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혁명과 명예 혁명
영 국은 언제부터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었을까요? 영국은 1세기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고 5세기 무렵에 로마의 통치가 끝나자 앵글로 색슨족의 침입을 받게 됩니다. 그 후 교황인 그레고리우스1세에 의해 개종을 하여 90년동안 모든 색슨왕국은 그리그도교(가톨릭:천주교)로 개종을 하였습니다. 앵글로 색슨족이 세운 8왕국은 가장 세력이 강했던 웨식스가 통일함으로 잉글랜드가 형성이 되지요. 그 후 11세기에는 프랑스에서 침입한 노르만족에 의해 영국의 왕조가 바뀝니다. 그래도 영국의 그리스도교는 로마 가톨릭의 예배 의식을 존중하고 교황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런데 16세기에 중북부 유럽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나 로마 가톨릭을 부정하고 설교를 중심으로 한 예배의식을 강조한 프로테스탄트(기독교)가 탄생합니다. 영국에서도 칼뱅의 영향을 받아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청교도입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일찍이 프로테스탄트를 받아들여 장로파가 우세했습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그렇지 않았지요.
(헨리8세랍니다.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죠.)
그 런데 헨리 8세 때 로마 가톨릭과 사이가 안 좋아져 그 틈을 타 잉글랜드에서도 프로테스탄스 운동이 일어나고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로마 가톨릭의 영향권 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성공회는 로마 가톨릭의 영향권 안에서 벗어났을 뿐 예배와 의식은 가톨릭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고 합니다. 주교 제도에 있어서는 거의 같습니다.
그럼 여기서 잠깐 영국의 왕인 헨리8세에 대해 공부해 볼까요? 학자들은 그를 매우 오만하고 이기적인 군주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결혼만 봐도 그는 진정한 사랑을 모르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 이 죽자 헨리는 왕위에 오르게 되고 형의 아내였던 캐서린을 왕비로 맞이하게 됩니다. 둘 사이에서 딸 메리가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궁궐에 와 있던 시녀 앤 불린을 사랑하게 됩니다. 헨리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과의 이혼을 결심합니다. 그는 자신이 죽은 형의 아내와 결혼했으므로 이것은 근친상간이며, 따라서 부부관계를 더 지속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사랑하지도 않았던 형수와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8세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왕비가 스페인의 공주였었기 때문이지요.
그 러자 그는 영국 의회를 통해 영국 국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헨리8세는 비밀리에 앤과 결혼을 하고 나중에 캐서린과 이혼을 합니다. 왕비가 된 앤은 딸을 낳았습니다. 이 딸이 바로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 엘리자베스 1세입니다. 왕비가 된 앤은 매우 오만불손해졌고, 캐서린의 딸인 메리를 구박했습니다. 앤의 요구대로 왕은 메리를 수도원에 보내려고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앤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는 그녀가 싫어졌습니다. 엘리자베스를 낳은 후의 또 한 번 임신을 했으나 유산되었고, 그 뒤에 사내를 낳았으나 사산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중 흉악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앤이 궁궐에 있는 남자들과는 물론 오빠와도 바람을 핀다는 소문이었습니다. 헨리는 그 소문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앤을 런던탑에 가두었습니다. 앤은 곧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1000일의 앤’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천 일 동안 영광을 누렸다는 것이지요. 덕분에 캐서린의 딸인 메리 공주는 궁궐로 돌아오게 됩니다.
(앤 불린... 천 일의 앤..)
헨리는 세 번째로 제인사모아와 결혼을 하여 그렇게 바라던 왕자를 낳습니다. 그가 바로 헨리 다음의 왕인 에드워드6세였지요. 그러나 제인 사모아는 출산 후, 병을 얻어 죽고 맙니다.
제인 사모아: 옛날에는 애 낳고 죽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 후 3년 동안 헨리는 그의 배우자를 찾는 데 많은 에너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찾아낸 여자가 클레브스 공작의 누이였던 앤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 앤과 이혼을 합니다. 계속되는 결혼실패로 헨리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망가지게 됩니다.
