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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크의 영웅(1)

하늘벗삼아 2014. 2. 10. 23:29



********플루타르크의 영웅전**********

 

  플 루타르크는 (46년~120년)는 그리스의 카이로네이아에서 출생하여, ‘최후의 그리스인’이라고 불릴 만큼 그리스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달통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박학다식하여 윤리, 철학, 종교, 문학, 자연과학, 수사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250여 편의 글을 남겼다고 전해지는데 현존하는 글은 [윤리논집]과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이다.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은 ‘대비열전’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영웅들을 서로 비교하여 영웅들의 삶의 진실을 파악하고자 했다. 이 영웅전에는 데미스토클레스, 데모스테네스, 알렉산더 대왕, 카이사르, 부루투스 이렇게 다섯 명의 영웅들이 나오는데 이들 못지 않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도 함께 공부하도록 하자, 영웅들 이름에 한니발이 빠진 것은 그가 그리스와 로마인이 아닌 카르타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데미스토클레스, 데모스테네스, 알렉산더)

 

 

1. 데미스토클레스 (기원전 528년 ~ 기원전 462년)

 당 시 그리스는 여러 도시국가(폴리스)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도시국가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였다. 이 도시국가들은 신분제도를 유지하여 귀족계급과 시민계급, 노예계급이 존재했다. 아테네에서 태어난 데미스토클레스는 귀족이 아니라 평민 출신이었다. 데미스토클레스는 이런 자신의 상황에 좌절하지 않고, 꼭 정치가로서 출세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틈만 나면 무술과 웅변을 연습했다. 당시 정치가나 장군들은 웅변을 잘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많은 지식을 쌓음과 동시에 자신감을 키워나갔다. 이것을 보고 있던 그의 아버지는 ‘정치가는 버려진 낡은 배’라는 충고를 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필요할 땐 정치가를 이용하지만 필요없게 되면 버린다. 결국 아무도 찾지 않은 버려진 낡은 배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그는 꾸준히 노력하여 정치가가 될 수 있었다. 아테네의 시민들은  솔직한 연설에 감동하여 그를 지지했고, 34살에 지금의 국무총리와 같은 직책인  집정관의 자리에 올랐다.

 

 그 런데 당시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계속 위협하고 있었다. 아테네 동쪽에 있던 페르시아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에 거쳐 자신들의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던 대제국이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도시국가들도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 양으로 모든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데미스토클레스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아테네와 스파르타만은 항복을 거절했다.  분노한 페르시아는 마라톤 들판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아테네의 밀티아데스 장군은 비좁은 골짜기로 페르시아군들을 유인하여 기습공격을 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밀티아데스 장군은 그의 전령(전쟁에서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군인)인 페이디피데스에게 승전보를 아테네 시민에게 알리라고 하였다. 페이디피데스는 42km가 넘는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가 승전 소식을 알리고 죽었다. 그 뒤 그를 기념해 올림픽에 마라톤 경기가 행해졌다.

 

 하 지만 기뻐하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데미스토클레스는 충고를 했다. 페르시아는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수많은 군함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예언대로 페르시아는 다시 쳐들어 왔다. 살라미스 섬에서 그리스군과 페르시아는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그리스 동맹군은 파도에 끄덕도 하지 않는 군함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결국 파도가 심한 이 바다에서 페르시아군은 참패를 하고 돌아갔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살라미스해전’이다.

