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혁명 (1830년혁명): 1830년 7월 발생
유럽 여러 나라에서 자유주의자 및 혁명주의자들이 보수적 군주와 정부에 맞서 일으킨 봉기로 프랑스의 7월 혁명이 유럽 각국에 영향을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 7월 혁명을 그린 그림이다.
1830 년이란 연도에 우리는 매우 낯익을 수밖에 없다. 스탕달의 대표작인 ‘적과 흑’의 부제가 바로 ‘1830년’인데 이 소설은 1830년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프랑스 사회상을 그린 것이다. 빈체제로 인한 왕권의 강화로 인해 혁명 후 강해졌던 시민의 위상이 다시금 쪼그라들었고, 왕은 프랑스 혁명 전의 구체제를 다시 되살리려고 했다. 바람은 자유를 향해 불고 있는데 이 바람을 억압의 방향으로 되돌리려는 어리석은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어쨌든 이 소설 속에는 출세하고자 하는 한 젊은이를 통해 당시 시민들의 왕당파(왕을 추종하는 귀족의 무리)들에 대한 불만을 그리고 있다. 7월 혁명을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소설 중의 하나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다. 그는 이 소설에서 "법률·관습·풍속 때문에 사회적 처벌이 생겨나고, 이 처벌에 의해 문명의 한복판에 인공적인 지옥이 만들어져, 신이 만들어야 할 숙명이 인간이 만드는 운명에 의해 헝클어지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장 발장인데 그는 가난했던 노동자계급에서 기업가가 된 당시의 전형적인 부르주아지로 1830년 7월 혁명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싸운 인물이다.
혁 명의 움직임은 1830년 7월 26일이었다. 나폴레옹의 세인트헬레나 섬 유배 후 다시 정권을 찾은 부르봉 왕조. 루이 18세가 죽자 동생인 샤를 10세가 왕위에 올라 구체제로의 복귀를 선언한 ‘빈체제’에 충실하기 위해 부르주아지들의 기를 꺾을 필요가 있었다. 당시 부르주아지들은 정부 공채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들의 공채를 빼앗아 국유화된 망명 왕당파들의 토지를 보상해주었고 성직자들에게 더 큰 권한을 주었으며, 특정한 '불경죄'에 대해서는 사형을 선고하도록 했다. 그런데 1830년 5월의 선거에서 국왕의 반대파가 다수당이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국왕은 4개의 칙령을 발표했다. 샤를 10세는 이 4개의 칙령을 통해
첫째, 하원(시민들이 대표로 있는 입법 기관)을 해산하고,
둘째, 언론의 자유를 폐지했으며,
셋째, 선거법을 개정해 유권자의 3/4이 선거권을 상실케 했다.
결국 시민들을 정치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게 못을 박아놓은 꼴이었다.
(샤를 10세) :1757년~1836년 ---> 79세 (그래도 오래 살았군요.)
6년동안 왕위에 있다가 6년 뒤에 프라하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도망다니다가 정착한 프라하에서 참으로 불명예스럽게 죽었죠.
시대를 파악하지 못한 죄 때문에.....
곧 시민들은 왕에게 항의하고, 공장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무력으로 왕의 절대권한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무기를 들었다. 왕과 귀족들은 왕정군을 보내 이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이미 불덩어리가 된 시민들의 봉기를 막을 수 없었다. 이미 프랑스 혁명을 통해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엄청난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공화파 시민들은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희생을 각오하겠다는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싸웠다. 결국 3일만에 (7.27~7.29) 공화파는 왕당파를 물리쳤다. 좀 싱거운 싸움이었다. 샤를 10세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영국으로 도망쳤다.
급 진적인 시민들은 공화정(왕을 인정하지 않은 민주적인 정치형태)을 세우고자 했으나 중산층들은 왕정이 파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1792년에 프랑스 공화정을 위해 싸운 경력이 있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에게 왕관을 넘겨주자고 했다. 혁명은 일어났지만 부르봉 왕조가 계속 나라의 주인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또 한 차례의 폭풍을 예고하는 것이었다.(나중에 ‘2월혁명’으로 이어졌으니......)
어쨌든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 국민의 왕'이 되겠다고 승낙했다.
암튼 프랑스 사회는 7월 혁명으로 새로운 정국을 맞이했다.
그 결과를 보면
첫째, 상원은 세습제 기구에서 선출제 기구로 바뀌어 귀족 세력이 약화되었다.
둘째, 특별재판소는 폐지되었다.
셋째, 왕과 교회와의 동맹관계가 끝이 났다.
넷째, 부르봉 왕가의 백색기 대신에 삼색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 국기가 탄생된 것이다)
그리고 이 혁명으로 프랑스에서의 민족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빅토르 위고와 스탕달..................................
그들에 의해 7월 혁명의 배경과 성질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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