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쟁 그리고 잔 다르크
백년 전쟁을 이해하려면 영국의 역사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영국은 대륙과 떨어져 있는 곳으로 좀 늦게야 문명을 꽃피운 나라입니다. 영국 섬에 살고 있던 원주민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지만 기원전 2000년경에 유럽대륙에 살던 켈트인이 이 섬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지금의 잉글랜드 쪽으로 간 종족은 켈트인 중 브리튼 인이었고, 스코틀랜드 쪽으로 간 켈트 족은 게일 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며 왕래를 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추운 산악지역의 게일인보다 브리튼인이 더 우수한 문화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1세기경에 로마의 침략을 받아 영국은 로마령이 됩니다. 로마는 주로 잉글랜드 지역을 다스렸기 때문에 잉글랜드 지역은 폐쇄적인 스코틀랜드와는 달리 더 풍부하고 다양한 문화를 갖게 되었지요. 하지만 로마가 물러나자 북쪽의 게일인 후손 스코트 인들이 남하를 시작하지요. 남쪽의 켈트 인들은 스코트 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덴마크와 독일 북부에 살고 있던 게르만족인 색슨족과 앵글족을 불러들입니다. 이 두 게르만족을 합쳐 앵글로색슨족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스코트족을 몰아내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따뜻하고, 살기 좋은 영국의 중남부 지방을 차지하려는 야망으로 눈을 빛냈습니다. 결국 남쪽의 켈트족인 브리튼 인들은 대부분 몰살당하고, 이제 영국 중남부 지역은 앵글로색슨족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앵글로색슨족들은 그들만의 부족 신들을 섬겼었는데 700년경에는 그리스도교(가톨릭)가 전파되어 이제 영국의 전 지역은 그리스도교 세계로 통일되었습니다. 앵글로색슨족들은 8개의 왕국으로 나누어 세력다툼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지금의 덴마크에 살고 있던 노르만족(바이킹)이 공격해 들어오자 연합을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웨섹스 왕국의 알프레드 대왕이 지도자가 되어 8왕국을 통일하며 잉글랜드가 형성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교(로마가톨릭)은 통합의 종교로써 자리잡게 됩니다.
그러나 11세기 경 덴마크 왕의 동생 크누드가 영국을 침입하게 되어 결국 그에게 항복하고 말았지요. 이제 영국의 왕관은 크누드가 차지하게 됩니다. 크누드는 그 후, 형이 죽자 덴마크 왕까지 겸하게 되었고, 노르웨이까지 차지하여 1030년에는 스칸디나비아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제국은 영국, 노르웨이, 덴마크에 이르는 전 지역이 영국을 중심으로 흡수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크누드가 죽자 제국은 다시 분열이 되었고, 노르웨이와 덴마크가 떨어져 나갑니다.
그런데 영국은 또다시 침략을 받게 됩니다. 침략의 주인공은 게르만족의 일파인 노르만족(바이킹족)이 911년에 프랑스 땅에 세운 노르망디 공국 이었죠. 노르만디공 윌리엄의 영국 공격 명분은 자신이 영국왕과 혈통이 같은 먼 친척이라며 노르망디와 함께 영국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육군에 약한 영국은 노르망디 공국에 쉽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뒤 노르만 귀족들은 앵글로색슨족의 재산을 갈취하고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 부귀와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노르만족과 앵글로색슨족의 불협화음이 계속되는 듯하였으나 같은 게르만 일파인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노르만공국의 공이 영국의 왕까지 겸하면서 프랑스 내의 영토를 점차 넓혀나가자 프랑스왕이 위기 의식을 느낀 것입니다. 노르만 인들이 처음에 노르망디공국을 세울 때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터라 노르망디공국은 신하국이었고, 따라서 영국을 지배하는 윌리엄1세도 신하국의 왕이었던 것이지요.