 그 러나 그 뒤 데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의 공적을 너무 자랑하며 다녔고, 스파르타까지 넘보며 계속적인 전쟁을 하려고 하여 시민들의 미음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페르시아와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게 되어 쫓기는 신세까지 되어 버렸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버려진 낡은 배’가 된 것이었다. 그는 쫓기다가 페르시아의 왕에게까지 가게 되었다. 페르시아의 왕은 예전의 유능했던 그를 생각하고 융숭한 대접을 해 주었다. 그런데 그 때 이집트가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아테네가 개입하여 왕은 데미스토클레스에게 아테네를 정벌할 것을 요구하며 아테네 정벌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데미스토클레스는 고민했다. 자신을 버린 조국 아테네를 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결국 그는 마지막으로 성대한 잔치를 열고, 독약을 마셨다. 지혜와 계략이 뛰어난 그였지만 조국 앞에서는 생명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년 ~ BC322년)

 데 모스테네스는 그리스 최고의 웅변가로 통한다. 그는 어릴 때 변론가인 칼리스투라투스의 변론을 듣고 ‘한 치의 혀가 전 세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웅변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으며 몸도 허약했다. 이러한 약점을 딛고 그는 10년 이상 유명한 스승에게서 웅변술을 배워 변론가로 나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변론에는 진실과 감정과 상황에 따른 동작술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지하실로 들어가 피나는 연습을 하여 드디어 웅변가로서 성공을 할 수 있었다. 당시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은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를 위협하고 있었는데 데모스테네스는 그의 진실어리고 뛰어난 웅변술로 아테네 시민들을 단결시켰다. 데모스테네스는 마케도니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 아테네 옆에 있는 강력한 도시국가 중의 하나인 테베로 가서 동맹할 것을 연설했다. 그의 연설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동맹를 하게 되었고 마케도니아에 대항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가 뒤를 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어린 알렉산더를 무시했지만 그는 순식간에 테베를 점령했다. 이에 놀란 아테네는 알렉산더와 평화협정을 맺으려고 하였다. 알렉산더는 웅변가 10명을 인질로 보내면 평화협정을 맺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데모스테네스는

‘ 양의 무리가 자기를 지켜주는 개를 이리에게 내주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를 알렉산더에게 보내는 것은 자기를 지켜주는 개를 먹이로 주는 것과 같습니다. 알렉산더는 이리이기 때문입니다.’

 

 

라 는 연설을 했다. 그래서 아테네 시민들은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10명의 웅변가 대신 10명의 사신을 평화의 사절로 보냈고, 대표인 데마데스는 임무를 잘 수행하고 돌아왔다. 다시 평화를 찾은 아테네인들은 데모스테네스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데마데스를 영웅으로 삼았다. 이런 상황에서 마케도니아로부터 망명한 하르팔루스라는 사람이 몰래 데모스테네스의 집에 황금 술잔을 가져다 놓아 그는 뇌물을 받았다는 죄로 감옥에 갇혔다. 탈출을 한 그는 피해다니면서 웅변가의 비참한 생애를 한탄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아이기나 섬으로 망명해 있을 때 알렉산더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이 생겼다면서 다시 아테네로 돌아갔다. 아테네 시민들은 과거의 죄를 묻지 않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다시 마케도니아와 싸울 것을 연설했고, 그의 말대로 그리스의 여러 국가들은 동맹하여 마케도니아에 저항했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는 그리스군의 패배였다. 아테네 시민들은 모든 탓을 데모스테네스에게 돌렸다. 결국 그는 포세이돈 신전이 있는 칼라우리아 섬으로 도망쳤고, 거기서 독이 묻은 펜대를 입에 물고 자살을 하였다. 이 때가 기원전 322년 11월 10일이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그의 동상을 세운 뒤에 ‘그리스를 위한 지혜’라고 새겨 넣었다. 그는 지금까지도 최대의 웅변가로 통하고 있다.

 

 

3. 알렉산더 대왕 (기원전 356년 ~ 323년)

 알 렉산더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정복하며 동서 문화의 화합을 이루려고 했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가 이루어낸 동서 화합 문화를 헬레니즘 문화라고 하는데 이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가장 큰 업적이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주 수려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용맹했고, 독서광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지식의 소유자였다. 어릴 때 그리스 최고의 철학가로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삼아 다방면의 지식을 쌓았다.

 

그리고 18세의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그리스 도시국가인 테베의 군대를 무찔렀다.

