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주의 시대
신 항로 개척으로 인한 상업의 발달로 봉건제도가 16세기에는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과 국가의 통일이 이루어져 절대주의 국가가 성립하였습니다. 따라서 16세기부터 18세기의 유럽 역사를 절대주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절대주의 사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왕은 그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다.
둘째,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고, 백성들에겐 권리가 없다.
셋째, 중앙집권 통치를 위해 관료제가 도입되었고, 상비군을 편성, 유지하였다.
넷째, 관료제와 상비군 유지에 돈이 필요하여 조세 제도가 마련되고 통일 국가 통치를 위한 사법제도가 마련되었다.
프 랑스의 루이 14세는 “태양이야말로 가장 분명하고, 가장 아름답게 위대한 군주의 모습을 보여준다.”라고 하면서 왕의 권위를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루이14세는 자신을 태양이라고 말하면서 또한 자신을 신과 같은 존재라고도 말합니다. 따라서 왕은 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며 지상에 있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왕권신수설을 옹호했던 인물은 보댕, 보쉬에, 홉스 등이었습니다.

(루이 14세와 그 시대의 남자 복식: 당시 남자들의 옷을 보면 넓은 소매의 긴 코트를
입었고, 조끼, 레이스 크라바트(넥타이), 가발을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절 대주의 시대에는 국가의 부강을 위해 상업을 중시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하여 국내 산업을 보호, 육성하고, 상품 시장과 값싼 원료를 얻기 위해 식민지 경영에 더 열을 올렸습니다. 상업이 잘 되어야 조세를 많이 거둘 수 있으니 절대왕권의 유지를 위해 중상주의 정책은 필수였습니다. 가장 먼저 절대주의를 확립한 나라는 에스파냐로 펠리페 2세 때 절정을 맞았습니다. 그는 식민지에서 들여오는 금, 은을 이용해 무적함대를 만들어 세계 해상권을 장악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 때에 영국 국교회를 확립하고, 무적 함대를 격파하여 해상권을 찾았으며,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절대주의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고,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하여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베르사유 궁전을 지어 궁정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동유럽의 절대주의는 서유럽보다 1세기 늦게 시작되었습니다. 왜냐 하면 농노제(봉건제)가 다시 강화되어 국내의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도시의 발달도 미약했기 때문입니다.
독 일의 수많은 영방국가(독일에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를 비롯하여 30개가 넘는 제후국가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영방국가라고 부른다) 가운데 하나인 프로이센에서는 프리드리히 대앙이 스스로를 계몽군주라고 말하며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고 산업을 장려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후진국이었던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때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열어 유럽과 적극적인 교루를 시작했으며 러시아의 근대화와 영토의 확장에 힘썼습니다.

(펠리페 2세)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여제)
유럽 각국의 절대왕권의 전성기를 봅시다.
*영국(엘리자베스1세 시대) : 영국 국교회(성공회)확립, 모직물 공업 육성, 네덜란드 독립 지원, 무적함대 격파, 이후 해상권 장악, 인도에 동인도회사 설립.
*에스파냐(펠리페2세 시대) : 무적 함대로 세계 해상권 장악, 가톨릭 중심이 강압적인 종교 정책. 네덜란드의 신교도 탄압으로 종교전쟁을 일어나게 하였으며 이는 네덜란드의 독립으로 이어짐.
* 프랑스 (루이 14세) : 중상주의 정책, 강력한 군대 양성(상비군), 학문과 예술 발전, 베르사유 궁전 축조, 말년에 위그노(프랑스의 신교도)박해, 잦은 침략 전쟁, 재정난 심각.
* 프로이센 ( 프리드리히 대왕) : “나는 국가 제1의 심부름꾼이다.”라고 말하며 계몽군주임을 자처하고 많은 개혁을 단행,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에 참여하여 영토 확장, 산업장려, 농민보호, 잔혹한 형벌 제도 폐지.
*오스트리아(마리아테레지아) : 스스로를 계몽군주라고 함. 국내산업 육성, 고문제도 폐지, 국민 교육 제도의 개선
*러시아(표트르 대제) : 서유럽화 정책(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스웨덴과 북방 전쟁으로 부동항 획득, 시베리아로 진출하여 영토 확장하고 국경 확정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태양이야말로 가장 분명하고, 가장 아름답게 위대한 군주의 모습을 보여준다.”라고 하면서 왕의 권위를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루이14세는 자신을 태양이라고 말하면서 또한 자신을 신과 같은 존재라고도 말합니다. 따라서 왕은 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며 지상에 있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 존재라는 거지요. 이를 '왕권신수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루이 14세가 처음부터 이렇게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교묘한 방법으로 귀족들의 세력을 누르게 됩니다.
