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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레지스탕스 若山 金元鳳 5/5

하늘벗삼아 2017. 3. 24. 23:10

▲ 1938년 10월 10일 중국의 임시수도 한구 대공중학교 자리에서 창립한 조선의용대

의용대 깃발 중앙이 총대장인 약산 김원봉, 그 왼쪽 옆의 옆이 석정 윤세주 임은 알겠다.


1938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창설한다. 조선의용대는 장제스 밑에 있던 왕범생이란 자가 일본인 반전운동가 아오야마 가즈히로를 앞세워서 조선의용대, 대만의용대, 재화일본인민반전동맹으로 동아시아 반파시트동맹을 맺으려 했던 게 시초였다. 여기에 김원봉이 국민당정부에 조선의용대를 만들 수 있도록 해달라고 건의를 했고, 이에 국민당이 모든 한인회를 연합해서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러나 김구측은 거부했다. 또 김구와 김원봉 사이에 세력싸움이 이어졌다.

 

▲ 조선의용대의 여전사들.. 가운데 얼굴은 의용군 부녀대장이었던 이화림(1906~?).


조선의용대에는 조선어․중국어․일본어와 같이 언어에 모두 능통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 선무활동이나 선전활동 등이 주요활동 이었다. 그러나 워낙 강골들이라 싸워야 되었다. 연, 벽보, 선전문, 방송 따윈 하기 싫었다. 싸우고 싶었다. 그래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중에서 특히 공산주의자였던 최창익, 한빈(사회주의독립운동가,1901~?) 같은 경우에는 국민당 밑에서 벗어나서 중국 공산당 밑으로 가서 전투를 하자는 주장을 했다.

결국 최창익, 한빈 등은 화북지역인 연안으로 이동했고 김원봉만 남게 되었다. 이들이 나중에 김일성과 권력투쟁을 벌이다 전부 다 숙청 당했던 연안파 들이다.

 

▲ 뜬끔없이 해방이 되어 조국을 광복시킬 기회를 놓친 연안파들은 일부는 그곳에 남아 중국혁명에 계속 참가하고 무정 등 300여명은 9월 5일 옌안을 출발한다. 두달 넘는 고난의 행군끝에 국경에 도착했으나, 소련으로부터 개인신분으로 그것도 비무장으로 입국해야한다는 통보를 받는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이국땅에서 목숨걸고 고생을 하다 20년만에 돌아온 조국에서 조선의용군(연안파)은 찬밥 신세가 되어야 했다. 남한에서 미국이 이승만을 골랐듯이, 북한에서도 소련은 군인이 지도자가 되려면 자기들이 잘 아는 김일성을 뽑으려고 했다. 이러한 미국과 소련의 행정편의가 남과 북을 동시에 독재국가로 가는 초석을 놓은 것이다.


연안파.. 1950년대 숙청된 연안파로는 김두봉, 최창익, 무정, 박일우, 한빈, 윤고응, 서희, 방우상 등이 있다. 이들은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1942년 7월에 산지성 타이항산에서 조직된 화북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에서 활약하던 사람들이다.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국공내전에 참여했던 인물을 제외하고는 1945년 11월부터 그해말까지 북한으로 다 입국을 하였다.

 

 

 1946년 8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한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주석단. 오른쪽부터 레베데프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소장, 김두봉 신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정애 북조선여성동맹위원장, 발라사노프 소련군정 정치고문.


그리고 1946년 2월 16일 조선독립동맹을 개칭하여 조선신민당 이때 당수는 김두봉(1889~1950) 이었으나, 같은 해 8월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으로 출범을 하자 이때 연안파 인물들이 북한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6․25전쟁 이후에 북한의 사회주의건설 노선을 둘러싸고 김일성파와 대립을 하다가 까이고, 김일성파 내부의 갑산파도 나중(1958년)에는 까이는데, 김일성(1912~1994)이가 김정일(1942~2011)을 후계자 만들기를 시작할 때 이걸 반대하다 전부 날라간다. 중국 국민당과 행동을 함께했던 임시정부세력과는 다르게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있던 옌안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운동을 하다가 귀국한 세력이기 때문에 이름이 연안파(延安派)이다.

