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차 세계대전(1939년~1945년)
연합국 과 동맹국과의 전쟁인 1차 세계대전은 점차 세계의 전쟁으로 바뀌어 미국 등 여러 나라들이 참여하게 되었어요. 이 전쟁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계속 되어 그 사이에 많은 전쟁의 희생자들이 생겨났지요. 결국 동맹국 독일이 연합국(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등)에 패배를 하게 되어 전쟁은 종식이 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1919년에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보블전쟁)에서 독일이 차지했던 알자스 로렌 지방을 프랑스에 반환할 것.
(독일 영토의 10%, 독일 인구의 10%를 삭감 당함)
2. 전쟁을 도발했으니 배상금을 지불할 것.(1320억 마르크)
3. 군력 감소 (육군 병력은 10만 명 이내, 해군의 군함 보유량은 10만 톤 이내, 참모본부, 의무병역제도 폐지, 공군과 잠수함 보유 금지, 육해군 무장에 대해서도 제한과 감시)
4. 라인강 좌측 해안은 연합국이 점령함.
이로 인해 독일인들의 압박감은 매우 커서, 이것은 조약이 아니라 '명령'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럼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독일로 가볼까요?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독일은 아주 혼란스러웠습니다. 독일 왕정(왕이 정치하는 형태)이 무너지고 공화국(왕족이 아닌 대통령에 의해 정치가 행해지는 형태)이 탄생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1320억이란 전쟁 배상금을 독일의 경제를 파탄지경에까지 이르게 했습니다. 당연히 배상금을 갚지 못했지요. 그러자 프랑스는 배상금을 못 받는 대신 독일의 루르지방 강제점령을 선언합니다. 독일의 거리엔 1천만 명이 넘는 실업자들이 헤매고 있었으며, 전쟁으로 인해 산업시설이 파괴되어 물품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자 기록적인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1920년 감자 한 포대의 값이 5마르크였는데 1년 뒤인 1922년에는 455마르크로 90배 이상 값이 치솟았지요. 그리고 1923년에는 1천억 마르크가 됩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가격 폭등이었지요. 물가가 이렇다보니 독일국민들은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 분노하고, 연합국에 대한 항복을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미국의 도스는 다음과 같은 계획을 발표합니다. 제1년째인 1924년에는 금화 10억 마르크, 제5년째인 1928년부터는 금화 25억 마르크로 증액하되 독일의 경제번영에 따라 증액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도스 안(Dawes Plan)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혼란이 가라앉지 않자 미국 배상조사 위원회 위원장인 영(Young)이 배상금 총액을 358억 마르크로 줄이는 동시에 지불 기한도 59년으로 늘려주었습니다. 이것을 영 안(Young Plan)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독일의 경제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 갔지요.
1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1918년) 히틀러의 나이는 28세였습니다. 독일에는 일찍이 범게르만주의 즉 게르만족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렇게 자국 민족만이 우수하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종과 타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 민족주의를 국수주의라고 합니다. 히틀러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게르만 이외의 민족을 경멸했으며 특히 유대인(유대교를 믿는 민족들)에 대해서는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독일사회주의노동당(나치당)에서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했는데 이 당은 유대인과 공산주의를 배격했습니다. 공산주의처럼 전체를 위해 개인은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조했으나 개인의 재산증식을 허용하지 않는 공산주의에 대해선 매우 부정적이었죠. 그는 국가가 필요에 따라서는 개인의 땅을 무상몰수(아무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뺏는 것)할 수 있는데 그 첫 대상은 유대인의 토지라고 말했습니다. 1920년 히틀러는 갈고리 십자가 모양인 나치당의 상징 깃발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921년에는 당의 총서기가 되어 실권을 장악했지요. 그는 공산주의를 배격했기 때문에 군부와 유산자(有産者)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나치당 선전 포스터 : '우리들의 최후 희망 히틀러'라고
쓰여 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최후의 절망이 되었죠.)