윌리엄 1세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장남 로버트, 차남 로푸스, 막내 헨리였지요. 윌리엄 1세는 차남을 사랑하여 영국의 왕관은 로푸스에게 주고, 노르망디는 장남 로버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막내인 헨리에게는 은 5000마르크를 남겨주었습니다. 그러나 로푸스가 죽자 헨리가 왕위에 오르게 되고 큰형인 로버트와 싸워 노르망디 공국까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헨리에게 단 하나뿐이었던 아들이 죽자 왕위를 이어줄 자식이 마땅치 않게 되었습니다. 헨리1세는 할 수 없이 도이치 황제에게 시집을 갔다가 과부가 된 딸 마틸다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됩니다. 마틸다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아래에 있는 앙주를 다스리는 앙주백작과 결혼을 합니다. 이로써 영국의 땅은 노르망디, 앙주를 포함한 꽤 넓은 지역으로 확대됩니다. 마틸다와 앙주백작 사이에서 태어난 헨리 2세는 프랑스 루이 7세의 왕비였던 엘레노아와 사랑하게 됩니다. 엘레노아는 루이 7세와 이혼하고, 헨리 2세와 결혼하면서 엄청난 땅을 남편 헨리2세에게 바치지요. 이로 인해 영국은 영국본토를 비롯해 프랑스에 있는 노르망디, 앙주, 아키텐, 가스코뉴, 오르베뉴, 툴루즈를 소유하게 되어 프랑스보다 넓은 땅을 소유하게 됩니다. 헨리2세는 정치를 잘 했지만 '효도'의 '효'자도 모르는 아들들을 두어 말년에는 늙고 병든 몸으로 최후를 마쳤습니다.
헨리2세에게는 아들이 4명 있었으나 1남과 2남은 죽고 3남인 리처드, 막내인 존만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헨리 2세는 존을 무척이나 사랑하여 리처드에게는 영국과 노르망디를 주고, 존에게는 프랑스 남부의 기름지고 아름다운 땅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리처드는 프랑스 왕과 내통하여 헨리2세를 쫓아내고 왕이 되었습니다. 존의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던 헨리2세는 오히려 존이 형의 편에 들어 아버지를 쫓아내는 데 앞장섰다는 얘기만 듣고 최후를 마치게 되지요. 사자왕이라고 불리는 리처드는 성질이 급하고 모험을 좋아하여, 온갖 파란만장한 모험 끝에 왕이 된지 10년만에 전쟁터에서 최후를 마쳤으며 그 뒤를 이어 존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잔인하고, 잔꾀가 많아 신하들과 백성들의 존경과 신임을 잃었습니다.
한편 프랑스 왕은 영국이 프랑스 내에 가지고 있는 땅이 본국의 땅보다 큰 것에 심히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교회에서는 영국 땅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존왕이 자기 왕좌를 빼앗길까 두려워 조카인 브르타뉴 공을 죽였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프랑스왕은 존왕에게 법정에 출두하라는 서신을 보내지만 존왕이 이를 무시하자 프랑스 왕은 프랑스 내에 있는 영국의 영토를 모조리 몰수할 것을 선언합니다. 이렇게 그럴듯한 구실을 붙여 프랑스왕은 프랑스 안에 있는 영국의 영토를 하나씩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갑니다. 1204년에는 노르망디를 빼앗고, 1206년에는 엘레노아가 영국의 헨리 2세에게 가져온 남부 프랑스 영토를 빼앗았습니다. 따라서 그러잖아도 시원찮았던 영국의 존왕은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더욱 불신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신하들이 반대했는데도 프랑스를 공격하러 나갔다가 대패하고 돌아오는 사건이 벌어지지요. 왕이 런던을 비운 동안 영국의 귀족들은 왕의 횡포를 막을 방도를 마련했습니다. 전쟁에서 지고 돌아온 존은 그 후 귀족들과 계속적인 충돌양상을 보였고, 결국 1215년 7월 5일 대헌장(마그나카르타)에 서명을 하게 됩니다.