중국 공산당에게 옌안은 중요한 도시이다. 여기서 활동하여 중국 공산당의 기틀이 마련된 곳이다. 또 김일성 자체는 소비에트라인 이었으므로,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 사이의 대리전 양상도 있었다.

 


여하튼 이렇게 되니까 김원봉과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 공산당쪽으로 갔으니까 김원봉이 곤란해졌다. 국민당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자기 수하에 있던 사람들이 국민당의 적인 중국공산당 팔로군쪽으로 갔으니까! 국민당의 반발이 염려가 된 김원봉은 자신도 옌안으로 들어가서 조선의용대의 병권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중국공산당라인 주은래가 반대한다. 중국공산당 입장에서는 김원봉이 옌안으로 올 경우 조선의용대의 실권을 장악할거라 예상하였는 바 그것은 중국공산당 입장에서는 그닥 도움이 안되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왜냐면 이미 옌안에는 무정과 김두봉이 있었으니까....

 

▲ 중국혁명의 승리를 위해 싸우다 쓰러진 수많은 조선족선렬의 뭇별 중에서 단연 가장 빛나는 별인 홍군장령 양림(1901~1936). 그는 중국해방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꿈꾸었던 불멸의 투사이다. 그의 부인이자 만주벌판의 항일투쟁사에서 항일여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추악(1901~1936). 국경넘어 사랑과 항일을 함께 했던 그들의 순절은 혁명사에 불멸로 남아있다.


무정 장군.. 김무정, 1905년 함경남도 경성군에서 태어나 14세때 3․1운동에 참가하고 이후 혁명의 길을 찾아서 중국으로 감. 19세때 중국 화북성 보정군관학교 포병과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고, 22세에 포병 중좌가 된다. 1924년, 포병과를 졸업하고 그 다음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만약 스탈린그라드 작전에서 무정과 같은 장군이 있었다면 2차대전이 조금은 빨리 끝났을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무정이 압록강 밑 용암포 앞바다에서 포격시험을 보이는데 이때 백발백중하는 포사격 솜씨를 보인다. 이걸 보면서 소련의 군사고문관이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6․25때 제2군단장으로 참가, 9월에 인민군 후퇴때 평양의 수도방위사령관으로 있다가 12월에 압록강변 만포군 별오리에서 개최된 노동당정기대회에서 불법살인과 명령불복종 등의 혐의로 처형될 위기에 몰리는데(이것은 순전히 군벌싸움에서 밀린 것이다).... 옛날 중국공산당에 연이 많아 팔로군출신의 옛동료들이 구해줘서 중국으로 갔다는 썰이 있다.

 


이 사람이 남긴 말.. “나는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싸웠다. 만일 조국의 독립을 침해하고 간섭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대포를 쏘아 묵사발을 만들것이다. 그가 공산주의자라도 말이다”

2002년 2월 20일자 중앙일보 기사를 보면, 연안파 거두 무정장군 사후 복권 확인.. 6·25때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진 무정, 전인민군 2군단장이 북한의 국립묘지격인 애국열사능에 묻혀있는 것이 확인됐다.

 


이참에 조선의용대가 분열로 김원봉의 입지가 좁아지자 임시정부행을 택한다. 이에 불만을 느낀 조선의용대대원 일부는 옌안으로 떠나고, 김원봉을 따르던 조선의용대는 김구가 이끌던 한국광복군에 편입이 된다. 광복군 제1지대가 되고 김원봉은 1지대장이 된다. 광복군에 편입이 되면 편재가 되어야 하는데, 김구와 약산의 기싸움은 계속 되었다. 옌안에 있는 조선의용대와 여기에 있는 광복군하고 힘을 합쳐서 조선으로 쳐들어가자고 김원봉은 계속 주장을 펼친다. 광복전쟁을 치르자며.. 머릿 속에 이것밖에 없는 약산이었다.