그 러나 20세인 캐서린 하워즈와 결혼하고부터 다시 정열을 찾은 듯했습니다. 하지만 캐서린 하워즈는 궁궐의 다른 남자들과 바람을 피는 등 난잡한 행동을 일삼아 왕비로서의 체통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맙니다. 이 일은 헨리를 더욱 좌절하게 만들었습니다. 6번째로 결혼한 캐서린 파에게 평화를 얻기는 했으나 그는 또다시 전쟁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수많은 영국의 병사들이 죽어갔고, 영국 국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졌습니다. 한 마디로 헨리는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결혼을 했고, 그러니 진실한 결혼생활을 맛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가 죽은 후 3번째 왕비인 제인 사모아가 낳은 에드워드 6세(1537년~1553년)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의 나이 11살이었지요. 그래서 헨리8세는 생전에 에드워드가 성인이 되기 전에 섭정위원회가 대신 정치를 맡아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핵으로 6년간의 재위를 마치고 사망을 합니다. 에드워드 6세(1537년~1553년)는 재위 기간 동안 프로테스탄트(신교, 기독교)의 개혁이 받아들여집니다.
(16세에 생을 마감한 에드워드6세. 불쌍타...)
에 드워드는 다음 왕위 계승자로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배제했으나 그가 죽자 법적인 서열에 의해 메리가 최초의 여왕이 됩니다. 메리는 열렬한 로마가톨릭교도였으므로 영국국교회(성공회)와 프로테스탄트를 억업하고 박해를 했습니다. 영국국교회 세력에 의해 어머니 캐서린이 이혼당한 것에 대한 보복의 성격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많은 국교회 신도들과 프로테스탄트들을 잡아들여 처형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부른답니다.
'피의 메리'입니다. 정말 무시무시하죠? 그래도 한편으로는 가련한 생각이....
그 러나 6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1558년 그녀가 죽자 앤 블린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1558년~ 1603년동안 통치)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녀는 가톨릭으로부터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부활시키고, 프로테스탄트였던 가톨릭 교도와 청교도인들을 박해합니다. 이 때 많은 청교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도망을 하고 그 곳에서 자유와 평등의 땅인 아메리카로 오게 되지요. 미국 동부에 자리잡은 그들은 미국 개척의 주요 세력이 됩니다. 어쨌든 엘리자베스1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후사를 낳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래서 튜터 왕조는 엘리자베스1세를 끝으로 막을 내리고 맙니다.
(영국의 왕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던 엘리자베스 1세)
그 런데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1세가 영국의 왕가와 혈연관계가 있다는 이유로 잉글랜드의 왕을 겸하게 됩니다. 이로써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오랜 싸움은 종지부를 찍게 되고 영국은 통합을 이루게 됩니다. 하지만 너무나 오랜 세월 다른 나라로 살아왔던 그들은 실질적으로 합치지 못하고 계속 분열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여하튼 제임스1세부터를 스튜어트 왕조라고 합니다. 제임스1세는 잉글랜드로 와 나라를 통치하면서 영국 국교회 부활에 힘씁니다. 그래서 왕비가 로마 가톨릭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죽을 때가지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합니다. 그는 왕권강화를 위해 왕권신수설을 내세워 국왕이 법 위에 있다고 주장하여 의회와 많은 충돌이 있었고 결국 암살을 당하게 되지요.
제 임스 1세가 죽은 후, 찰스 1세는 절대주의(왕의 독재주의)를 한층 강화하여 의회의 승인도 없이 관세를 징수하고 선박세를 부과하는 등의 독재를 행하였습니다. 또 병사를 민가에 무료 투숙시키고, 군법을 일반인에게도 적용시키는 등 비민주의 극치를 달렸습니다. 그래서 의회에서는 1628년 인민(백성, 국민)들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권리청원’을 기초하여(글의 초안을 잡아) 찰스1세에게 제출하였습니다. 이 권리청원의 내용은 과세와 재산권, 신체의 자유와 기본권 보장에 대해 승인을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의회의 동의 없는 세금은 징수하지 말아라.
평상시의 계엄령 선포를 남발하지 말아라.
군대를 민간인의 집에 주둔시키지 말아라.(민간이들이 공포에 떨고 있다.)
불법적으로 사람들을 구속하고 투옥하는 행위를 하지 마라.”