루이 14세는 5세가 채 안 된 나이에 1,900만 명의 프랑스 백성들을 다스려야 하는 위치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말만 왕뿐이었지 귀족들과 평민들의 반란이 일어나는 가운데 루이는 왕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함과 불운함, 두려움과 굴욕감, 추위와 배고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시련들은 어린 왕이 앞으로 보여줄 성격과 행동 그리고 사고방식을 형성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왕인 자기를 이런 신세로 전락시킨 파리 및 귀족들과 평민들 그 어느 쪽도 결코 용서하지 않으려 했지요. 1661년 24살에 왕위에 오른 루이 14세는 이제 친히 정치를 하면서 몸소 왕국을 다스릴 모든 책임을 떠맡겠다는 뜻을 밝혀 신하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루이 14세의 이러한 뜻은 중앙집권화를 이루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신이 내린 절대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해 지상에서 신을 대신하는 인물로 자처했고, 태양왕이라고 자칭했으며 모든 불충(不忠)과 반란을 죄악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신을 대신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완벽하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완벽해지도록 노력했다고 합니다. 루이는 54년 동안 매일 8시간씩이나 정무(政務)에 열중했으며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의 손길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궁정예절부터 군대이동까지 그리고 길을 닦는 일부터 신학적인 논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자신이 주관하려 했습니다. 그는 젊음과 정열이 넘쳐 흐르는 왕이었으나 독재자였습니다.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선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하고 귀족들을 사치와 방탕에 빠지도록 유도했습니다. 따라서 명민함을 잃은 귀족들은 왕에 귀속되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루이 14세는 예술을 장려한 왕으로 유명한데 그 또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이용하였습니다. 작가들을 후원하여 자신을 찬양하게 했으며, 1664년부터 베르사유 궁전을 짓기 시작하여 1715년에야 완성하였습니다. 베르사유는 이 궁전이 지어지기 전에는 시골에 불과했으나 이 성이 지어진 후로는 유럽 중심의 도시가 될 정도로 유명해졌습니다. 늪지를 대번에 유럽의 중심지로 만든 루이 14세. 그가 노렸던 것은 이렇게 불가능하리라는 일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자기 힘을 과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그리고 그는 여러 차례 전쟁을 치러 꽤 큰 성과를 이루었고, 파리 시민들을 그를 대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루이14세는 프로테스탄트(신교) 세계 전체를 자신의 적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들(위그노)이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 존재라고 여기고 그들을 무력으로 개종시키려 애쓴 다음 프로테스탄트에게 예배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던 낭트 칙령을 1685년에 철회했습니다. 칙령이 철회되고 무자비한 박해가 뒤따르자 수많은 수공업자들이 프랑스를 등지고 떠나야 했으며 역경이 끝없이 닥쳐왔습니다. 이리하여 루이 14세 치세는 쇠퇴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생 전에 외국의 잡지들은 그를 피에 굶주린 호랑이에다 견주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로부터는 끊임없이 아첨을 받아왔습니다. 아무튼 루이 14세는 역대 왕들 가운데 프랑스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도록 한 가장 으뜸가는 왕이었습니다. 루이 14세를 찬양했던 보댕, 보쉬에, 홉스 같은 사람은 '왕권 신수설'을 옹호(지지)했던 학자들이었지요.
