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차 세계대전
세계대전(世界大戰)이란 세계의 여러 나라가 참여한 전쟁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세계대전은 두 차례가 있었습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발발한 1차 대전과 세계 강대국들이 대부분 참여했던 1939년부터 1945년까지 행해진 2차대전입니다. 두 전쟁은 모두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고, 정치와 경제 형태를 바꾸어 놓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먼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의 유럽의 외교 상태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1870 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은 프랑스가 주도해 나가는 입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나폴레옹이 유럽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뒤, 프랑스와 프로이센(독일) 사이에 1870년부터 1871년까지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혹은 보블전쟁)이라고 합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프로이센(독일)에 패배를 했고, 독일은 제국을 선포하고 통일을 했으며 유럽의 새로운 강자(强者)가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로도 두 나라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럽국들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프랑스, 영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연합국과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맹국으로 나누어져 서로 적대시하는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나머지 나라들은 이편도 저편도 아닌 중립국의 형태를 유지하였지요. 아무튼 연합국과 동맹국은 서로 으르렁거리며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데 신경이 곤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범게르만주의(뭐, 세계를 게르만이 통치하는 나라를 만들자는 거겠죠?)를 내세우자 러시아와 세르비아는 '범슬랍주의'를 주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건이 발생합니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세르비아 범슬라브주의의 비밀 결사에 속해 있던 젊은 청년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지요.
사라예보 사건 : 한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함
당시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간섭을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세르비아에는 오스트리아에 반항하는 세력들이 생겼지요. 한 젊은이의 황태자 암살은 간섭받고 싶지 않은 세르비아 국민들의 마음을 대신하는 행위였습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사라예보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황태자 암살은 국가의 크나큰 명예 훼손이었으므로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은 세르비아에 사과할 것을 요구하고 여러 가지를 원하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1. 반오스트리아 단체 해산
2. 반오스트리아 관리 파면
3. 황태자 암살 사건 재판에 오스트리아 관리 참여 등 10개 항목의 요구서를 보내 최후통첩을 했지요.
세르비아 는 거의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기로 하였으나 오스트리아에 반항하는 저항조직을 오스트리아 관리들이 직접 고발할 수 있게 하고, 세르비아의 관리 해임권도 넘겨 줄 것을 요구하는 것에 대하여는 국제적인 중재를 요청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요구를 들어줄 경우 결국 나라의 자주권을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하지만 처음부터 독일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를 공격하겠다고 마음먹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의 제안을 기다리지 않고 1914년 7월 28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간섭하였습니다. 그리곤 군 총동원령을 내려 세르비아를 도우려고 했지요. 이에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있던 독일은 러시아에 전쟁준비 중단을 선언하게 됩니다. 그리고 프랑스에 오스트리아 세르비아 전쟁에 관여하지 말라는 공문을 보내지만 프랑스와 러시아는 독일의 요구를 묵살합니다. 그러자 독일은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 뒤 8월 3일에는 프랑스도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이때까지 영국은 가만히 있었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중간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중립국 벨기에가 독일의 공격을 받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독일이 벨기에에 프랑스를 공격할 통로를 내놓으라고 했을 때 이를 거부하자 침공을 한 것입니다. 영국은 독일이 중립국을 침공한 것은 중립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독일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이로써 프랑스, 영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연합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의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독일의 참전 포스터 ) 사진 출처 :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영국의 참전 포스터 :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는 모습)
사진 출처 :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독일은 전쟁 이전에 '슐리펜 계획'이라는 작전을 세워놓았습니다. 서유럽을 먼저 평정한 뒤 동부의 러시아를 평정할 목적이었지요. 하지만 작전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서유럽을 공격하는 동안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를 제대로 막지 못하고 고전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파리로 들어가려던 독일군은 마른 전투에서 프랑스와 영국군에 패배를 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전쟁은 교착상태(팽팽 상태)에 빠집니다.
서부전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부전선으로 이동한 독일군이 러시아군을 크게 격파했으며 1915년 8월에는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함락시켰으나 러시아가 쉽게 물러나기 않았기 때문에 동부전선도 교착상태에 빠집니다. 당 시 연합국(영국, 프랑스, 러시아)은 인구나 산업, 군사 면에서 동맹국보다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동맹국의 독일은 그 동안 철저한 군사준비를 해 왔고, 군사기술이 특출하여 이러한 열세를 만회하였습니다. 그래서 전쟁의 양상은 그야말로 일진일퇴가 계속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해군에서는 월등한 해군력을 보유한 영국이 독일에 대한 해상 봉쇄령을 내리고 1914년 포클랜드 해전에서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이 때 독일은 해외에 가지고 있던 식민지를 모두 연합국 측에 빼앗깁니다.
