사랑을 받기 힘들었다. 그래서 중국인의 반그리스도교 운동을 유발했다.

 

아편전쟁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나치게 자기 우월적이고 폐쇄적인 정치는 화를 불러 온다는 것이다.

중국이 열린 자세로 서양과의 무역을 추구하고 서양의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였더라면 아편전쟁이라는 엄청난 상처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세계는 자국의 상품을 보호하려는 관세정책으로 자유롭게 무역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라와 나라간의 FTA를 맺고 있는 것이다. 요번 한국과 미국간에 맺은 FTA로 인해 우리 농업 분야가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FTA를 없던 일로 하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미국과의 협상을 중도에 깬다고 해보자. 그로인한 미국의 보복이 없을 거라 생각하는가?

영국의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별의별 핑계를 다 대어가며 공격해 들어올 것이다.

예를 들어 슈퍼301조를 발동하여 미국 내에 있는 우리 물건들의 판매를 막을 것이란 얘기다.

 

(슈퍼 301조 무섭죠....)

 

아무튼 아편전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 홍콩에 대해

 

홍콩은 홍콩섬, 주룽반도, 신계 지구로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홍콩섬은 제1차 아편전쟁 때(1842년) 영국에 빼앗겼으며

주룽반도는 2차 아편전쟁 때(1860년) 빼앗겼지요. 신계 지구는 청. 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후(1898년), 99년 동안 영국이 빌리기로

한 것입니다. 드디어 1997년 6월 30일 밤에  홍콩섬, 주룽반도, 신계지구로 이루어진 홍콩 전체가 반환됩니다.

다음날인 7월 1일부터는 중국 땅이 된 것이죠. (그래도 찾았으니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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