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 (르네상스 대표적 인물) : 다방면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요.
회화, 조각, 설계, 항공학, 동물학, 해부학 등. 다빈치는 '눈(目)'이란 자연계를 탐구하는 도구라고 했고, '보는 것'과 '아는 것'은 같은 것이라고 보았지요. 교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라고 했지만 다빈치는 교회와 가치관을 달리 했어요. 다 빈치는 당시 죄악시하던 시체 해부를 몰래 묘지에서 하곤 정확한 인체 해부도를 남긴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러한 발견 정신은 르네상스를 더욱 가치있게 했지요.
르네상스(Renaissance)와 종교개혁
약 천 년의 중세시대는 크리스트교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예술과 학문의 중심은 신(神)이었지요. 인간은 신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존재였고, 부끄러운 존재였으며, 언제나 회개(悔改)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인간은 자유로운 사상을 억압당하고, 크리스트교에서 만든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획일화된 사회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감추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불신과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유 의지는 세상의 중심을 ‘신’에서 ‘인간’으로 옮겨 가게 합니다.
엄 격하고 절제된 크리스트교 문화를 거부하고 14~16세기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자유롭고 독창적인 문화를 재생시키게 됩니다. 이것을 ‘르네상스’라고 합니다. 르네상스란 말은 화가 바사리가 처음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고전 미술의 부활을 ‘재생’이라고 표현했지요. 화가들은 자신의 육체를 검은 천으로 꽁꽁 가리고 있는 절제된 표정의 인간을 그리기보다는 훨훨 옷을 벗어던지고 아름다움을 맘껏 뽐내는 그리스, 로마 신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즉 이탈리아의 미술을 중심으로 가장 먼저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이지요. 이렇게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꽃필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후원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후원자들 중에는 율리우스 2세, 레오 10세와 같은 교황 외에도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 등의 여러 도시 국가들을 지배한 군주 등 쟁쟁한 인사가 많았습니다. 특히 피렌체의 메디치 가(家)는 대대로 학문과 예술을 보호하여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카톨릭을 믿고 있었지만 대대로 고대 문화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었으며,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도시들이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 도시 국가들이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것입니다. 이 때 활동했던 르네상스의 거장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 같은 명작을 남겼고,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조각인 ‘다비드상’을 남겼습니다. 라파엘로는 ‘마돈나 상’과 ‘아테네 학당’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 탈리아의 르네상스 운동은 16세기에는 알프스를 넘어 유럽에 퍼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와는 성격이 다르지요. 이탈리아는 조그만 도시국가의 부를 바탕으로 예술 분야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지만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는 종교 개혁으로부터 시작이 되지요. 에라스무스는 그가 쓴 ‘우신예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 재의 교황은, 가장 어려운 역할은 베드로와 바울로에게 맡기고 자신은 호화로운 의식과 즐거운 일만 찾는다. 교황처럼 즐거운 생활을 하고, 그처럼 근심 없는 사람도 없다. 왜냐 하면, 교회 의식을 통해 감시의 눈만 번쩍이면, 충분히 크리스트를 위해 충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의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당시 교회와 교황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알 수 있지요.
또 한 중세시대의 봉건제도는 농노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주고 있어 농노들은 영주의 지배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영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기사는 이제 존경스러운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통해 중세 기사도를 풍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이란 글을 통해 인간의 세속적인 모습을 사실대로 묘사했습니다. 이는 중세 시대 금욕을 강조하는 크리스트교 정신에 매우 위배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 지만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파헤치고 싶어 하는 열정은 멈추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인문학이라고 하며 이러한 사상을 인문주의라고 합니다. 처음에 인문주의는 인간을 중심으로 했던 고대문화를 연구하는 기풍으로만 생각되었지만 고전 작품 속에 나타난 인간상을 본받아 인간의 가치와 개성을 강조하는 운동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인문주의를 휴머니즘(Humanism)이라 하는데 로마제국시대의 사상가였던 키케로는 ‘휴머니즘이란 인간의 도덕성을 도야시켜 주는 품위 있는 과목들(문법, 수사학, 시, 역사, 도덕, 철학 등)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학자들도 대체로 키케로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신이 아니라 인간에 집중됩니다.