: 사진출처-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그런데 영 안이 발표되고 얼마 안 있어 세계적인 대공황(大恐慌)이 일어납니다. 1929년부터 약 10년 동안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경기가 무척 침체되어 있었던 시기를 세계 대공황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겪었던 외환위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경제 침체였지요. 대공황의 시작을 알린 것은 바로 미국의 주식 값 폭락이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세계의 경제 주도권을 잡게 된 미국. 세계 각국은 미국의 주식을 사들였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주식값이 오르는 기현상이 일어나자 너도나도 미국 기업의 주식을 사댔지요. 이 때는 주식값이 비정상적으로 올라도 통제할 길이 없었습니다. 국가는 그 주식값이 거품일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구경만 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주식을 사서 떼부자가 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주식투자 열풍이 일어났지요. 곧 이 열풍은 투기가 되었습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은 부동산 등 재산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주식에 투자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주식값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고, 그것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은행이 파산하고, 개인이 파산하고, 기업이 파산했습니다. 이것은 미국만의 일이 아니라 유럽 각국에서도 아주 심각한 양상을 보였습니다. 독일은 또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민들은 당시 독일을 다스리던 바이에른 공화국에 불만이 많았고, 사회가 무척 혼란스러웠어요. 이 혼란 속에서 ‘자기 민족만이 최고’라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이 나타났고, 유대인들을 몰아내자는 사상이 독일 전국을 뒤덮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히틀러의 나치당의 인기가 높아졌지요. 히틀러는 자신이 정권을 잡게 되면 독일 경제를 살릴 뿐만 아니라 독일을 세계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만들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히틀러 : 사진출처 -한국일보
(히틀러는 하루에 9번이나 샤워를 할 정도로 결벽증이 심했다고 하네요.
누구한테 몸을 더렵혔나?)
독일 국민들은 그의 연설에 혹했고 결국 1933년, 민족주의와 반유대인 사상을 가진 나치당의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그의 말은 곧 법이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히틀러에 반대하는 의견을 낼 수 없었지요.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군대와 군비를 증강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 안에는 나치당 외에 다른 당은 존재하지도 않았어요. 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은 재판없이 처형했습니다. 즉, 히틀러는 폭력적인 독재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독일 국민들에게 열렬한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경제 살리기에 성공했기 때문이었죠. 세계 대공황이 일어났을 때, 루즈벨트 대통령은 경제학자인 케인즈의 의견을 받아들여 '뉴딜정책'을 실현하게 됩니다. 뉴딜정책으로 미국 경제는 다시 살아났죠. 이처럼 히틀러도 국가권력을 독점하면서 국책 사업을 펼쳤습니다. 전국에 아우토반이라는 자동차 전용도로를 깔고 소위 딱정벌레 차라고 불리는 자동차를 대중화했으며, 중공업을 활성화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600만 명의 실업자가 일자리를 찾게 되었지요. 경제적으로 혼란과 궁핍에 시달렸던 독일인들은 히틀러가 위대한 독일제국을 만들겠다며 유대인, 장애인, 사회주의자, 집시, 동성애자, 양심적인 지식인 들을 죽여도 모른 척하고 오히려 그의 행위를 찬양했습니다. 독일인들은 먹기 위해 양심을 버린 것입니다.
나치 시대의 작품 : 딱정벌레차.... 지금 봐도 예쁘다.
프로이센 의 재상 비스마르크가 철혈정책으로 독일을 통일한 후, 독일제국을 선포한 것처럼 히틀러 또한 독일제국을 선포하고 군비증강에 혈안이 되어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질 좋은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답니다. 세력이 강해진 독일은 이 나라 저 나라에 괴뢰정부(꼭두각시 정부)를 만들어 놓습니다.
*여기서 잠깐 : 독일은 3번의 제국을 선포하게 됩니다.
제1제국은 신성로마제국이지요. 962년 교황에게 잘 보였던 오토 1세가 로마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황제라 칭해지게 되고부터 독일의 왕이 황제칭호를 사용한 1806년까지입니다.
제2제국은 1871년 보블전쟁 승리 후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한 후부터 1차 세계 대전 패배로 황제가 폐위되는 1918년까지입니다.
제3제국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총통이 된 1934년부터 2차 세계대전 패배 연도인 1945년까지입니다.
