精神을 건강하게/기억해야할역사

간추린 이슬람역사

하늘벗삼아 2014. 2. 10. 23:16

 

 
 

 

 

 

 

 

 

1. 이슬람 이전시대(622년 이전)
아랍민족의 고향은 서남아라비아(오늘날의 예멘지역)이다. 8세기경에 시바여왕의 왕국이 융성하였고 인구과잉으로 아라비아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왕국보다 부족에 의해 지역이 분할되었다.
이슬람 출현이전에는 동쪽에는 페르시아, 서쪽에는 비잔틴 제국이 있어 완충역활과 중계무역을 하였다.
이슬람이전의 아라비아반도의 종교는 우상숭배가 빈번하였고, 메카의 카바신전에는 360여개의 우상이 존재하였으며 이슬람이전부터 메카로 정기적으로 순례하였다.
 
2. 예언자 및 정통칼리프시대(622-661)
예언자 무함마드(영어명 모하메트)는 메카에서 출생하였다. 610년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은후 추종자들이 늘어나 메카의 유력자(꾸라이쉬부족)들이 무함마드를 박해하여 622년에 메디나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슬람원년으로 계산한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종교, 사회, 정치, 군사 지도자로 부각되었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629년에 메카에 무혈입성하여 카바신전의 우상을 몰아냈다.
무함마드는 아라비아반도를 이슬람으로 통합하고 632년에 사망하였다.
 
칼리프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라는 의미로 이슬람 공동체의 종교, 사회, 정치 지도자를 의미하며,
칼리프는 부족장회의에서 선출된다.
*1대 칼리프 아부 바르크 - 아라비아반도 통일,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등 메소포타미아지역
  정복
*2대 칼리프 오마르 - 아라비아나 메소포타미아지역을 확보하고 페르시아왕조를 무너뜨려 이란,
  이집트까지 정복하여 이살름 세계의 근간을 마련
*3대 칼리프 오스만 - 메카의 명문가 출신으로 인재를 가문에서 중용한 탓에 암살됨
*4대 칼리프 알리 - 오스만 살해의 시비에 연루되어 반대파가 생겨 암살됨
 
3. 아랍왕조 우마이야왕조(661-750)
4대 칼리프 알리의 암살이후 우마이야 가문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건국하였다.
세습 칼리프제가 확립되고 중앙집권제를 추구하여 이슬람 공동체의 지배자가 되었다.
왕성한 정복활동으로 인도, 중국, 북아프리카, 스페인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대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정복지를 약탈하지 않고 정복민에게 이슬람으로 개종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인두세 명목의 낮은 세금만 내면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우마이야왕조 출범때부터 4대 칼리프 알리파와 무아위야간의 투쟁에서 순니파와 시아파가 나뉘었다. 시아파는 4대 칼리프 알리만을 정통 칼리프로 인정하는 종파이고, 순니파는 4명의 칼리프와 세습칼리프왕조를 정통 칼리프로 인정하는 종파이다. 현재 시아파는 이란과 일부 이라크지역에만 있고, 대체로 순니파가 이슬람의 주요구성원이다.
 
제국이 확대되면서 非아랍계 이슬람교도가 늘어나자 아랍인우월주의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시아파와 결탁하여 우마이야왕조를 무너뜨렸다.
 
4. 이슬람제국 압바스왕조(750-1258)
*정치적 배경
압바스家의 아부 압바스는 750년 다마스커스를 점령하여 우마이야가를 타도하고 압바스왕조를 세웠다. 압바스왕조는 정복전쟁보다 내실을 더 중요하게 여겨 이슬람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순수 아랍인의 국가였던 우마이야왕조와는 달리 압바스왕조에서는 아랍적 색채가 줄어들고 非아랍계가 득세하였으며 페르시아적 요소가 강화되었다.
수도를 전통적인 아랍도시 다마스커스에서 페르시아와의 경계선에 위치한 바그다드로 옮겼다.
9세기초에는 너무 강력해지는 페르시아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터키용병을 데려오면서 터키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하였고, 칼리프가 군사령관과 근위병에 대한 점차 통제권을 잃게되면서 부패와 불안정, 뇌물수수, 약탈등이 번져 왕조는 점점 침체기에 빠졌다.
10세기 중반에 중앙집권이 약화되고 아랍인과 페르시아인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압바스왕조는 여러 군소국가로 분열되었다가 1258년 몽고의 훌라구의 침입으로 명목뿐인 왕조조차 멸망하였다.
 
