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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공산주의 혁명) : 1917년

하늘벗삼아 2014. 2. 7. 23:11

러시아 혁명(공산주의 혁명) : 1917년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이란 사람이 쓴 '동물 농장'을 통해서 러시아 혁명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었죠? 동물농장이란 공산주의 사회가가 된 러시아를 빗대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러시아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까요? 지금부터 이에 관한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러시아로 가볼까요?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확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바꿀까요? 네, 문제가 있기 때문이지요. 문제가 없다면 바꿀 필요가 없지요. 그것도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목숨을 걸면서까지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러시아는 유럽과는 동떨어져 있는 동부에 있는 국가입니다. 따라서 영국, 프랑스 등이 있는 서부 유럽과 거의 단절되어 있다시피 했어요.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때, 프랑스에서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도 러시아의 모스크바는 조용했어요. 서부유럽은 변하고 있는데 러시아는 변화를 추구하지 못하고 기존의 봉건제도에 따라 지주와 농노들의 장원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런 폐쇄 상태는 오래 가지 않았어요. 러시아의 황제인 알렉산드르 2세 (1818~1881)는 서구 유럽의 경제와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어요. 이제 러시아에도 공장이 생겼으며, 노동자들이 생겼어요. 프랑스의 혁명사상, 마르크스주의 같은 사상이 러시아에 들어오게 되어 농노들은 해방을 요구했지요.

 

그러나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들이 해방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러시아 백성들은 황제(차르)를 섬겨야 하며 복종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에도 의회를 만들어 법을 만들고, 그 법에 따라 통치해야 한다'는 요구를 묵살했어요. 결국 알렉산드르2세는 사회를 개혁하려는 사람들에게 암살을 당하고 말았지요. 그의 나이 63세 때의 일이었지요.

 

 

1881 년 알렉산드르3세가 뒤를 잇고, 1894년 니콜라이2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전제군주제(왕이 독재적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것)는 변하지 않았어요. 영국에서도 왕이 정치를 하지 않고 수상이 정치를 한 지 오래되었고, 프랑스나 그밖의 나라에서도 대통령제를 실시했으며, 미국은 제일 먼저 대통령제를 실시한 자유로운 국가였지만 러시아는 그대로 '황제의 말이 곧 법'인 세상이었어요. 게다가 니콜라이2세는 백성들의 곤궁한(곤하고 궁핍한) 생활을 해결해 주려고 노력하지 않았어요. 농노들은 영주에게 여전히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었으며, 공장주들은 노동자들(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당치도 않은 저임금을 주었어요. 그래도 황제는 보고만 있었어요. 겨울이 되면 혹독해지는 추위에 굶어죽고 얼어죽은 시체들이 길바닥에 즐비해도 황제는 아랫사람들의 고통을 제대로 헤아릴 줄 몰랐어요. 그러다보니 많은 지식인들은 이 모두가 일부에게 부(富)가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모두가 똑같이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게 되어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주의 이론에 심취하게 되었지요.

 

 

그러던 1905년,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된 사건이 발생했어요. 역사적으로 우린 이것을 '피의 일요일 사건'이 라고 해요. 이 때 러시아는 일본과 러·일 전쟁을 했는데 러시아는 일본에 연전연패를 했어요. 이 때문에 인플레이션현상(물가가 뛰는 현상)이 일어나 그러지 않아도 열악했던 노동자나 농민의 삶이 더 힘들게 되었어요. 그러나 황제는 백성들을 위해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았어요. 일요일에 교회에 가야 하는데도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가기를 거부했어요. 1905년 1월, 한 공장에서 저임금을 받던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는데 그 파업을 주동한 4명이 해고를 당했어요. 그러자 파업은 여러 공장으로 파급되었고 사람들은 술렁거렸어요. 이때 가폰 신부는 민중들의 뜻을 황제에게 알려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목적으로 이들을 이끌고 궁정으로 향했어요. 1905년 1월 22일 일요일, 14만 명의 시위대는 황제의 초상화를 들고 / "신이여! 황제를 보호하소서."/라는 국가를 부르며 의회정치를 할 것을 요구했어요. 하지만 니콜라이2세는 민중들보다는 자기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왕이었어요. 그는 군대를 동원해 시위 군중들을 향해 대포와 총을 쏘아댔습니다. 이런 무자비한 발포로 1천여 명의 사망자가 생겼고, 부장자도 2천여 명이나 되었어요. 이에 발끈한 노동자들의 파업은 더 확대되었고, 드디어 5월에는 노동자협회인 '소비에트'가 조직되었어요. 러시아의 국명이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소련)'이라는 것 기억하시나요? 바로 여기서 나온 말이에요. 그러니까 소련은 노동자들이 세운 국가란 뜻이지요. 그러나 니콜라이2세는 민중들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잔인하게 탄압을 가하여 결국 '피의 일요일 사건'은 큰 변화를 이루지 못하고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러시아 혁명을 불타게 한 불씨가 되지요.

 

 

 

 

그리고 러시아 혁명을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하는데 볼셰비키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말일까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1898년에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정당인 사회 민주 노동당이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이 당도 두 파로 나누어지게 되었지요. 하나는 부르주아(유산자인 시민 계급)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멘셰비키와 노동자 중심의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볼셰비키로 말이에요.