연합군과 동맹군의 싸움이 치열해지고 있던 상황에서 1915년 5월 7일 '루시타니아호 사건'이 터집니다. 당시 독일은 영국의 해상 봉쇄령 때문에 물자를 공급받지 못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915년부터 U-보트 잠수함을 이용하여 연합국의 통상 보급로를 공격하고 적국이든 중립국이든 무차별 적인 잠수함 공격에 착수합니다. 어떤 배든 아일랜드 남부 연안을 지나면 어뢰로 공격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타니아호는 위험지역으로 갑니다. 이상한 것은 이미 독일이 공포된 위험 지역을 지나면서 그 어떤 호위선도 따라붙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은 불을 끄는 선박은 모두 격추시키겠다고 했는데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사고 1시간 전에 불을 모두 끄라고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제발 이 배를 폭격해 다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독일은 자신들이 포고한 대로 불을 끈 배가 지나가자 군수물자를 실은 배인 줄 알고 한 발의 어뢰를 쏘았습니다. 그런데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2번의 폭발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은 한 발의 어뢰만을 발사했다고 발표했는데 1발은 누가 쏜 것일까요? 이것이 수수께끼였습니다. 아 무튼 독일의 어뢰 공격으로 1959명 중 1198명이 죽었고, 그중 128명이 미국인이었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중립을 유지해 오던 미국의 여론은 반독일로 흘러갔고, 독일을 비난하는 소리가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계속 중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루시타니아호가 발견이 되었는데 그 배가 독일의 주장대로 군수물자선이었다는 것입니다. 탄약 1400상자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400만 발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그리고 1250상자의 폭약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처칠의 편지도 들어 있었습니다. 뭐, 미국에 반독일 감정을 갖게 하여 연합군에 미국을 끌어들이자는 거죠.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세운 작전이지만 1198명의 죄없는 민간인을 희생시켜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윤리적인 행위. 이런 야비한 수단을 쓰는 전쟁은 없어야겠죠. 아니, 전쟁 자체가 사라져야야죠.
전쟁의 발단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의 외교마찰이었지만 실제로 1차 세계대전의 주축 세력은 프랑스와 독일이었습니다. 프랑스-프로이센의 전쟁의 앙금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두 나라는 사활(死活)을 걸고 전투에 임했습니다. 프랑스는 영국, 러시아와 합세하였고, 1915년 4월에는 이탈리아를 전쟁에 끌어들였습니다. 연합국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 영토를 이탈리아에게 떼어주겠다면서 자기들의 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루마니아도 포섭을 했습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과 함께 연합국에 대항했습니다. 또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터키)과 손을 잡고 러시아의 공격을 저지하였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언제나 러시아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던 터라 독일과 손을 잡고 전쟁에 참가하여 승리하면 러시아의 세력을 자신들의 영토로부터 영원히 축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밖에도 많은 나라들이 이 전쟁에 참가하여 유럽은 물론 중동지역, 아프리카 북부 지역 등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연합국과 동맹국은 서로의 장단점들 때문에 전쟁의 성과를 보지 모하고 교착상태( 서로 팽팽하여 변화가 없는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1915년부터 1916년을 전쟁의 교착기로 봅니다.
이 때 많은 신무기들이 개발됩니다. 잠수함, 독가스, 전차, 비행기 등등...
당시 독일은 최첨단의 무기를 만들어 연합국에 계속 위협을 주었는데 이 때 영국은 첨단 무기로 무장된 독일의 요새를 뚫고 나갈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자고 제안하여 이로써 1916년 ‘탱크’라고 불리는 전차를 만들었습니다.
*탱크에 대하여 : 현대적 전차는 제1차 세계대전 초에 기관총의 격파·방어선의 돌파를 위한 새로운 무기로 개발이 된 것이다. 당시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해 오는 독일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기관총·대포 등의 강력한 화력과 철조망·참호 등 조직적으로 구축된 독일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가 없어, 전선이 고착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914 년 영국 육군의 E.스윈튼 중령은 이러한 전환을 타개하고 적의 방어선을 뚫기 위해 트랙터에 화포를 장치한 전차를 고안하게 되었다. 이 전차에 대한 건조안은 육군성에서 부결되었으나, 당시 해군장관이었던 W.처칠이 해군의 예산으로 전차의 연구·개발을 후원하게 되어 세계 최초의 전차인 마크Ⅰ이 완성된 것이다. 이것은 M1 전차라고도 하였고, 무게 28t, 최고속도 6km/h, 항속거리 약 20km, 57mm포 2문과 기관총 4문을 탑재하였다.