조목조목 나누어 쓴 것은 아니지만 대헌장은 보통 서문과 63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체로 9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헌장의 핵심적인 내용은 왕의 권력이 세금을 마음대로 거두어 부를 축적하는 데서 오는 것이니 세금을 함부로 거둘 수 없게 하자는 것입니다. 왕 이 국가적 사정으로 돈이 필요할 경우 귀족, 영주, 농장주인, 부유상인 들의 대표자에게 물어보고 모두가 동의하면 세금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인데 이로써 '대표 없는 곳에 세금 없다.'라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결국 납세자 대표회의는 영국 의회로 발전하게 됩니다. 대헌장으로 왕이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 못하게 되어 '군림하나 지배하지 않는다'라는 말도 생겼습니다. 또한 자유민은 법에 따르지 않고는 체포되거나 구금되지 않는다는 조항도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따라서 대헌장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결실이라고 평가되고 있지요.
대헌장 이후 1년 후, 존은 세상을 떠나고 그의 맏아들인 헨리 3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나이 9살이었지요. 그는 성인이 되어 직접적으로 영국을 통치하면서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하여 교황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뒤, '대헌장'의 조항을 싹 무시해 버리고 마음대로 세금을 거두고, 귀족들의 의견을 무시했습니다. 헨리3세의 매부인 프랑스인 시몽 드 몽포르는 왕정군과 싸워 권력을 쥔 후, 헨리 3세를 꼭두각시 왕으로 앉혀 놓고, 1265년 영국 의회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1341년 의회는 성직자와 귀족을 대표로 한 상원과, 농장주나 부유 상인, 평민의 대표로 이루어진 하원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다시 시몽 드 몽포르로 돌아갈까요? 그는 프랑스 사람이었지만 영국을 가장 영국답게 발전시킨 사람입니다. 그러나 헨리 3세의 조카였던 에드워드 1세에게 죽임을 당하지요. 에드워드 1세는 윗대 왕들이 귀족들이나 의회를 무시하다가 곤경에 처하는 꼴을 많이 보아왔으므로 의회의 권한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앞에서 프랑스가 존왕의 실정을 명분으로 프랑스 내에 있는 영국 땅을 점령했다고 했지요. 하지만 법적으론 여전히 영국 땅이었습니다. 하여튼 이것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는 날로 험악해져 갔습니다. 그런데 프랑스령인 플랑드르 지방(지금의 벨기에, 네덜란드)은 공업이 가장 발달했는데 모직물 공업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영국은 자국에서 양을 길러 그 양털을 이 지방에 수출해 귀족들의 옷감을 짜도록 했습니다. 영국 덕분에 이곳 상인들을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지요. 하지만 프랑스가 너무 세금을 많이 거두자 상인들은 프랑스 왕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 왕은 프랑스 왕이기도 하므로 모든 양국의 왕을 우리의 왕으로 생각한다는 뜻을 비쳤습니다. 이렇게 플랑드르 상인들의 농간에 두 나라의 왕은 전쟁을 선언한 것이지요.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약 116년간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100년 전쟁'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영국이 프랑스를 이기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영국은 프랑스로 원정을 가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당시 인구도 영국은 약 300만 명, 프랑스는 1000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영국군이 사용한 특수 무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석궁입니다. 석궁은 보통 화살보다 2배~ 3배 더 멀리 날아가고, 힘이 세어서 기사들의 갑옷도 뚫을 정도였으니까요. 석궁은 원래 아일랜드 지방에서 사용하던 것인데 위험한 무기라 하여 프랑스는 사용을 금했지만 영국은 일상에도 석궁 연습을 시켜 오히려 석궁 사용을 장려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영국군은 한 때 프랑스 파리까지 점령을 하게 됩니다.
전의를 상실한 프랑스 인들은 영국에 계속적인 패배를 하여 프랑스의 앞날은 어두웠습니다. 이 때 프랑스 인들에게 전의를 일깨워 준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잔다르크라는 소녀입니다. 잔다르크는 1412경 프랑스 바르 동레미에서 태어나 1431. 5. 30 루앙에서 죽습니다.
