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1787년~ 1799년)
프 랑스 혁명은 유럽에 자유주의 사상을 심어준 대혁명으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여기저기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던 1787년을 시작으로 보고 나폴레옹이 통령 정부를 세우는 1799년을 혁명의 마지막 시기로 본다. 시민과 농민들이 왕과 귀족들의 부패한 정치와 제도에 반항했던 이 혁명은 단 한 가지 이유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여러 이유가 한꺼번에 얽혀 일어난 것이다. 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크게 5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 프랑스는 유럽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으며 이 인구를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없었다.
둘째, 세력을 넓히고 있던 부유한 시민들(부르주아지)은 어느 국가에서보다도 제도적으로 정치적인 참여에 배제되어 있어 불만이 많았다.
셋 째, 농민들은 자신들을 비참하게 한 봉건제도(땅 주인인 귀족(영주)을 중심으로 그 밑에 충성을 약속한 기사 계급이 있었고, 영주의 땅을 경작하는 농민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1년 내내 뼈가 빠지도록 일하고도 영주가 요구하는 각종 세금 때문에 거의 거지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했으며 노예처럼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었다.)를 더 이상 인정할 수 없었다.
넷째, 이 때 프랑스에서는 사회와 정치의 개혁을 외치는 철학이 어느 나라보다도 많이 유포되어 있었다.
다섯째,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국가 재정이 거의 바닥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럼 프랑스 혁명의 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이 때 프랑스 정부는 국가 재정이 거의 바닥날 지경에 이르게 되어 이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귀족, 성직자, 제3계급(시민)으로 이루어진 3부회를 모집하게 된다. 귀족 270명, 성직자 298명, 제3계급 598명으로 이루어진 이 회의에서 어떤 사안에 대해 투표를 하게 되면 제 3계급(시민)이 가장 유리했다. 그런데다가 성직자들마저도 제3계급과 합세하게 되어 귀족들은 그동안 내지 않았던 세금을 내야 할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귀족들은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영 못마땅했다. 귀족들의 편에 있던 루이 16세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3부회의 결정을 받아들인다고 했으나 귀족들과 함께 음모하여 국민의회(3부회)를 해산한다.
분 노한 시민들은 1789년 왕권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다. 이 감옥은 그 거대함으로 유지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으나 왕은 자신을 비판한 자 즉 정치범을 이곳에 수감하여 죽을 때까지 가두어 두었다. 하지만 파리 시민들이 이 감옥을 습격했을 땐 겨우 7명의 죄수만이 있었다고 한다. 시민들은 죄수들을 풀어주고 왕의 행위에 분노하며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왕은 이 때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이 에 제3계급에 의해 만들어진 국민의회에서는 시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시민들의 자유, 평등, 사유재산 불가침성, 압제에 저항할 권리 등을 인정하라고 천명하여 루이 16세에게 승인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너무나도 혁명적인 이 요구에 승인을 거부하였다. 이때문에 그동안 억눌려 왔던 시민과 농민들이 대규모의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루이 16세의 부인이었던 마리 앙트와네트는 프랑스 국민들의 비참한 생활과는 달리 최고의 호화스러움을 누리고 있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공주였으므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독일)에 군주제를 몰락시키려는 혁명을 잠재워 달라 요구하였다. 이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은 전쟁을 하게 되었다. 이 전쟁이 왕권을 지키려는 루이 16세와 마리의 음모인 것을 안 혁명정부는 국외로 달아나려는 왕의 가족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고 1793년 루이 16세를 처형했고, 뒤 이어 마리 앙트와네트도 처형했다. 이 때 혁명 정부를 이끌던 대표적인 당이 지롱드당과 자코뱅클럽이었다. 지롱드당은 프랑스 혁명기의 온건공화파로 1792년 최고의 인기에 달했지만 당 시 비난을 받는 입헌군주제에 대해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하지 못했고, 1792년 8월 1일 군주제를 무너뜨린 튈르리 궁전 습격 사건에 가담하지 않아,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지롱드당은 1793년 루이 16세의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의 처형을 반대하여 비난을 받았고, 1793년 파리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아 인기를 잃었다. 결국, 산악당(자코뱅클럽을 지지하는 당)의 공포정치 때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1794년 산악당(자코뱅당)이 몰락한 뒤 숙청을 피한 당원들은 다시 국민공회로 돌아왔다.
자 코뱅 클럽은 급진적인 혁명당으로 프랑스 혁명 당시 ‘헌법을 지지하는 친구들의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소외받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했고, 나중에는 부유한 자본가(부르주아지)와 문인들도 받아들였다. 루이 16세가 외국으로 달아나려다 실패한 후, 1791년 겨울, 자코뱅 클럽은 왕을 어떻게 처리할까 의논하다가 많은 온건파 의원들이 빠지고 왕에게 극단적인 처방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지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이 클럽의 대표인 로베스삐에로는 국민공회 산악당의 지지를 받아 민주적인 정치를 했다. 그러나 왕을 처형한 후 독재 정부를 수립하여 지롱드 당원들을 무참히 학살했으며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처형함으로써 이른바 ‘공포정치’를 행하였다. 그러나 파리 시민들은 너무나도 급진적이고 공포스러운 정치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이를 받아들인 국민공회에서는 로베스 삐에로를 체포하여 단두대에서 처형하였다.