십 자군 전쟁 이후, 교황의 권위가 추락되고 그 후, 계속해서 교회의 권위도 추락되었는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은 교회를 더욱 불신하게 만들었습니다. 과학도 신을 중심으로 연구했던 중세 때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天動說)’을 신봉했습니다. 신은 인간이 사는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를 창조했기 때문에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그 밖의 행성들이 돌고 있다는 이론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천동설을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폴란드의 수학자였던 코페르니쿠스는 고대 그리스 학자들의 ‘지동설’ 주장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천동설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되지요. 그는 성당 지붕에 관측소를 세우고, 날마다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끝에 마침내 지동설을 확신하고, 이 사실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밝혔습니다. 그러나 종교재판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던 그는 죽기 1년 전인 1542년에서야 책을 출판하였지요. 그 후, 케플러, 갈릴레이 같은 과학자들에 의해 지동설은 다시 확인이 됩니다. 그러니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와 자연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 결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탐구하여 근대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였습니다. 특히 지동설은 과학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혁명적 이론으로 사람들이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게 된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 리고 이 당시에는 해외 무역의 발달로 중국으로부터 화약을 들여왔는데 이는 기사 계급의 몰락을 가져왔으며, 나침반은 신항로 개척에 이바지하였습니다. 또한 독일의 구텐베르크는 활판 인쇄술을 발명하여 출판문화에 새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 전에는 200쪽의 책을 한 권 손으로 베끼려면 4~5개월씩 걸렸으나 인쇄술이 발명된 뒤에는 하루면 가능하게 되어 145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유럽에서는 2000만 권의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참, 알프스 북부에서는 종교개혁을 중심으로 변화가 일어났다고 했죠? 왜 종교가 개혁을 해야 했던 걸까요? 중세 말기 교회는 이미 부패해질 대로 부패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공부하고 일하는 수도사들조차도 교회의 부패에 커다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각국의 왕들은 교황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는데 많은 비용이 필요하자 교황인 레오 10세는 독일에서 면벌부(免罰符)를 판매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면벌부는 ‘죄를 면해 주는 부적’이란 뜻이지요. 당시 면벌부 판매에 나섰던 설교사인 테첼은 “ 돈이 상자 속에서 쨍그렁 소리를 내자마자 당신의 영혼은 연옥(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남은 죄를 씻기 위하여 불로써 단련 받는 곳)에서 벗어납니다. 여러분은 단돈 1/4플로린으로 면벌부를 받고 싶지 않습니까? 이것으로 여러분의 신성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면벌부 판매는 주로 은행가들이 담당했는데 그들은 그 대가로 판매액의 1/3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 러나 신학 교수였던 루터는 1517년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하여 면벌부 판매에 반대하였지요. 그는 오로지 성경에 의한 믿음을 강조하고, 모든 사람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자 교황과 독일의 황제는 루터에게 그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요구하였으나, 루터는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때 많은 농민들과 제후들은 루터를 지지하였습니다. 그 후 황제와의 오랜 싸움 끝에 루터파는 정식적으로 승인을 받게 되지요. 이것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和議)’라고 합니다. 독일의 황제 카를 5세는 루터와의 다툼을 끝내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열었습니다. 여기서 루터파가 인정되어 제후나 자유도시는 루터파 교회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터의 반박문 일부를 보면
제21조: 교황이 발부한 면벌부로 모든 벌에서 해방되고 구제된다는 것은 잘못이다.
제27조 : 면벌부 판매 설교사는 현금 상자에 던진 동전 소리와 함께 죽은 자의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나온다고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제36조 : 진실로 회개한 크리스트 교도는 면벌부가 없어도 징벌이나 죄에서 완전히 해방된다.
또한 루터는 라틴 어(고대 로마어)로 쓰인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직접 읽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인쇄술의 발달로 독일어 성경은 급속도로 보급되었고, 교황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루터에 이어 스위스의 제네바에서는 칼뱅이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예정설을 주장하면서 모든 신자들은 자신들의 직업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신 에게 구원을 받고 못 받고는 세상에서의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미 신이 정해 놓은 것이다. 그러니 모든 신자는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고, 일상에서도 검소하고 근면해야 한다.”
칼뱅의 이러한 이론은 새롭게 성장하던 상공업자들(시민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후에 막스 베버는 칼뱅의 이러한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 정신의 바탕을 이루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러한 종교개혁으로 유럽의 종교는 대변혁을 겪게 됩니다. 중세 로마카톨릭을 중심으로 한 크리스트교 세계는 무너지고, 신교(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는 루터파와 칼뱅파를 믿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신교와 로마카톨릭이 부딪치는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지요. 유럽 각지에서는 종교전쟁이 일어났지요.
네덜란드의 독립전쟁도 종교전쟁의 양상을 띠었습니다.
네 널란드는 당시 카톨릭을 신봉하는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신교도들을 탄압하자 신교도들은 에스파냐에 반항하게 되었고, 이것이 독립을 해야겠다는 열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결국 네덜란드는 1648년, 독립을 하게 됩니다. 프랑스에서는 신교도인 위그노들이 가톨릭의 탄압에 저항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신교와 구교간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결국에는 앙리 4세가 1598년 낭트칙령을 발표하여 위그노(신교도)들의 종교,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었습니다.
가장 큰 종교 전쟁은 대규모의 국제 전쟁으로 번진 ‘30년 전쟁’이었습니다. 30년 전쟁은 1618년에서 1648년까지 있었던 전쟁입니다.
사 건은 독일의 제후국가 중 하나인 보헤미아(지금의 체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적으로 열세에 있던 칼뱅파의 신교도들이 가톨릭의 박해로 인해 반란을 일으키자 독일 황제였던 페르디난트가 가혹하게 탄압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독일 내에서 신교도의 세력을 확장시키려는 목적으로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등 주변국가들이 신교도들을 지원한다는 명분 아래 차례로 전쟁에 개입하면서 국제적인 양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전쟁으로 독일 국토는 황폐해졌고, 인구도 2100만 명에서 1350만 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후,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유럽에서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에게 동등하게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세계적으로 종교전쟁이 계속 되었습니다.
결국 2000년 8월, 세계 평화 정상 회의가 UN본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여기서 ‘관용과 비폭력을 위한 사명’이라는 세계 평화 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 종교분쟁으로 인하여 너무도 소중한 생명들이
사라지고 있으며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습니다. 종교분쟁이 끝날 때 비로소 세계에 평화가 오는 것임을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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