뭐 대충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하게 됩니다.(제 맘대로... 아주 비민주의 극치를 달리는 왕이죠?) 그래서 왕은 11년간이나 의회가 없는 상태에서 정치를 해나가야 했습니다. 즉 왕의 권력이 남용된 것이지요. 그리고 왕은 장로파가 우세한 스코틀랜드에 영국 국교회를 강요하려 하여 전쟁의 위기를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결국 전쟁 비용을 얻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습니다. 다시 의회가 소집되자 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수였기 때문에 그동안 국왕이 행했던 전제정치의 제도를 모두 없애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왕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왕의 권한을 어느 정도 유지시켜주어야 한다는 의견도 강했기 때문에 의회는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와 의회의 주권을 강화하려는 의회파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로써 청교도 혁명이라고 불리는 영국 내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했다는 찰스 1세네요. 전제정치는 미웠지만 일국의 왕으로
처형대에 올라가다니.... 나중에 프랑스 루이16세도 찰스 1세처럼 처형당하죠. 그러길래
말 안 듣는 왕은 신이 될 수 없다는 거지... 왕권신수설은 무슨 개뿔....)
그 런데 의회파에는 청교도인들이 많았고, 왕당파에는 영국 국교회에 속해 있거나 로마 가톨릭을 신봉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영국내란은 종교의 대립이 된 것이지요. 혁명이 일어난 초기 2년간은 국왕군(왕당파)이 우세했으나 의회군에 크롬웰이 나타나 자유농민을 핵심으로 기병대를 조직하여 계속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네이즈비 전투(1645년 6월 14일)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얻고 왕을 생포했습니다. 국왕군은 1만 명, 의회군은 1만 4천 명 정도로 승부는 이미 결정나 있었지요. 그러나 왕은 탈출하여 스코틀랜드의 힘을 얻기 위해 다시 정권을 잡으면 장로파제도를 잉글랜드에 확립시켜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올리버 크롬웰...(혁명의 영웅) : 하지만 너무 엄격했다죠?
'풍기단속법'을 제정하여 도박과 닭싸움을 하지 못하게 하였고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으며, 극장도 없애버렸대요. 영국인들은 크롬웰의
이런 엄격한 정치에 점점 신물이 났대나 뭐래나 그래서 크롬웰이 부관참시를 당했을 때도
좋아한 영국인이 많았다지 뭐예요. 하지만 크롬웰의 사상은 죽지 않았어요.
그의 엄격한 도덕성은 지금도 영국인들의 정신 문화가 되어 내려오고 있으니까요.
(얼굴은 엄격하게 생기지 않았는데..... 이 사람도 무섭당~)
그 런데 정권을 장악한 의회파 내에서의 분열이 표면화되기 시작합니다. 영국의 프로테스탄트는 장로파와 독립파로 나누어졌는데 두 종교집단이 대립한 것입니다. 장로파는 보수적이라 국왕과의 화해를 통한 왕정유지를 주장하는데 반해 독립파는 왕권타파를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장로파는 런던의 대상인들이나 귀족층에 지지자가 많았고, 독립파는 장로파보다 밑의 계층에 의존하였습니다. 둘 모두 의회 주권이나 제한 군주제를 주장하는 점에서는 같은 의견을 보였으나 장로파가 찰스 1세와 협상을 하고 있는 스코틀랜드와 결탁함으로 인해 서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양 파에 대한 제 3세력인 수평파가 나타납니다. 독립파는 수평파와 손을 잡고 장로파와 싸워 또다시 2차 영국내란이 일어납니다. 이 내란에서 1648년 독립파가 승리하여 장로파 의원들이 의회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 독립파들로만 구성된 의회에서 국왕에 대한 재판을 강행하여 찰스 1세는 1649년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독 립파를 승리로 이끈 올리버 크롬웰과 의회는 공화정을 선포합니다. 크롬웰은 제 1의장이 되어 여전히 국왕제를 고집하는 왕당파와 전쟁을 하고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교도가 대부분인 아일랜드를 무자비하게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찰스2세가 왕에 임명되자 그는 스코틀랜드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혁명의 더 큰 성공을 위해 그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를 통치하는 호국경에 취임하여 여러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전쟁으로 국가 재정이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의회와 의견이 맞지 않아 의회를 두 번이나 해산했습니다. 그가 죽자 그의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이 호국경이 되었으나 아버지 올리버처럼 유능하지 못했던 그는 의회의 분열만 가져왔습니다. 결국 이러한 어지러움을 틈타 왕당파가 정권을 잡게 되고 영국은 다시 왕정이 복고되어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크롬웰의 시신은 1661년 파헤쳐졌고 그의 머리는 웨스트민스터 홀의 꼭대기에 걸려진 채 찰스 2세 집권말까지 그대로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리처드 크롬웰 : 얼굴은 잘 생겼는데 아버지의 유능함을
따라가지 못했군... 하긴 올리버크롬웰의 카리스마가 워낙 강했어야지.