1차 세계 대전 때 연합국이어서 승리를 맛보았던 이탈리아는 별 성과를 얻지 못해 불만이 많았고, 노동자 계급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는 상태였습니다. 러시아가 공산혁명을 일으켜 공산주의 국가가 되자 이탈리아 내에서도 공산주의를 바라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고, 중산층들은 공산혁명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어 반사회주의를 부르짖는 파시스트당의 무솔리니를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1922년 드디어 국왕으로부터 총리로 임명된 무솔리니는 분열되었던 이탈리아를 통합하고 여러 경제 정책을 통해 경제를 안정시켜 나갔습니다. 그러니 유럽이나 미국의 정치가들은 무솔리니의 놀라운 정치적 능력을 찬양했지요. 독재자이긴 했지만 우선 경제를 살려놓으니 그는 이탈리아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민들에게 군대식의 규율을 요구하고, 로마제국의 부활을 외치며 주변국들을 침략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를 합병하지요. 이를 본 유럽 각국들은 무솔리니의 행위를 비판했지만 독일의 히틀러만은 예외였지요. 무솔리니는 히틀러가 추구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와중에 '에스파냐 내전' 이 일어납니다. 당시 정권을 차지하고 있던 공화당 정부가 독재(파시즘)에 항거하는 통일전선을 선언하자 프랑코 등 극우파 세력(극단적인 보수파. 즉 자유방임을 원하며 노동자들보다는 자본가들의 이익을 우선으로 여기는 세력)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하여 정부와 극우 세력이 싸우고 있을 때 소련은 공화당 정부를 도왔고,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에스파탸가 공산화될 것을 두려워하여 극우편에서 싸움을 돕지요. 결국 에스파냐의 내전은 극우파의 승리로 돌아갑니다. 이 일로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우호적인 관계가 됩니다. 무솔리니가 히틀러에게 오스트리아로 인한 양국의 곤란한 처지를 말하자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내정간섭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물론 이 약속은 깨졌다. 히틀러의 약속은 깨기 위해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는 1936년 에스파냐에서의 프랑코 정부 지지, 공산주의 반대, 경제 협조 등에 합의하고 이탈리아의 로마와 독일의 베를린을 추축으로 선언합니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딱 맞다. 왼쪽이 히틀러, 오른쪽이 무솔리니...
사진출처-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1년 후인 1937년에는 일본의 도쿄, 독일의 베를린, 이탈리아의 로마를 추축으로 선언하게 됩니다. 그래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추축국으로 부르게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은 연합국과 추축국과의 싸움이 된 것이지요.
히틀러는 서유럽부터 서서히 차지할 야심을 갖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소련의 간섭이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1939년 소련과 독소불가침 (不可侵)조약을 맺습니다. 불가침이란 서로 침략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이 약속도 나중에 깨죠.) 이 조약에서 독일과 러시아는 그들의 나라 사이에 있는 폴란드를 두 조각으로 나누어 서부의 3분의 1은 독일이 동부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부분을 소련이 각각 접수하기로 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폴란드는 강대국들이 자국을 마음대로 나누는 것에 참을 수가 없어 이미 프랑스와 영국의 군사원조를 받기로 했는데 영국과 폴란드가 공식적으로 상호원조조약을 맺자 이것을 알게 된 히틀러는 1939년 8월 31일 폴란드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입니다.
프랑스, 영국,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연합국은 인구나 병력, 산업자원 면에서는 독일보다 훨씬 우세했지만 독일군의 기갑사단(장갑차를 중심으로 짜인 특수부대), 우수한 군사기술, 높은 사기 등 때문에 밀리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더군다나 그 때 독일의 항공기술은 세계 으뜸으로 연합국의 그 어떤 항공기보다도 우수했습니다. 독일은 자동차를 가장 앞서서 개발한 나라로 엔진 기술이 그 어느 국가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비행기를 만드는 데도 특수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독일의 공군력은 최강이었습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했을 때 폴란드는 100만 명의 군사를 준비할 수 있었으나 탱크, 병력 수송용 장갑차, 대전차포, 대공포도 전혀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낙후된 군사기술로 독일을 당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도 10월 5일까지는 버티었지만 폴란드 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폴란드는 다시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이 되고 맙니다.
(독일의 전차 부대.... 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 좀 했죠.)
지도자 하나 잘못 뽑아서 전쟁터에서 죽어가야 했던 독일 청년들....
저승에서도 "하일 히틀러!"를 외치고 있니?