엘리자베스 여왕은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1558~1603 재위하여 약 45년간 통치한 영국의 위대한 왕입니다. 또한 절대 군주의 표본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영국에서는 그녀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통치했던 시기를 '엘리자베스 시대'라고 할 만큼 영국의 전성기를 마련한 왕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잉글랜드는 정치와 상업 및 예술 분야에서 유럽 최고가 되었지요. 그녀는 잉글랜드라는 작은 왕국의 왕이었지만 현명하고 용감하며 당당했습니다. 이에 백성들을 그녀를 따랐고, 백성들의 충성심을 북돋워서 외적과 맞서 나라를 통합하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습니다. 그녀는 튜더 왕가의 헨리 8세와 그의 2번째 아내인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지요. 헨리의 첫 아내인 캐서린은 스페인 공주로, 메리라는 딸 하나밖에 낳지 못했기 때문에 헨리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때 헨리8세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이 캐서린과의 이혼을 반대하자 의회로 하여금 영국국교회(성공회: 교황을 인정하지 않음)를 통과시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앤 불린이 왕비가 되었지만 아들을 낳아주기를 바라는 헨리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딸 엘리자베스를 낳자, 크게 실망한 헨리는 엘리자베스가 3번째 생일을 맞기 전에 왕비에게 간통과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참수했지요. 뿐만 아니라 헨리의 부추김을 받은 의회는 헨리와 앤 불린의 결혼이 처음부터 무효였으며, 따라서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리하여 엘리자베스는 젖먹이 때부터 햇필드의 별궁에서 외롭게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6세 때 이미 40세가 된 사람처럼 의젓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누구도 엘리자베스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계승서열 3번째인 엘리자베스는 훌륭한 가정교사들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지요. 고전과 역사, 수사학 및 윤리 철학을 배웠으며, 그리스어와 라틴어 이외에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는데, 이런 외국어 능력은 나중에 그의 외교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답니다. 영리하고 진지한 그녀는 신학도 공부하여 형성기에 있던 성공회(영국국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1553년 에 프로테스탄트(기독교)를 받아들인 에드워드 6세가 죽자, 열렬한 가톨릭교도인 메리가 즉위했습니다. 메리 여왕은 영국국교회(성공회)와 프로테스탄트를 없애서 강제로라도 잉글랜드를 가톨릭으로 복귀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성공회와 프로테스탄트는 엄청난 박해를 받습니다. 오죽하면 메리 여왕의 별명이 '피의 메리'일까요. 이러한 때 엘리자베스도 반역죄로 런던탑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온갖 심문을 해도 엘리자베스의 반역에 대한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자 런던탑에서 풀려나 우드스톡에 연금되었고, 메리의 통치기간 동안 박해를 받았지요. 엘리자베스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겉으로는 이복 언니인 메리 여왕의 요구대로 가톨릭을 신봉하는 척했습니다.
메리가 통치 5년만에 죽자 서열에 따라 엘리자베스는 거국적인 환영을 받으며 왕위에 올랐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우선 현명한 신하들을 등용해 통치 기반을 단단히 다졌습니다. 그 당시 영국도 우리나라 조선시대와는 다르지 않아서 여자는 집안에서 음식이나 만들고 바느질이나 하는 여자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여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퍼져 있었지요.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느 개인이나 파벌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을 우선하겠다는 것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습니다. 왕의 권한은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라 강조하면서 백성들의 복종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녀는 엉성하고 탄탄하지 못한 관료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구혼자로 나선 인물들은 많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녀는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았지요.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결혼하지 않은 이유를 자신의 권력을 남편과 나누어 갖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왕은 결정적인 순간엔 늘 혼자 결정하니까요. 또한 그녀는 측근들조차도 속아넘어갈 정도로 연기를 잘 했기 때문에 누구도 그녀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답니다.
오랫동안 엘리자베스는 프랑스 및 스페인과 복잡한 외교 게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580년대 중엽에 이르자, 스페인과의 무력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이 차츰 분명해졌습니다. 스페인 왕 펠리페 2세가 함대를 모으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런던에 전해졌습니다. 펠리페 2세는 이 함대를 이끌고 네덜란드로 가서 파르마 공작이 이끄는 스페인군과 합류한 다음, 잉글랜드를 침공할 작정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늘 인색하기만 했던 여왕도 이번에는 충분한 자금을 들여 기동력이 뛰어나고 충분한 무장을 갖춘 함대를 갖추는 데 동의했습니다. 1588년 7월에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잉글랜드 해역에 도착하자, 여왕의 배들은 무적함대를 무찔렀고, 패퇴한(패하여 물러난) 스페인 무적함대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심한 폭풍우에 휘말려 거의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이로써 영국은 스페인이 가지고 있던 해상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엘리자베스는 인색했지만, 몸치장에는 아낌없이 돈을 썼습니다. 공들여 만든 아름다운 옷과 값비싼 보석에 대한 정열에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습니다. 가장 화려한 의복을 입으므로 해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고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자신만만한 여왕에게도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여왕이 오랫동안 통치를 하다보니 측근(가까운 사람)들은 부패하기 시작했고, 백성들은 여왕과 그녀의 측근들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이로 인해 여왕은 우울증과 질병에 시달렸고, 점점 쇠약해지는 조짐을 보였고, 1603년 3월 24일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통합되게 되지요. 제임스 6세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통합왕이 되면서 제임스1세로 칭해집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여성의 권위와 왕의 위엄 및 국가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강력한 이미지를 심어 놓았고, 그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가장 강력하게 왕권을 행사했던 절대군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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