***********잔 다르크에 대해**************
잔 다르크 (사진 출처: 브리테니커 백과 사전)
농부의 딸 잔다르크는 13살의 나이에 천사장인 성 미카엘로부터 프랑스를 구하라는 계시를 받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 전쟁 중이었는데 몹시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영국군을 지지하는 부르고뉴당과 프랑스 황태자를 지지하는 오를레앙당으로 나뉘어 있었지요. 그런 와중에서 영국왕은 자신이 프랑스 왕가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며 영국과 프랑스 왕을 겸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고, 프랑스 황태자는 대관식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대관식이 거행되는 랭스로 가려면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을 지나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황태자는 왕인 샤를 6세가 죽었는데도 정식적인 왕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잔다르크는 자신이 황태자를 랭스로 가게 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오를레앙 지방에서는 곧 프랑스를 구할 성녀가 나타날 거라는 믿음이 확산되고 있었는데 잔다르크는 그 성녀가 자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사람들도 잔다르크가 바로 그 성녀라고 믿게 되었지요. 잔다르크는 황태자를 만나기 위해 기사 도롱을 통해 성주인 로베르를 만나 황제를 만나게 해 달라고 설득을 합니다. 처음에 이들은 잔다르크를 믿지 않았으나 그녀의 비범함은 곧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드디어 잔다르크는 황태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황태자를 둘러싸고 있는 중신들은 겁이 많고 보수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잔다르크를 믿지 않았지만 황태자는 그녀에게 군대를 주었고 그 뒤 잔 다르크는 오르레앙성에서 영국군을 몰아내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잔 다르크 덕분에 두렐성 싸움에서까지 승리를 거두어 잔 다르크 일행은 황태자를 모시고 랭스까지 갈 수 있게 됩니다. 황태자는 무사히 대관식을 치르고 프랑스의 왕 샤를 7세가 됩니다. 대관식을 마친 후, 잔 다르크는 3000명의 병사를 받아 부르고뉴가 지배하는 생피에르와 라샤리테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원이 오지 않아 실패하고 맙니다. 그 뒤 부르고뉴당의 군대가 콩피에뉴를 공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잔다르크는 싸움터에 나갑니다. 하지만 잔다크르는 영국군에 사로잡히고 말지요. 이 소문은 영국과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 때 파리의 신부들과 신학자들은 잔다르크를 종교재판에 넘기자고 합니다. 하지만 잔다르크는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당시는 돈만 주면 포로로 잡힌 아군을 데려 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잔 다르크는 자신이 세운 공이 있기 때문에 프랑스의 왕이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돈을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샤를 7세 밑에 있는 대신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잔다르크를 싫어했기 때문에 돈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자기를 젖혀두고 신과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들은 대주교와 보수적인 대신 드렘유가 많은 돈을 들이면서 잔다르크를 데려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결국 1431년 2월 21일, 잔다르크는 40명의 재판관이 기다리는 루앙성의 성당으로 끌려갔습니다. 잔 다르크는 신부들의 물음에 모든 것을 똑똑하고 정확하게 답했습니다. 이들은 처음엔 잔다르크를 마녀라고 몰아세울 작정이었으나, 전혀 마녀 같지는 않았습니다. 잔다르크는 논리적이었고, 신념에 차 있었으며 믿음이 깊었습니다. 일곱 번의 재판이 열렸어도 판결을 내릴 수 없게 되자 재판장은 압력을 받습니다. 빨리 잔다르크를 처형하라는 얘기였지요. 그래서 판사는 일부러 자기 편을 들만한 신부들만을 배심원으로 앉혔습니다.
이 때 잔다르크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땅위에 있는 교회와 하늘에 있는 교회 중 어디에 있는 교회를 따르겠느냐?"
"전 하늘의 교회를 다르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대는 이단자다. 그 말은 이 세상에 있는 교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1431년 5월 30일 잔다르크는 화형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죽은 후, 프랑스인들은 단결했습니다.
어린 성녀가 프랑스를 구하려고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이제 프랑스인들은 단결하여 영국군과 영국을 지지하는 부르노뉴당을 쳐부셨습니다.
잔다르크 가 죽은 22년 후, 프랑스는 칼레 항구만 빼놓고 전 프랑스 땅에서 영국 군대를 깡그리 몰아내어 백년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전쟁에서 진 영국은 노르망디와 아키텐 등의 커다란 영토를 잃고, 다시 섬나라 영국으로만 영토가 줄어들었습니다.
한 소녀의 힘이 정말 대단하지요?
(잔다르크):도미니크 앵그리 작 (18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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