독일은 폴란드를 점령한 후, 순식간에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를 휩쓸었고, 프랑스와 대결하기 위해 계속 진격해 나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의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1940년 5월 10일에 사임을 하고 그 뒤를 이어 윈스턴 처칠이 총리가 되었습니다. 처칠은 프랑스, 벨기에 등과 손을 잡고 다시 전력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독일군에 밀려 1940년 6월 22일 휴전협정을 하게 됩니다. 이 때 독일군을 승리로 이끈 것은 기갑사단이었습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독일은 가지고 있는 장갑차의 3분의 2나 전쟁에 투입시켰으니까요. 이 휴전협정에서 프랑스는 독일로 하여금 5분의 3정도의 영토를 점령하게 했으며 5분의 2정도만 프랑스 독자적으로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탈리아도 이 전쟁에 참가했으나 프랑스국경지역 조금을 점령한다는 약속 하에 프랑스와 휴전협정을 맺었습니다.
전쟁의 승리에 고무된 히틀러는 1940년 9월에 이탈리아의 로마, 독일의 베를린, 일본의 도쿄를 세계의 추축(중심)으로 선언한 뒤, 3국 군사 동맹을 맺고 여러 나라를 전쟁에 끌어들였습니다. 여기서 일본을 끌어들인 것은 일본이 러시아의 세력을 견제해 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지도층과 국민들은 프랑스의 점령소식을 듣고 걱정을 했습니다. 히틀러는 프랑스 점령을 발판 삼아 영국을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해군에 있어 상당히 강했기 때문에 히틀러는 공군력으로 영국을 점령할 작전이었습니다. 당시 총리는 윈스턴 처칠이었습니다. 영국은 우수한 독일 공군을 막을 수 있는 무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호소합니다. 미국에 말이죠. 그러나 당시 미국의 무기수출법은 대금 선불과 구입자 운송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처칠의 호소는 ‘무기를 그냥 달라. 뿐만 아니라 운송까지 책임져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를 설득해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을 통과시키고 1941년 3월 11일에 서명했지요. 미국 방위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어떤 나라에도 무기를 대여할 수 있는 획기적 법안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영국은 310억 달러어치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미국의 도움을 받은 영국 공군이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윈스턴 처칠 : 160cm의 단신에 굽은 등을 가지고 있어서
외모에 있어서는 매력적인 사나이는 아니었으나, 영국의
영웅이 되었죠. 그러나 그는 영국의 영웅일지언정 세계의
영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철저히 영국을 위해서만
일했죠.)
히틀러는 공중전에서 패배를 한 뒤 미국의 간섭 때문에 영국을 쉽게 점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먼저 소련을 점령하기로 했습니다. 소련만 이긴다면 히틀러는 독일의 세력을 영국에 과시를 할 수 있고, 미국이 자꾸 유럽에 개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이에 독일은 소련 침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불가리아를 추축국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 뒤, 그리스를 점령하고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했으며 세르비아에 괴뢰정부(꼭두각시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그리고 1941년 독일은 소련을 공격했 습니다. 상호불가침 조약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대, 최강의 침략군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거대하였습니다. 독일군 300만 명으로 이루어진 150개 사단, 탱크 3000여 대, 각종 야포 7000문, 항공기 2500 대로 이루어진 엄청난 침략이었습니다. 독일의 공격으로 소련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상황을 보고 있던 미국은 소련이 공산주의 국가라는 점이 맘에 걸렸으나 독일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무기를 러시아에 대여해 주었습니다.
영국은 독일이 소련으로 진격하는 바람에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군사력을 정비할 수 있었지요. 즉, 히틀러의 소련 침공은 영국에 유리함만을 안겨 준 것입니다.
1942 년, 독일은 소련의 스탈린그라드를 침공합니다. 전쟁 초기 전세는 독일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막강한 기갑부대와 공군력을 앞세운 독일군은 무차별적으로 스탈린그라드를 포격했습니다. 그러나 겨울로 접어들면서 소련군은 서서히 반격 채비를 갖춥니다. 특히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에서 소련군의 저항은 독일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혹독한 추위에 보급선이 끊기고 오히려 소련군에게 포위당한 독일군은 동사와 굶주림에 시달립니다. 희망이 사라지면서 독일군은 1943년 2월 2일 항복하지요. 이 전투에 투입된 소련의 170만군은 50만명의 독일군을 완전 궤멸시켰습니다. 당시 베를린 방송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 소식에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하루 종일 내 보냈고 하네요.