물론 이 주장은 김구에 의해 묵살된다. 심지어 이승만은 약산을 퇴출시키라고 계속 압력을 가한다. 그렇게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1944년에 약산은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임정의 No.2가 된다. 이때에도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 사실상 실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1945년 초 우리 광복군과 미국OSS는 우리나라에 침투시킬 목적으로 합동훈련을 했는데 이때 김원봉은 배제되었다.

김원봉은 전혀 몰랐다. 아니, No.2이고 군대최고대장이었지만 김원봉은 쏙 빼고 이야기가 된 것이다. 약산은 김구에게 항의를 했지만, 김구에게 압력을 넣은 사람이 약산은 빨갱이니 밝히면 안된다고 한 것이다. 미국 측도 아마 약산의 옛날 활동보고를 보고 좋아하지 않았을 개연성이 있다.

 

▲ 1945년 8월 산동성 유현에서 OSS훈련을 받을 당시의 광복군 세사람. 왼쪽부터 노능서(1923~?), 김준엽(고려대총장,1920~2011), 장준하(사상계,1918~1975)


김구와 약산의 불편한점, 기싸움, 임시정부내의 파벌싸움을 두고, 이에 대해 중국국민당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문제점을 쓴 보고서가 있다. 개망신이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의 대한민국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데서 더욱 창피하다.

1. 한국민족은 개성이 너무 강해 스스로를 높게 보는 경향이 된다. 나이어린 사람은 나이많은 사람을 우둔하고 무능하게 보고, 나이많은 사람은 청년들을 유치하고 무지하다고 본다.

2. 위대한 영수 인재가 결여되어 있다. 김구는 도덕성과 고관정신이 족히 혁명을 영도할 수 있으나 재간이 부족하다. 김원봉은 재간은 있으나 도덕성만은 전체 당원을 영도하기엔 못미친다.

3. 중심사상이 부족하다. 당은 같지만 파벌이 달라 맨날 집안 싸움만 한다.

4. 각 당파의 시기와 질투가 너무 심하다. 어떤때는 합작하고 어떤때는 분열하고 상호신뢰가 없다. 서로 경계하고 양보하지 않는다. 각 당의 감정이 이와 같으니 진정한 통일이 어렵다.

 

▲ 1945년 11월, 임시정부요원 1진 귀국뒤 시가행진으로 펼쳐진 국민환영대회


결국 국내진공도 하지 못하고 해방이 된다. 1945년 11월 23일에 김구와 김규식이 1진으로 한국으로 들어오고 김원봉은 2진으로 12월 1일에 우리나라로 넘어온다. 김원봉의 민혁당은 김구의 한독당에게 민혁당 당수 김규식을 1진으로 보내주면 김원봉은 2진으로 들어오겠다고 양보를 한 것이었다. 이 제안을 한독당이 응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김구와 김규식이 이승만에 비하면 아무런 환영도 받지못하고 우리나라땅에 들어왔지만, 이거보다 더 관심을 못받으면서 김원봉은 초라하게 들어오게 된다. 딸랑 미군 트럭 하나 왔다. 환영인파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의열단의 대장이자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영웅이라고 소문이 났던 김원봉이 들어왔는데 조선백성 그 누구도 모르게 들어왔다. 이게 김원봉에게는 패착의 순간이 되었다. 그가 대환영 속에 들어왔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이게 김원봉의 약점이다. 양보를 잘한다는 것!

 

▲ 1946년 신탁통치 반대 시위 현장..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은 경교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나서 찬반탁의 논쟁이 격렬해지고 찬탁쪽으로 가다보니까 결국에는 우파랑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아예 좌파로 낙인찍혀 우파와 친일파에게 끊임없이 백색테러의 위협을 받게 된다.

 

 

▲ 민전은 처음에는 친일파를 제외한 '민주주의적인 민족통일기관'으로 구성 되었으나, 신탁통치문제로 의견을 달리하는 우익 진영을 전혀 참가시키지 못한 채 좌익만의 연합체가 되고 말았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활동하였다. 민전은 좌파계열 정당이 연합해서 만든 좌파 단체였는데 김원봉은 여기서도 좌우합작을 이야기 한다. 이게 핵심이다. 어디에 있던 그는 좌우합작을 이야기했다. 박헌영(공산주의운동가,1900~1955)이 좌우합작위원회 철수를 한다. 김원봉은 여운형과 더불어 맹백한 반대의사를 나타낸다.