 

 

그런데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어요. 러시아는 이 전쟁에 참여하기로 했지요. 하지만 볼셰비키당은 이것을 극렬히 반대했어요. 전쟁으로 인해 또다시 피해자가 될 사람들은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이지요. 전쟁이 일어나면 식량이라는지 생필품들이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그렇게 되면 아무 죄없는 약자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황제는 전쟁참여를 선언했고, 민중들의 공포와 굶주림은 최고에 달했어요. 1917년 참고 참았던 노동자들은 또다시 파업을 일으키게 되었어요. 여기저기서 군중들이 일어나

"빵을 달라!" " 전쟁을 중지하라!" "전제 정치를 타도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격렬하게 시위를 했어요. 그러자 왕은 '피의 일요일 사건' 때처럼 군을 동원해 무력으로 이 시위를 진압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젠 군대가 말을 듣지 않았어요. 민중들에게 발포하는 것을 거부했지요. 이렇게 군인들의 불복종은 확산되어 갔고 심지어는 병사들이 노동자들과 합세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정치범을 석방하는 일까지 일어났어요. 결국 니콜리라이 2세는 황제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는 미하일 대공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미하일이 이를 수락하지 않아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지요. 1917년 3월의 일이라 이를 '3월 혁명'이라고 해요.

 

 

 

'3월 혁명'후 임시위원회가 조직되었어요. 아무래도 노동자들보다 경제적으로 힘이 있는 부르주아들이 똑똑하다 보니 임시위원회는 부르주아들 중심으로 이끌어지게 됩니다. 이 임시 위원회는 임시정부가 되었고, 노동자와 농민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다시 1차 세계 대전에 참여할 뜻을 밝혀 평화를 갈망하는 민중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게 됩니다. 이 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레닌이었습니다. 레닌은 사법시험에서 수석을 할 정도로 명민한 인물이었습니다. 볼셰비키당(프롤레타리아를 중심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당)의 의장으로 그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노동자)들에게 옮길 것과 사유 재산 몰수와 토지 국유화 등의 주장을 담은 4월 테제(사 회, 정치적 중심이 되는 강령)를 발표했는데 이는 러시아 대중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게 됩니다. 게다가 임시 정부의 국방장관인 케렌스키는 물가고와 식량난을 더욱 가중시켜 대중들은 임시정부를 불신하게 되지요. 케렌스키는 이러한 사태를 짐작하고 볼셰비키 당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합니다. 레닌은 어쩔 수 없이 해외로 도망을 가지만 러시아에서 임시정부가 지지를 얻고 있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군사령관이 쿠데타(반란)를 일으켜 케렌스키는 자신들이 탄압했던 볼셰비키와 소비에트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지요. 이에 소비에트를 이끌던 트로츠키는 적군(붉은 군대)를 조직하였어요. 해외에서 이런 움직임을 보고 있던 레닌은 은밀하게 귀국하여 11월 7일을 거사일로 잡습니다. 11월 7일 드디어 제2차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고 노동자, 농민, 군인 대표로 구성된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고 곧이어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으로 구성된 혁명정부를 발족(만들어져 시작됨)시켰습니다.

이것을 11월 혁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러시아는 3월 혁명과 11월 혁명으로 공산주의 국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정도(正道:바른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바로 민주주의를 버린 것입니다. 민주주의란 민중들이 나라의 주인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민중들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헌법을 만들 국회의원들을 뽑기 위해 선거를 했는데 그 때 볼셰비키당은 4분의 1밖에 득표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볼셰비키당은 의회를 해산시키고 볼셰비키의 소비에트만이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선언하고 공산주의 독재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에서 빠졌지요. 러시아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자 영국, 프랑스, 미국 등 14개국이 연합하여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압박했습니다. 그리고 볼셰비키에 반대하며 황제를 당시 옹립하려는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을 백군들이 라고 합니다. 레닌은 3월 혁명 때 자리에서 쫓겨나 이리저리 유배를 다니던 황제 니콜라이2세와 그의 가족들들 처형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들을 모아 총살형을 하는데 공주들이 입었던 옷에 붙은 커다란 보석 때문에 쉽게 죽지 않자 권총을 꺼내 사살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러시아 황제와 그의 가족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지요.

 

 

 

아무튼 볼셰비키 정권은 체카라라 고 불리는 비밀경찰을 창설하여 반대파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전시(전쟁중) 공산체제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경제의 위축을 가져왔지요. 결국 레닌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는 자본주의 경제방식을 도입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신경제정책을 채택하였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국가들과 다시 교류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레닌은 뇌졸중으로 곧 쓰러지게 되고 그의 후계자였던 스탈린과 트로츠키 가운데 스탈린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레닌은 죽기 1년 전 실어증(말하지 못하는 증세)에 걸렸는데 스탈린은 레닌을 능멸하고 정권을 차지하여 자본주의 채택을 포기하고 공산주의만을 고집하게 되어 러시아는 공산 독재 체제 하에서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을 이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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