그러나 히틀러는 후퇴를 명령하지 않고 그대로 러시아에 있을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런 융통성 없는 히틀러의 고집은 독일군을 엄청난 고통으로 몰아갔습니다.
(나치를 상징하는 갈고리 모양의 십자가가 산산조각나고 있다.
이것은 연합국의 포스터다.) 사진출처 -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소련 의 ‘붉은 군대’와 연합국은 독일을 멸망시키기 위해 진군을 계속 했습니다. 이 때 독일인들은 소련군에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연합국과 미국 측에 자신들의 입장을 맡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련의 보복은 그만큼 무서운 것이었지요. 연합군은 1945년 4월 25일, 독일의 베를린을 점령했습니다. 히틀러는 “독일이 지면 독일 민족도 멸망할 거요, 그러니 국민이 계속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는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며 독일의 주요시설을 모두 파괴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것을 '네로 명령'이라고 합니다. 뭐, 네로가 로마시를 불태우라고 명령했다는 것에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히틀러의 이런 냉혹함에 놀란 슈페어(독일의 위대한 건축자이자 최측근)는 히틀러의 말을 거역하고, 독일 정부는 1945년 4월 29일 항복문서에 조인을 했습니다. 그 다음 날 히틀러는 자살을 했습니다. 히틀러의 시체는 급히 화장이 되었다는 말도 있고, 소련이 압수해 갔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항복문서로 인해 1945년 5월 2일 유럽에서의 전쟁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독일은 전쟁을 해나가면서 슬라브족과 유대인들을 박해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러시아 서부와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소련 지배 계급의 생물학적 토대라고 믿었고, 소련의 세력을 붕괴시키는 일은 이런 유대인을 완전히 없애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독일은 소련을 침략하면서 1941년까지 유대인 140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그리고 1942년 5월부터 1944년 9월까지 400백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트레블링카 같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학살했습니다. 이로써 독일에 학살당한 유대인의 수는 약 570만 명으로 헤아려지고 있습니다.
또한 히틀러는 유대인 외에 폴란드나 러시아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슬라브족에 대해서도 냉혹했습니다. 슬라브족을 값싼 노동원으로 이용해야 하는 하등인간으로 간주하고,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에서 많은 폴란드 지식인을 죽였습니다. 이로써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대인 외의 폴란드인 300만 명도 독일에 의해 죽음을 당했습니다.
독일의 이런 잔학함은 곧 소련,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프랑스(레지스탕스), 그리스에 저항조직(그리스민족해방전선)을 만들게 했고, 이를 안 독일은 이 저항조직을 찾아내어 잔인한 보복을 해댔습니다.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는 전쟁에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독일과 연합국과의 전쟁이 자신들의 고향인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서 행해지자 이탈리아인들은 정부가 연합국과 손을 잡기를 바랐습니다. 이에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 의회는 무솔리니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이로써 시칠리아 섬에서의 전투는 연합국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항복문서에 조인하는 독일) : 사진출처-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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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추축국이었던 일본은 이 때 우리나라를 점령한 상태였고, 중국과의 전쟁(중·일 전쟁)에도 별 성과가 없음을 느끼고 유럽의 식민지가 있는 아시아 쪽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인도네시아에는 석유가 많았고,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 영국의 식민지인 말레이반도 미국의 식민지인 필리핀에는 일본의 산업, 경제에 필요한 고무, 주석 등의 많은 자원이 있었습니다. 1941년, 일본은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 반도(베트남, 캄보디아 등)를 점령하고 동남아시아라고 불리는 이 지역을 전부 점령하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미국은 일본과의 무역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일본과의 무역중단에 앞장선 미국을 일본이 그냥 보고 있을 리 없었죠. 일본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는 유럽에서 히틀러에게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선 필리핀을 지배하고 있는 미국을 공격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일본연합함대 총사령관 야마모토는 1941년 12월 7일, 미국의 식민지인 필리핀과, 하와이의 진주만에 있는 군사시설을 공격했습니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진주만에 있던 미국의 전함들이 크게 파손되었습니다. 그리고 2000명이 넘은 병사가 죽었으며 10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는 공격에서 큰 역할을 했는데 미국 군함을 파괴시키기 위해 전투기 앞에 커다란 포탄을 달고 적의 군함에 일부러 충돌하여 자살을 하였습니다. 가미카제 특공대의 이런 방법은 정확성과 파괴력에 있어 가공할만 했습니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34척의 미국전함을 침몰시켰고, 수백 척의 전함에 손상을 입혔습니다. 그 후에도 가미카제 특공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공군전에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일본의 예고없는 공격을 당한 미국은 12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의 진주만 폭격 : 일본인들의 악날함은 과히 세계적이죠.