로베스 삐에로가 죽은 후, 프랑스 사회는 더욱 혼탁해지고 사치스러워졌다. 그리고 왕정 복고를 노리는 왕당파가 정권을 잡으려했으나 당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나폴레옹에 의해 저지당했다. 나폴레옹이 통령 정부를 세워 독재를 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 정신을 잊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잇따른 전쟁에서의 패배로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고, 그 곳에서 52세의 나이에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동안 나폴레옹의 사망에 대해 말이 많았다. 프랑스 왕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뚱뚱했던 그가 말년에 입었던 옷이 공개되면서 의문을 풀렸다.
말년에 위암으로 피골상접했던 그가 입었던 옷은 자그마했다. 그는 병사한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나폴레옹이 물러난 후, 루이 16세의 동생이었던 루이 18세가 왕이 되어 다시 브루봉 왕조가 세워지고 왕당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 러나 1830년 7월, 국왕이었던 샤를 10세가 3가지 법령을 공포하면서 혁명이 시작되었다. 하원(시민들의 정치를 대변하는 의원)을 해산하고, 언론의 자유를 폐지하였으며, 선거법을 개정하여 유권자의 3/4이 선거권을 상실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여기저기서 시민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왕정군과 반란군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결국 3일간의 싸움에서 반란군이 승리를 거두었고, 샤를 10세는 영국으로 도망을 갔다. 이를 7월 혁명이라고 한다. 이 때 급진파들은 공화정을 세우자고 했으나, 중산층들은 1792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혁명군을 위해 싸운 경력이 있는 오를레앙 공작인 ‘루이 필리프’에게 왕권을 넘겨 주었다. 루이는 프랑스의 국민을 위한 왕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7월 혁명이 끝난 뒤 하원(시민들의 의결 기관)이 부활하였고, 상원(귀족들의 의결기관)은 세습제 기구에서 선출제 기구로 바뀌었고, 특별 재판소는 폐지되었으며, 국왕과 교회의 동맹 관계도 끝이 났다. 그리고 부르봉 왕가의 백색기 대신에 프랑스 대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삼색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그 후, 삼색기는 프랑스의 공식 국기가 된다.
하 지만 왕정을 그대로 유지한 프랑스 사회는 제대로 된 혁명을 이루지 못하고 또 다시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그래서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2월 혁명이라고 한다. 이 때,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나폴레옹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75%의 지지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는 1851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공화파의 세력을 꺾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852년 11월 황제로 즉위했다.
나폴레옹 1세와 같은 길을 걸은 셈이다. 그는 스르로를 나폴레옹3세라고 칭하고 나폴레옹 1세와 같이 프랑스의 영토확장을 위해 많은 전쟁을 했다. 그러나 1870년에 프로이센(독일)과 영토분쟁으로 전쟁을 하여 프로이센의 포로가 되었고, 나중에 영국으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죽었다.
* 프랑스 혁명 당시의 국민 회의에서 작성한 ‘권리 선언’의 내용
‘국민회의’는 신 앞에서 그리고 신의 축복과 은총을 바라면서 다음의 인간과 시민에 관한 성스러운 권리를 확인하고 선포한다.
제1조 :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늘 그렇게 존속한다.
제2조 : 모든 정치적 결합의 목적은 인간의 양도할 (권리나 재산 따위를 남에게 주거나 팔)수 없는 자연권(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권리)의 보존에 있다.
제3조 : 모든 주권의 권리는 국민에게 있다.
제4조 : 자유는 남을 해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만약 이러한 원칙을 어겼을 땐 법의 처벌을 받는다. 나의 자유가 중요한 만큼 남의 자유도 중요한 것이다.
제5조 : 법은 사회에 해로운 행위만을 금지한다. 법에 의하여 금지되지 않은 것이 방해되어서는 안 된다.
제6조 : 모든 시민은 직접 또는 대표를 통하여 법의 제정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
평등한 사회를 향한 발걸음은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청교도 혁명, 명예 혁명, 독립혁명, 프랑스 혁명, 7월 혁명, 2월 혁명 등등...
늘 그 곳에는 희생자가 있었다. 어두운 세월 속에서 고통만 받다가 미래의 빛을 위해 꺼져간 생명들.. 그 고귀한 생명들을 향해 경의를 표해 본다. 나는 늘 현실에 대한 고통과 불만을 얘기한다. 과거의 고귀한 희생을 외면한 어리석은 푸념이었다.
갈망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좀 더 완벽한 이데아의 모방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았던 역사 속의 이름 모를 영웅들의 가치관이 가슴에 파고 들었으면 한다. 거울 속의 얼굴을 들여다 보라. 행복하게 미소지어 보라. 그것이 자유, 평등, 박애를 위해 희생했던 사람들에 대한 보답이다. 현실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