그 런데 찰스2세와 그 뒤를 이은 제임2세는 전제정치를 강화하였고, 가톨릭 교회를 부활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명목상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가톨릭 신자들을 문무 고위 관리로 앉히고, 상비군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국민들은 제임스2세를 불신하기 시작했지요.
그 런데 제임스 2세가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청교도인들은 제임스 2세가 죽으면 서열 1순위에 있는 청교도인이었던 메리가 왕이 될 줄 알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태어났으니 그의 아들로 인해 가톨릭의 독재가 계속 되리라는 염려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있던 윌리엄과 그의 아내였던 제임스 1세의 딸 메리를 부른 것이지요. 여기서 윌리엄도 영국 스튜어트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죠. 즉 둘다 영국의 스튜어트 왕가 핏줄이었던 것입니다. 제임스 2세의 전제정치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몰려오는 윌리엄과 메리의 군대를 본 이들은 모두 윌리엄에게 투항하여 제임스2세는 가족을 프랑스로 피신시킵니다. 그리고 자기도 도망을 가지요. 제임스2세의 도망을 왕권 포기로 간주하고 의회는 프로테스탄트였던 윌리엄과 메리를 왕위에 앉힙니다. 이들은 의회가 체출한 ‘권리장전(權利章典)’에 승인합니다. 권리장전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국의 왕은 영국 교회에 속한다.
*왕은 법의 집행을 정지시키지 못한다.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걷지 못한다.
*의회 안에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다.
*백성은 청원권(국가기관에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을 갖는다.
*백성은 국가로부터 지나친 벌금과 보석금을 요구당하지 않으며, 장인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
명예혁명(1689년)으로 영국은 세계 최초로 의회가 정치의 중심을 이루는 입헌 군주국이 되었습니다.
‘명예혁명’이란 말은 피를 흘리지 않고 혁명을 이루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 런데 1701년 영국 의회ㅣ는 왕위계승법을 제정하여 가톨릭 신자는 왕위에 오를 수 없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제임스 1세의 손녀이며 신교도인 소피아의 후손에서 왕위가 돌아갔습니다. 앤 여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의회는 소피아의 아들이며 독일 하노버 왕가의 선제후(황제를 뽑는 선거권을 가졌던 7명의 제후)였던 조지 1세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 해서 영국의 왕위는 하노버 왕가가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하노버가 독일식 명칭이라고 하여 윈저왕가로 이름을 바꾸었고, 오늘날 엘리자베스 2세까지 이어온 것입니다.
어쨌든 조지 1세 때 내각 책임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의회의 다수당에서 수상을 선출하게 실질적인 정치를 하게 한 것이었죠. 이리하여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는 않는다’라는 전통이 수립된 것입니다.
(하노버왕가의 첫 번째 왕 조지 1세) : 현재의 찰스 왕세자의 조상되는데 닮았나?
영국은 그 어떤 나라도 해내지 못한 민주혁명을 두 번씩이나 이루어내어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정치의 모범을 보여왔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지만요.
아마 조만간 군주제도 폐지될 것이라 믿습니다.
[
'精神을 건강하게 > 기억해야할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7월혁명 (1830년혁명): 1830년 7월 발생 (0) | 2014.02.11 |
---|---|
아편전쟁 :阿片戰爭(Opium Wars) (0) | 2014.02.11 |
신항로 개척과 유럽 세계의 확대 (0) | 2014.02.10 |
아메리카 백인들의 인권 유린 행태 (0) | 2014.02.10 |
프랑스 혁명(1787년~ 1799년) (0) | 2014.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