군인에게 자살을 강요한 나라 일본... 생각할수록 무섭다.) : 사진출처-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연합국은 일본의 세력을 잠재우기 위해 일본 도쿄를 공격하는 등의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1942년 미드웨이 전투에서 미국이 일본의 항공모함과 우수한 해군 조종사들을 전멸시킴으로 해서 일본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중국도 일본군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의 공격을 저지했습니다.
일본은 미국에 계속 밀리면서도 전쟁을 끝까지 버티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기 중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망을 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히틀러가 가공할 만한 무기를 만들기 전에 미국이 먼저 그 무기를 발명해야 한다는 과학자들의 권고를 따라 '맨해튼 계획'을 세운 뒤 남몰래 우라늄을 이용한 원자폭탄을 만들지요. 루즈벨트의 뒤를 이은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을 쉽게 항복시키면서도 미국의 힘을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쓰기로 했습니다. 바로 원자폭탄의 투하였지요. 미국은 은밀히 개발해 온 원자폭탄 '리틀보이'를1945년 8월 6일 일본의 히로시마에 투하했습니다. 이 폭탄으로 주변 11평방킬로미터가 폐허로 변했고, 7만 명이 죽고 7만여 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미국은 그 다음날인 8월 9일 나가사키에 '팻맨'이라고 불리는 2번째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주변 4.6평방킬로미터가 폐허로 변했으며 약 4만 명이 죽고 그만큼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일본정부는 충격을 받고 8월 14일, 미국이 원하는 ‘일본국왕도 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지시에는 복종해야 한다’는 조건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9월 9일에는 중국에 대해서도 별도의 절차를 거쳐 항복을 하여 제 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패배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문자 그대로 세계를 전장(戰場)으로 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를 끌어들인 전쟁이었습니다. 참가국은 연합국측이 49개국, 동맹국측이 8개국이며, 중립국은 스위스 등 6개국에 불과하였습니다. 동원병력 1억 1000만 명, 전사자 2,700만 명, 민간인 희생자 2,500만 명으로, 그 중에서 독 ·소 양국의 희생이 가장 많아 소련의 전사자 1,360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2,000만 명, 전인구의 약 1/10, 독일의 전사자 500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550만 명, 전인구의 약 1/10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일본의 전사자는 185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250만 명, 전인구의 약 1/40이라고 합니다. 이 개수(槪數)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때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동원병력수는 약 2배, 전사자는 약 5배, 민간인 희생자는 약 50배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민간인의 희생자가 현저히 많습니다. 이것은 나치스가 '인종청소'라고 하여 유대인과 슬라브족을 절멸시킨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민간인의 희생자 가운데 약 600만 명은 유대인인데 이것은 나치스 지배하의 유대인 총수의 약 70%라고 합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현대의 전쟁이 민간인을 제외하지 않은 제노사이드(genocide:대량살륙)전쟁으로 된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전비(戰費: 전쟁 비용), 파괴된 재산을 오늘날의 물가에 맞추어 재평가한다면 너무나 방대하여서 계산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국과 소련에 의해 동독과 서독으로 양분되었습니다. 그 후 서독까지 공산화 될 것을 염려한 미국이 서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금세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자 동독의 주민들이 몰리는 바람에 서독의 인구가 많아졌습니다. 이에 1961년에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장벽이 만들어졌고, 그 뒤 서독은 자본주의로 발전을 하고 동독은 소련의 영향력 아래 공산주의 국가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1989년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독일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잘 사는 서독으로 많은 동독의 주민들이 이주해 왔습니다. 이들은 서독의 자본주의에 부딪혀 많은 갈등을 겪고 있지만 나름대로 문제를 해결하며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고 자료 : 브리테니커 백과 사전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엔사이버 백과 사전.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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