 

 

1946년 10월 대구폭동이 일어나자 이때 민전 단장의 자격으로 대구를 방문한다. 이로인해 10월 20일 성주식(독립운동가,1891~1959)과 함께 성북경찰서로 연행 구타를 당한다. 독립운동가가 경찰에게 구타를 당했던 것이다.


1947년 3월 민전의 산하단체인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가 주도한 24시간 총파업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장택상(1893~1969)의 사주를 받은 빌어먹을 친일경찰 노덕술(1899~1968)에게 체포되는데, 체포될때 상황이 화장실에 있었다. 바지도 제대로 못입고서 노덕술에게 끌려가서 짚차에 태워졌다. 노덕술은 차안에서 김원봉에게 의열단단장 했다고 설치는 모양인데 빨갱이 짓하면 그게 다 소용없다며 공개모욕을 주면서 뺨을 때리기도 하였다.

 


노덕술은 김원봉을 잡아서 장택상 앞으로 끌고 갔다. 장택상은 이 대목에서 “이 바보같은 놈아! 정중히 모셔오랬지, 누가 이렇게 잡아오라고 했나?”며 송구스럽다는 듯이 묶인 포송줄을 풀어주었다. 완전히 때리고 얼루고 하여 독립투사를 가지고 노는 모습이었다. 이게 YS가 가장 존경한다는 인물 장택상의 모습이다.

 


어쨌던 김원봉은 풀려나지만, 유석현(의열단출신,1900~1987)에게 “여기서는 왜놈들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 내가 조국해방을 위해서 중국에서 일본놈과 싸울때도 한번도 이런 수모는 당한 적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에 의해서 수갑을 차다니.. 이럴수가 있소” 하면서 3일동안 곡기를 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뺨맞은 4개월 후인 1947년 7월에 같이 좌우합작을 모색하던 여운형(1886~1947)이 암살된다. 더 이상 남조선에 살수가 없다고 판단한 김원봉은 절규한다. “정치적 주장이 다르다고 하여 그것을 구실로 삼아 자기민족의 지도자를 학살하는 이런 죄악은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여운형의 암살은 곧 암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백의사의 백색테러가 이승만의 사주를 받아 마치 한국의 KKK단 처럼 활동하였다.

 

▲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


1948년 4월 김구,김규식과 더불어 약산은 남북제정당사회단체 연속회의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평양형을 택한다. 그리고 올라간 김원봉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1. 남한에서 좌파로는 정치지도자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깨달음이고

2. 지속적으로 그에게 가해지는 우파와 친일파들의 백색테러에 대한 두려움이고

3. 북한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이 연안파 자기 밑에 있던 사람들이고

4. 친일파 경찰 노덕술에 당한 수치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약산이 공산주의자라서 월북을 했다는 주장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일예로 그의 비시였던 사마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북한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는 생각을 밝혔다.

 


독립운동가 정화암(1896∼1981) 선생도 “김원봉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월북이 철학적 사상적 인생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남한에 있어봐야 정치적으로 큰 뭣이 없겠고 지난잘 관계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이북에 있고 그러나 이북으로 갔을 것이다”고 증언했다.

 


어쨌던 스스로 월북을 하였고,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그의 이복동생들은 쌍끌이 보도연맹원으로 몰려서 총살 당하였다. 그리고 이북에 있었던 약산은 김일성의 주장과 달리 끝까지 하나된 조국을 불어짖다가 1958년 북한정부로부터 노동훈장을 수여받고는 그해 연안파와 같이 숙청 당했다. 김일성은 독립투사 김원봉을 철저히 자신들의 체제선전을 위해 활용하다가 가차없이 숙청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약산은 숙청당한뒤 감옥에 수감되고는 청산가리를 스스로 입안에 털어넣고 자살을 했다고 알려진다. 그의 죽음이 자살인지 총살인지 자연사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확실한 건 그의 무덤은 애국열사능, 혁명열사능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그가 자발적으로 월북을 택했다는 점, 그의 가족들이 남한에서 총살당했다는 점 때문에 그의 이름이 불리는 것 조차 금지시 되었고, 그 흔한 훈장 하나 이날이때까지 수여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그를 따르는 연안파가 숙청되고 그의 친척인 김두봉이 쿠데타로 실각하자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범죄로 인식되었다.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약산 김원봉의 생애이다.

