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내용은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을 발췌한 것입니다.(일부는 백과사전 인용)
아메리카 백인들의 인권 유린 행태
492 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후 불과 200년도 안 되어 남북아메리카에서 무려 5,000만 명의 원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과 학살, 노예화 그리고 특히 백인들이 옮겨온 천연두 때문이었는데 한 역사학자는 이를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크고 잔혹한 홀로코스트(집단 살육)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멕시코의 아스텍 문명을 파괴한 코르테스, 페루의 잉카문명을 말살한 피사로의 만행은 영원히 씻지 못할 백인들의 만행이었다.
* 코르테스 : 젊은 시절, 그는 무자비하고 오만하며 짓궂었다. 1504년 그는 아메리카의 산토도밍고 섬으로 떠났고 6년 동안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여자관계가 난잡했던 그는 1509년 매독에 걸렸다. 매독이 완치된 1511년, 벨라스케스와 쿠바 정복에 나선다. 그리고 멕시코 원정에 나선다. 멕시코에 도착한 그는 타고온 배들을 모조리 불태운다. 즉 살아남는 길은 원주민을 정복하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그는 말린체(아스텍 말과 스페인어를 구사했던 인물로 알려진 소녀)를 자기의 정부로 삼고 통역관이 되게 하였다. 코르테스군은 아스텍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왕에게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것과 스페인의 왕을 섬길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인 몬테수마는 그것을 거부했다. 그런데 몬테수마의 동생이었던 쿠이틀라우악은 사람들로 하여금 몬테수마를 돌로 쳐 죽게 하고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쿠이틀라우악은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조카인 콰우테목이 왕이 되었는데 이 때 아스텍 인들은 유럽인들이 옮겨 놓은 천연두로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원주민은 끝까지 저항했다고 한다. 코르테스는 아스텍 거리에 있는 집들을 납작하게 부수고 남아 있는 아스텍 인들을 살해했다. 80일 동안의 전쟁과 학살이 계속된 끝에 1521년 8월 13일 아스텍 문명을 막을 내리게 된다.
*피사로(1475년~1541년) : 그는 27세의 나이로 지금의 도미니카로 떠났다. 그 리고 1523년 그는 남아메리카의 페루에 도착한다. 정부에서는 정복을 중단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칼로 땅에 선을 긋고 부와 명예를 원하는 자는 선을 넘으라고 했다. 그래서 넘은 사람이 13명이었다. 그는 그 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를 설득하여 군사를 얻고 1530년 잉카 정복에 나선다. 그는 잉카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1533년에는 잉카의 황제였던 아타우알파를 교수형에 처한다. 그는 잉카 제국이 있던 자리에 1535년 리마를 세운다. 리마는 현재 페루의 수도이다.
아 프리카의 흑인들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고 와 그들을 학대한 것 또한 백인들의 씻지 못할 만행이다. 미국 남부에는 담배, 목화 등의 플랜테이션 농업을 하고 있었는데 인력이 모자랐다. 그래서 1619년 20명의 노예가 네덜란드 배에 실려 오게 되었다. 노예의 역사는 1441년 포르투갈에서 시작되었는데 안타웅 공칼베스가 아프리카에서 12명의 흑인을 포르투갈로 데려온 것이 노예제의 시초였다. 미국의 노예 제도는 인간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흠을 냈음은 물론 미국 역사에서 두고두고 분열과 반목의 원인이 되었다. 미국 내의 인디언들도 흑인들과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우호적으로 백인들을 받아들였던 인디언들을 배신하고 그들의 기름진 땅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이주시켰다. 삶의 터를 잃은 인디언들은 백인들의 노예가 되어 일할 수밖에는 없었다. 백인들은 인디언들의 기름진 땅을 빼앗고, ‘인디언 보호 구역’이란 명분 아래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척박한 땅으로 인디언들을 몰아 넣었는데 그 곳으로 가는 길에서 수만 명의 인디언들이 목숨을 잃어 ‘눈물의 길’이라고 불리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 리고 멕시코를 차지한 스페인과 영국에서는 인디언을 죽이고 머리 가죽을 벗겨오는 사람들에겐 남자 1명당 100페소나 100달러, 여자는 50페소나 50달러, 어린아이는 25페소나 20달러를 포상했다. 특히 영국 정부에는 이러한 야만 행위를 의회에서 법으로 통과시키는 노골적인 행위를 하였다. 그래놓고서는 일말의 가책이 들었던지 ‘인디언 머리가죽 벗기기’는 하나님이 주신 명백한 운명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과거의 미국 서부영화를 보면 ‘아파치족’인 인디언이 백인들의 머리가죽을 벗기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명백한 왜곡이다. 그들은 죽은 사람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극히 꺼려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고, 원래 인디언은 평화와 자연을 존중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만약 인디언들이 백인들의 머리 가죽을 벗겼다면 그것은 보복 차원이었을 것이다. 인디언들이 머리 가죽을 벗기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없는 주장이다. 어쨌든 백인들이 아메리카로 오긴 전, 인디언의 수는 5천만 명에서 1억명 정도였으나 지금은 겨우 20만 명이 극빈층이 되어 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자유와 문화는 이렇게 해서 파괴되고 소멸되어 갔다.