 아 버지 필리포스는 매우 엄격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원한을 사는 일이 많아 결국 암살을 당하고야 말았다. 20살의 어린 나이로 알렉산더가 왕위에 오르자 그동안 마케도니아의 기세에 눌려 있던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독립을 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알렉산더는 순식간에 그리스 전역을 점령했다. 그리스 전역을 점령한 알렉산더는 문제는 페르시아에 있다고 생각을 하고 페르시아 원정길에 나섰다.

 

그는 자신과 함께 자란 클리투스 장군과 함께 적은 병력을 이끌고 페르시아로 갔다. 페르시아는 알렉산더 대왕 군을 무시했다가 패하고 후퇴하였다. 알렉산더는 칼리키아까지 순식간에 점령을 했으나 그 곳에서 열병을 얻어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알렉산더 대왕의 기지로 쳐들어 갔지만 이미 알렉산더는 병을 떨치고 일어난 후였다.

 

이 전쟁에서 알렉산더는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를 ‘이수스 전투’라고 한다. 다리우스 왕은 도망을 갔고, 왕비와 다리우스왕의 어머니, 두 공주를 포로로 잡았지만 아주 융숭한 대접을 해 주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침략한 지역의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것을 뺏지 않았다. 그가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것은 약탈이 아니라 화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식민지가 된 나라의 백성들에게 오히려 환영을 받을 정도였다. 그리고 부하들에겐 식민지에서 얻은 전리품들을 모두 나누어주어 불만이 없게 하였다.

 

자신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곳곳에서 모은 자료를 보내줄 정도로 학문에 사려가 깊은 왕이었다.  아버지 필리포스 2세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시리아와 지중해 지역을 모두 평정한 알렉산더는 이집트로 들어갔다.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식민지였는데 모두 알렉산더 대왕을 환영했다. 알렉산더는 아프리카의 한 쪽에 도시국가를 세우고 싶어했기 때문에 파로스라는 곳에 거대한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이곳은 지금 ‘알렉산드리아’로 불리는 곳으로  유명한 항구도시로 남아 있다.

 

그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알렉산더와 화의를 청했지만 그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페르시아 정복에 나섰다. 페르시아 군은 24만 명이었고, 알렉산더 대왕군은 4만 명이었지만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를 정복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다.  다리우스 왕은 죽으면서도 자신의 가족을 잘 보살펴 준 알렉산더에게 감사했다고 한다.

 

페르시아를 다스릴 때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 사람에겐 군사와 재정을 맡기고 행정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맡겼다. 그 당시에는 정복지의 사람들은 노예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는 식민지 땅의 사람들을 노예로 삼지 않은 것이다. 이에 페르시아를 원정하기 위해 알렉산더를 따라 나섰던 그리스 사람들은 불만이 많았다. 그 중 하나가  항상 그의 옆에 있던 장군 클리투스였다. 클리투스는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알렉산더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술자리에서 그리스인들을 비꼬는 말을 하자 클리투스는 알렉산더에게

 “우리 군사들의 공적을 대왕 한 사람이 가로채었소.” 라 고 소리질렀다. 이에 화가 난 알렉산더는 클리투스를 칼로 찌르고야 말았다. 알렉산더는 술이 깬 후, 자신의 일에 후회하며 며칠을 눈물로 보냈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그 후에도 알렉산더는 인도의 갠지즈 강 유역까지 진격했지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군사들 때문에 다시 페르시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고, 새 제국의 수도로 정한 바빌론까지 갔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인 열병(장티푸스라고 추측함)에 걸려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알렉산더는 3대륙을 점령하면서 그리스 문화를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심어주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문화를 그리스등 유럽에 전파했다. 이렇게 하여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화합을 이루어 새로운 문화가 싹텄는데 이것을 헬레니즘 문화라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은 삼키기 위한 침략이 아니라. 서로 화합하기 위한 침략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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