 

 

▲ 1919년 9월 2일, 65세 노인의 나이로 조선의 3대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졌던 강우규 의사(1855~1920)는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며 몸이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 며 되묻는다.


의열투쟁을 마치 무력투쟁, 테러행위라고 호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강제점령의 역사 속에서 민족말살이나 민족학살은 제껴두고 살인을 반인륜, 반평화라고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은 불특정다수에게 테러한 적은 없다.

 


독립기념관 사이트에는 한국의 의열투쟁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해놓았다.

1. 일제의 침략 강점 식민통치와 기만적 지배정책에 대한 강력한 규탄 경고 응징의 선봉장이 되었다.

2. 절대 독립 추구의 민족적 열망과 의지를 국제사회에 부단히 표출하여 알리고 민족내부에 대해서는 일제타도와 독립달성의 희망을 지속적으로 불어넣어 독립운동 에너지에 견고한 기능을 했다.

3. 적은 비용으로 적을 타격하고 큰 손실을 입힘으로서 장기대치 국면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투쟁방법이 되었다. 그래서 일제는 한국인의 의열투쟁을 몹시 두려워했고 대처하기 매우 어려움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독립군 무력투쟁을 견인하고 보좌하면서 그것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독립운동 역량축척의 밑거름이 되었다. 의열투쟁은 일본식민통치의 기반을 뒤흔들고 그 기생세력에게는 심대한 위험요소가 됨으로서 국내외 독립운동발전에 호조건을 조성해 주었다.

5. 역사적 정의회복에 대한 의지와 열정, 그리고 그것을 체험한 다수의 열사들의 언행과 족적은 제국주의 지배로 인한 민족사의 크나큰 굴절과 빼아픈 상흔속에서도 보석처럼 빛났고 훗날 민족정기가 되살아나 오롯이 재확립되게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 인자가 되었다.

 


노덕술(1899~1968)은 김창용(1916∼1956), 하판락(1912~2003)과 함께 3대 악질 친일경찰로 고문기술자 이근안(1938~)의 원조이다. 해방이후에도 고등계의 친일경찰들은 미군정의 핵심부에 재등용이 되었고 친일파처단을 위한 반민특위활동을 와해시켰다.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이 되어 경찰내부의 ‘반이승만세력’ 축출에 앞장섰고, 반민특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남로당과 밀착되어 있다는 소위 ‘국회프락치사건’을 일으켰다. 경찰청장 장택상의 저격용의자였던 25세 청년 박성근을 고문중에 죽이게 되자 창문을 열고 “저 놈 잡아라”고 외쳐 경찰서를 혼란해진 틈을 타 시신을 꺼내어 얼어붙은 한강 구멍에 넣어 유기했다.

 

 


이런 놈이 1960년대에는 국회의원 출마까지 하였고, 나중에 서울대병원에서 자신의 생을 다했다. 편안하게 떠난거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린 분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어려움을 겪고 살고 있는데, 반대로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정기를 훼손하려 했던 자들의 자손들은 이 땅의 로얄층이 되어가지고 지금도 기름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다시한번 만약에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가족들 누구에게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워라고 할 수 있겠나?

 


약산 김원봉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그 사람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다. 아무리 역사가 승리자의 역사만 기록한다고 해도 독립운동가들의 자기의 목숨을 조국의 미래에 내던진 희생의 값을 이런 식으로 묵살할 수는 없다.

김원봉에 대한 남과 북의 태도는 지극히 정치적이면서도 모순적이다. 김원봉은 이데올로기를 선택하지 않았고, 오직 내 조국의 해방 하나 그 하나 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었던 사람이다. 청산되지 않는 친일의 역사에서 더더욱 김원봉의 이름은 가치가 있고 높게 평가받아야할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