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1096년~1270년)
395 년 로마가 게르만족에게 공격을 당하면서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여기서 동로마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비잔틴 제국)이라고 합니다. 서로마는 게르만족에게 476년 멸망당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 제국에게 1453년에 멸망을 당하지요. 따라서 동로마 제국의 존재 시기는 유럽의 중세 시기와 거의 일치합니다. 왜냐하면 유럽의 중세는 민족의 대이동에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까지를 말하거든요.
비 잔틴 제국은 현재의 그리스 남동부(발칸반도)와 소아시아(터키)에 걸쳐 있던 제국으로 그리스정교를 믿습니다. 그리스 정교란 영국의 성공회(영국 국교회)처럼 로마 교황을 승인하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신비롭고 화려한 성찬 의식을 중요시하며, 종교의 사회적 기능보다는 고행을 미덕으로 하고, 성상 숭배를 금지합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마리아상, 예수의 상을 만들어 찬양하지만 그리스정교에서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비 잔틴 제국의 종교 중심지는 발칸반도 동쪽 끝에 있는 콘스탄티노플입니다. 즉 비잔틴 제국의 수도지요. 콘스탄티노플이란 ‘콘스탄티누스의 거리’라는 뜻입니다.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 인에게 멸망한 후에는 이름이 이스탄불로 고쳐졌고, 현재는 이슬람교를 믿는 터키의 영토입니다. 비잔틴 제국은 유럽과 아시아의 건널목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잘 조화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에 지은 성 소피아 대성당은 비잔틴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커다란 돔(둥근 천장)과 모자이크 벽화가 특징이지요. 어쨌든 동로마 제국은 중세동안 동방의 침입으로부터 서방 세계를 보호하는 방파제 구실을 하였고, 서유럽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지요. 즉, 헬레니즘 문화(그리스문화+오리엔트 문명:동양문명)를 계승하였습니다.
그 런데 비잔틴 제국은 셀주크 투르크에게 소아시아 대부분의 땅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런데다가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던 유럽인들이 셀주크 투르크 인에게 당하는 일까지 생겨났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가 되는 곳인데 바로 이것이 전쟁을 일으킨 표면적인 이유가 된 것입니다. 비잔틴 황제는 위기에 처하게 되자 서로마 교황에게 사절단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클레르몽에서 공의회를 소집했지요. 그는 순례자들의 위험성을 과장하여 사태의 급박함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성직자들은 ‘신은 그것을 원하신다.’라고 외치며 ‘성전(聖戰)’을 촉구했습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 탈환을 목적으로 십자군을 조직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들로부터 탈환하여 신의 영광을 높이겠다고 결의했습니다.
하 지만 십자군 전쟁의 목적은 따로 있었습니다. 로마의 교황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봉건 영주는 영토를 넓혀 더 큰 권력과 부를 얻으려 했고, 상인들은 동방 진출의 길목에서 셀주크 투르크 때문에 지중해 무역과 동방 무역을 수월히 할 수 없게 되자 이들의 세력을 무찔러 해상권을 장악하고 동방진출을 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십자군 원정은 굵직한 것만 8차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전쟁까지 포함하면 그 전쟁의 횟수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러나 예루살렘을 탈환한 것은 1회 원정과 5회 원정 때 잠시뿐이었습니다. 1회 십자군 전쟁 때는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으나(1099년) 곧 세력이 약화되었고, 1187년에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4회 십자군 원정입니다. 4회 십자군 전쟁은 베네치아(이탈리아) 상인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전쟁을 상업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려는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실리를 위해서는 아무런 명분도 필요 없었던 것이죠. 이들은 예 루살렘이 아닌 비잔틴 제국을 공격합니다. 엉뚱하게도 함께 싸워야 할 대상(같은 그리스도교)을 공격한 것이지요. 결국 이 사실은 십자군 전쟁이 성전(聖戰)이 아니라 각각의 이해관계에서 일어난 비열한 것임을 말해 줍니다. 이러한 비열성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 바로 소년 십자군이었습니다. 유럽인들은 10대의 어린 소년들을 십자군에 동원했습니다. 그들은 전쟁터로 가는 중 이탈리아 상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소년들은 유럽 상인들에겐 한갓 물건에 불과했습니다.
1212 년 십자군에 동원된 소년들은 노예상인의 농간으로 이집트의 이슬람교도들에게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이것은 십자군 전쟁이 돈을 벌기 위한 상인들의 경제적 목적 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당시 교황이었던 인노첸시오 3세까지도 소년 십자군을 권장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오를레앙 지방의 목동 엔티엔이 성지 회복을 주장하여 3만의 소년 소녀를 모았고, 독일에서는 쾰른 지방의 소년 니콜라우스가 2만의 아이들을 집결시켰다. 그러나 모두 악덕 상인들의 꾐에 속아 아프리카(이집트), 미국 등에 노예로 팔렸고, 도중에 배가 난파하여 생명을 잃은 아이들도 많았다. 이 어린이 십자군은 그 당시 사회 전반에 고조되었던 광신(狂信)을 잘 보여주는 비극이다.)
십 자군 전쟁은 오욕으로 끝난 명분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성지 탈환이란 명분은 전쟁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 목적이 다른 곳에 있었기에 174간의 무모한 전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쨌든 174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사람들의 신앙심이 흔들렸으며, 교회의 권위가 추락했습니다. 따라서 교황의 권위도 약화되었지요. 14세기 초에는 프랑스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과세권을 두고 싸웠는데 교회가 패해 교황청은 약 70년간 아비뇽으로 옮겨져 프랑스의 간섭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을 ‘아비뇽의 유수’라고 합니다. 이 때 로마와 아비뇽에서 각각 교황이 선출되어 서로의 정통성을 주장하여 ‘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교회의 대분열에 대하여
1378 년, 교황 그레고리가 사망하자 로마에서는 우르바누스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인 추기경들은 동족인 클레멘스 7세를 선출했으며, 이로써 유럽 각국이 교황을 따로 설치하는 등의 교회 대분열을 가져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409년, 추기경들은 공의회를 열었고, 로마도 프랑스(아비뇽)도 아닌 제3의 교황인 알렉산드르 5세를 선출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요한네스 23세를 교황에 추대해 교황은 3명이 되었다. 이에 1414년 공의회를 열어 요한네스 23세를 곧 퇴위시키고,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와 아비뇽 교황 베네딕투스13세도 퇴위시켰다. 그리고 1417년 11월 새로운 교황 마르티누스 5세가 선출되어 분열은 종식되었다.)
그리고 영주들의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반면에 왕권을 강화가 되었지요.
그 런데 특이한 사실은 십자군 전쟁이 끝난 무렵인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무시무시한 마녀사냥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 마녀 사냥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가 50만 명이라고 하니 무시무시하지요? 지배층들은 십자군 원정의 실패와 가뭄, 전염병, 과한 세금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모든 책임을 서민들 중에 끼어 있는 죄없는 사람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악 마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가 우박을 내리게 하고 가뭄을 몰고 온다는 것이었죠. 잔인한 고문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면서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마녀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은 모두 서민들이었으며, 약 3명 정도가 귀족이었는데 이들은 곧 풀려났습니다. 물론 고문도 당하지 않았지요. 어리석은 광신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인권 유린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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