*경제적 배경
이라크지역의 풍부한 자원을 배경으로 찬란한 고대문명을 꽃피우고 바그다드는 동양세계의 문화적 중심지이자 인도무역의 경제적인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압바스왕조때의 경제는 농업, 광업, 상업, 공업등이 광범위하게 발전하여 경제적으로 풍요로워 사치와 방탕이 유행할 정도였다.
 
*사회적 배경
압바스왕조때는 아랍인, 페르시아인, 터키인, 로마인, 베르베르인 등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였다. 특히 페르시아인을 중심으로 비아랍게 무슬림들이 평등을 외치며 아랍인은 혈연적 개념을 벗어났다.
아랍인이란 이전에는 아라비아반도에 사는 사람들만 부르는 명칭이었으나 이후에는 아랍어를 구사하고 이슬람을 믿고 스스로 아랍인이라 인정하면 아랍인으로 여겼다.
이슬람문화의 황금시대의 끝은 사치와 향락이 만연하여 점차 제국은 타락하였다. 이슬람경전 꾸란에는 부인을 4명까지만 허용하였으나 백인여종을 데려와 첩으로 두는 풍습이 생겨나고 술집이 늘어났다.
 
*문화적 배경
피정복지 민족들이 이슬람교와 아랍어를 쉽게 받아들이며 문화의 황금시대였고, 그리스어, 라틴어, 페르시아어, 힌두어 서적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으며 이슬람문명의 한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이슬람제국의 非무슬림들은 인두세를 납부하는 조건으로 완전한 자유로운 종교생활을 할수 있어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조로아스터교등이 공존하였다.
 
5. 셀주크 투르크시대
중앙아시아 투르크계의 일족인 셀주크족이 세운 국가로 이란을 중심으로 세력이 확장되었다.
압바스왕조의 칼리프의 요청으로 바그다드에 들어가 시아파의 부와이 왕조의 세력을 일소하고 칼리프의 보호자란 의미로 술탄의 칭호를 얻었다.
압바스왕조의 분열이후 빠르게 세력이 확장된 셀주크투르크족은 11세기 중엽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어 전성기를 이루었다.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기독교순례자를 박해하면서 십자군전쟁을 초래하였나 교황세력에 대항하여 끝내 승리하였다.
몽고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6. 맘룩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압바스왕조가 멸망하면서 수만의 무슬림이 학살되고, 수천년간 쌓아올린 메소포타미아의 관계시설과 문화시설이 파괴되었으며, 이슬람 문화가 거의 소멸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이슬람의 위기에서 이집트의 맘룩이 시나이 반도근처에서 몽고족을 물리치면서 이슬람의 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맘룩이란 백인노예를 뜻하는 아랍어로 맘룩왕조의 창시자 아이베크가 노예상인에 의해 흑해부근에서 수입되어 근위병으로 일한데서 유래하였다.
 
7. 오스만 투르크시대(1299-1922)
중앙 아시아에 살던 투르크계 부족은 점차 서쪽으로 진출하였으며 오스만 씨족은 압바스왕조 시대에 칼리프의 근위병이 되기도 하였다. 오스만 1세가 건국하였으며 소아시아 지방을 통일하고 계속 서쪽으로 진출하여 십자군을 격파하고 발칸반도에까지 점령하였으며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고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키면서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이전하였다.
마지막 압바스왕조의 칼리프로부터 칼리프칭호를 물려받았으며 슐레이만1세시대에는 그 영토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이르렀다. 칼리프보다 술탄칭호를 사용하였다.
 
178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으로 오스만 투르크제국은 붕괴되기 시작하여 아랍민족운동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해 서구열강의 아랍식민지배가 시작되었다.
 
오스만 투르크 시대에는 공식언어가 아랍어에서 터키어로 바뀌면서 아랍문화의 암흑기가 되었고, 모든 문화의 중심지는 이스탄불이다.
 

출처 :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조희선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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