독립전쟁
프 랑스와의 7년 전쟁이 끝난 뒤, 영국은 1억 3000만 파운드의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영국법을 어겨가며 밀수를 했다. 미국인들이 영국의 경쟁 상대인 프랑스령 카리브 섬에서 더 질 좋고 싼 설탕과 사탕수수를 사들여 주요 무역상품인 럼주를 대량생산하여 밀수출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영국 정부는 격분을 하고 1733년, 프랑스, 네덜란드로부터 수입하는 사탕수수에 세금을 매겨 미국을 보호한다는 사탕수수조례를 제정했다. 그런데다가 미국에서 사고 팔리는 모든 상품에 세금을 냈다는 ‘납세필증’이라는 인지를 붙이게 하는 인지조례를 발표하여 미국인들의 원성을 샀다.
식 민지 주들은 이에 대항하여 영국제품 수입을 중단했고 자칭 ‘자유의 아들들’이라는 과격단체까지 등장했다. 이로 인해 인지조례는 폐지되었고, 타운센트 법이 만들어졌다. 이의 내용을 보면 ‘미국에 주둔하는 영국 군대는 미국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니 그 주둔 비용의 일부를 미국이 부담할 것이며, 미국뿐 아니라 모든 식민지에서 수입되는 상품에는 모두 관세를 물린다.’였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반영감정이 악화되어 이 법으로 거둔 관세는 3500파운드인데 비해 영국 수입 상품 거부로 입은 피해는 730만 파운드였다. 그래서 타운센트 법도 폐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는 보스턴 군중들이 보스턴 세관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흥분한 영국군에 의해 5명이 죽고 여러 명이 부상당하는 ‘보스턴 학살’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모든 일들이 영국의 온건정책으로 조용해지는 듯 했다.
그 런데 영국이 인도에 세웠던 동인도 회사가 파산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영국 창고에 쌓여 있는 차(茶)를 미국에 팔아 동인도 회사의 주주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을 안 미국의 밀수업자들은 자신들의 사업에 큰 타격을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과격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1773년 12월 16일 ‘자유의 아들들’ 단원들은 인디언으로 분장을 하고 보스턴 항으로 가서 7만 5천 달러어치나 되는 동인도회사의 차를 바다로 집어던진 것이다. 이를 ‘보스턴 차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것 때문에 영국 의회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1744년 영국 의회는 보스턴 항구 조례를 만들어 식민지가 손해를 배상하지 않으면 보스턴 항구를 봉쇄하겠다고 했으며, 영국을 위해 식민지인(미국인)을 살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영국법이 적용되어 그들을 보호하게끔 하는 사법행정조례를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인 거주 지역을 오하이오 계곡으로 제한하여 미국인들의 캐나다와 서부 진출을 막았다.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자 모든 식민지가 대책 논의를 위해 필라델피아에 모였는데 이것을 뒷날 ‘대륙회의’라고 하게 되었다. 이를 안 영국은 ‘대륙회의’ 자체가 영국에 대한 반란이라고 규정하고 군대를 파견했다. 이로써 1775년 4월 19일 미국이 렉싱턴에서 영국군과 미국의 민병대가 붙게 되었다. 이것이 독립 전쟁의 시작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처음엔 민병대가 대패를 했으나 곧이어 벌어진 싸움에는 식민지의 민병대가 승리를 거두어 전쟁은 결말을 알 수 없는 안개에 싸이게 되었다.
처 음에 독립을 생각지 않았던 미국인들도 토마스 페인의 자극으로 독립을 요구하게 되었고, 전쟁은 더 치열한 양상으로 변해갔다. 따라서 대륙회의에서는 1776년 7월 4일 토마스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의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노예무역에 대한 공격부분은 삭제한 것이었다. 미국은 이미 흑인 노예를 부려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주민의 상당수가 전쟁에는 관심도 없었고,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에 미국의 민병대는 정예화된 영국군을 물리치기 힘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워싱턴 장군의 뛰어난 전략에도 불구하고 미국군은 패전에 패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전날, 갑자기 델라웨어강을 건너 영국의 트렌턴 요새를 공격 대승을 거둠으로써 전쟁판을 크게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새러토가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전쟁에 방관만 하고 있던 유럽의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가 미국 편이 되어 주었다. 결국 1781년 영국군 사령관 콘웰리스 장군은 워싱턴 장군에게 항복하여 7년 동안 계속되었던 독립전쟁은 막을 내렸다. 1783년 ‘파리조약’으로 미국은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은 것이다. 파리조약의 내용은 미국이 캐나다로 진출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에스파니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시시피 강에 영국군이 머무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미국은 워싱턴에게 왕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으나 워싱턴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미국은 후에 미국인에 맞는 자유와 평등이 바탕이 된 헌법을 만드는데 이것을 미국헌법이라고 한다. 지역 주민이 5000명이 되면 스스로 입법기관을 설립해 법을 제정할 수 있게 하고, 6만 명 이상이 되면 기존의 13개주와 동등하게 ‘주(州)’로 승격되며, 미국 영토의 모든 이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영국 전통이었던 맏아들 상속제를 폐지하여 모든 아들 딸들은 평등하다고 못 박았으며, 노예제도는 전면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미국은 그 어떤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혁명적인 헌법을 만들어 행정, 입법, 사법부의 권력 분립을 강조했다.
결국 1789년 4월 30일 만장일치로 조지 워싱턴을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부통령엔 존 애덤스가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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