1916년이 되자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너무 심각했으므로 여러 나라들은 내심 전쟁의 종식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에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말합니다.
“전쟁의 목적이 무엇인지 말하라. 이젠 승리를 바라지 말자. 승리 없는 평화를 이루도록 하자.” 그러면서 각국의 일은 스스로 해결하도록 간섭하지 말자고 주장합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전쟁에 지친 각국들은 윌슨의 이런 말을 받아들이려는 입장이었지만 이 때 독일은 영국과 잠수함 전쟁에 깊이 빠져 있어 윌슨의 선언을 무시했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1917년 독일과의 외교를 단절하였습니다.
미국도 연합국 편에서 참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을 때 '치머만 사건'이 발생합니다.
독일 외무장관 치머만은 1917년 1월 16일에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에게 암호 전문을 보냈는데, 미국이 독일에 맞서 참전하면 멕시코도 독일의 동맹국으로 참전하여 텍사스 주와 뉴멕시코 주 및 애리조나 주를 되찾을 것을 멕시코 정부에 제의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영국 정보부는 이 전보를 가로채어 암호를 해독한 다음, 미국정부에 알렸습니다. 3월에 윌슨대통령은 독일 잠수함 U-보트 공격으로부터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미국 상선(무역선)들의 무장(무기를 갖춤)을 지시했습니다. 독일 잠수함은 무장선에 대해서는 어뢰 공격을 했으므로 3월에 미국 상선 3척을 침몰시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무제한 잠수함 작전 포스터 (사진 출처 :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결국 1917년4월 6일에 미국은 독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합니다.
미국의 참전 포스터 : "해군에 들어가자. 미국의 역사를 읽지 말고
역사를 스스로 만들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포스터 뒤에는 전쟁의
여신인 듯한 사람이 미국 국기를 들고 전쟁을 종용하고 있네요.
아테네인가?
그런데 러시아는 1917년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됩니다.
이젠 곳곳에서 연합국의 승리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동맹국의 국가들은 하나 둘 항복을 합니다.
불가리아 가 휴전조약을 수락하고, 오스마 투르크 제국은 영국의 대공세에 밀려 항복했으며,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와 휴전협정을 맺으며 전쟁에서 발을 뺍니다. 연합국에 패배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사용하는 국명(國名)은 ‘터키’입니다. 그 뒤, 오스만투르크 제국(터키)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 지역을 연합국이었던 영국에 넘깁니다. 영국은 이 지역을 다스리면서 이 땅에 유대인들을 이주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다시 탄생된 것이지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막을 내렸습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황제인 카를 1세가 퇴위하여 각각 오스트리아 공화국, 헝가리 공화국을 수립했으며, 그리고 세르비아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통일 왕국을 건립했지만 지금은 유고슬라비아 연방국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고슬라비아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이루어진 연방국가입니다. 아무튼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을 제공하는 국가였던 세르비아는 이 전쟁으로 인구의 23%를 잃었습니다. 러시아는 러시아 정부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벌인 전쟁에 싫증이 나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레닌이 혁명을 일으켜 러시아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고, 1917년 전쟁에서 발을 빼었습니다. 독일 제국의 카이저 빌헬름 2세는 퇴위하여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사회민주당의 에베르트 신정부는 휴전조약을 체결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은 막을 내리지요.
그런데 독일은 전쟁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휴전협정의 대표단에 참가한 사람이 군인이 아니라, 전쟁에 싫증을 느끼고, 전쟁을 두려워하는 민간인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독일은 이로써 더 버틸 수 있는 전쟁을 쉽게 포기했다는 생각으로 휴전협정은 국가에 대한 배신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전쟁을 일으켜 원수를 갚고 승리를 탈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퍼져나갔고, 이런 상황에서 독일의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독일의 명예 회복을 위해 끝까지 전쟁을 해 나가야 한다는 선동가들이 나타났습니다. 이 중의 하나가 바로 2차 세계대전에 악명을 떨친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아무튼 제1차 세계대전은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연합국은 총 2200만 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이중에 사망자가 약 500만 명이라고 합니다. 동맹국도 1500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330만 명 정도가 전사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쟁에 참여했던 군인들의 피해이고, 민간인들은 그 피해가 더 심각해서 1300만 명 정도가 사망을 했다고 합니다. 실로 끔찍한 피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위의 자료는 '브리테니커 백과 사전'과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를 참고하여 개맹이님이 정리한 것입니다.
주님의 평강이 이곳을 방문하시는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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