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팽년(朴彭年)
“의(義)는 천금처럼 무겁고 목숨은 일모(一毛)처럼 가볍게 여겨 인(仁)을 이루고 의로 나아갔으니” -秋江 南孝溫-
1417(태종17)-1456(세조2)조선초기세종과 단종대의 학자이며 충신으로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다. 박식함이 유별하여 집대성(集大成)이란 호를 얻음
시호는 충정(忠正)
박팽년은 집현전 학사이며, 집대성의 문장가, 절의정신(不事二君)의 표본적 충신인 사육신의 한 인물, 또는 인품이 뛰어난 정치행정가
청렴 강직한 기상과 드높은 절의정신은 이후 조선 선비정신의 상징이며 대전지방 사림의 표상이며 긍지
순천박씨는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후백제왕 견훤의 사위가 되어 후백제의 장군으로 활약한 영규(英規)를 시조로, 고려정승 평양군(平陽君)난봉(蘭鳳)을 중흥조로 삼고 있으나 계통을 잃었다. 그래서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숙정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가계도
1世 숙정(淑貞): 보문각 대제학
↓
2세 원상(元象):숙정의 다섯째아들 고려말에 공조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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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 안생(安生):원상의 셋째아들 증. 이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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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중림(中林):이조판서. 문민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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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1세) 팽년(彭年)― 인년(引年)― 기년(耆年)― 대년(大年)―영년(永年)
증. 이조판서 집현전 집현전 승문원 예문관 충정종 교리 수찬 박사 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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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2세) 헌(憲) ― 순(珣) ― 분(奮)
↓
7세(3세) 일산(壹珊):넓고 넓은 바다 한가운데 홀로 떠있는 산호섬과 같이 유일한 혈육이라는 뜻
※박비(朴婢): 둘째 순의 유복자로 태어났으나 연좌제로 인해 여종의 딸과 바꾸어 길렀으나 후에 자수하여 성종대왕이 용서하고 이름을 일산으로 지어줌 (사육신중 유일하게 혈손이 보전됨)
※박팽년 아버지 박중림(朴仲林) : 호는 한석당(閑碩堂) 시호는 문민(文愍) 묘는 실전
1423년 문과 급제 , 1427년 중시에 합격 박중림은 당대의 명유(名儒)로서 문장과 덕행이 출중하여 집현전학사가 되어 그의 문하에 성삼문 하위지등도 그에게 사사하였다. 단종복위운동으로 사형, 박팽년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공부했다
박팽년이 “왕에 충성하려니 효에 어긋난다” 고 하니 웃으며 “충성하지 않으면 효가 아니다 ”라고 함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증조(曾祖)원상의 4남(首生. 長生. 安生. 易生)중 3남 안생이 할아버지이고 이조판서를 지낸중림(仲林)의 다섯아들중 장남으로 태어나 3남2녀를 두었다. 세아들은 사육신사건으로 연좌되어 죽고 두딸은 현령 이공린과 영풍군(세종과 혜빈양씨소생의 8남)에게 출가
고향 : 충청도 회덕현 흥룡촌 왕죽구(忠淸道 懷德縣 興龍村 王竹丘)
지금의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 197번지(더퍼리) (박팽년 유허비 부근) 원래 회덕에서 세거하였으나 전의면으로 옮겼다
유허비에서 남으로 15리지점에 증조 원상(중구 산내 대별동)의 묘(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썼다)와 증조모의 묘가 있다.
종조 이생의 자손들이 석남촌(지금 동구 성남도 일대)집단적으로 거주 그의 종숙부(근)의 부인의 묘도 근처에 있음 직계혈족은 충남 연기군 전의면이 세거지이다
◆세종14년(1432) 16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세종 16년(1434) 18세에 알성문과(謁聖文科)합격
◆세종29년(1447)31세에 관원의 승진시험인 중시(重試)에 급제
집현전 학사로서 호당(湖堂:독서당의 별칭으로 임금의 특명을 받아 공부 하던곳)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또한 청백리(淸白吏)(관리의 모범으로 품계가 오르며 음덕으로 자손이 벼슬할수 있음)에 녹선 되었으며 문장도덕과 경학에 통달하였으며 서화에도 뛰어났음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 및 ‘동국정운“ ”고려사절요“편찬 등
◆1454년(단종2년) 형조 참판
◆1455(단종3년) 6월 세조 왕위찬탈 충청관찰사
경회루 연못에서 죽으려 했으나 성삼문의 만류로 죽지 못함(상왕이 살아있으니 후일 거사를 도모할 수 있다고 하며 자신의 죽음이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충청도관 찰사가 되었는데 녹봉도 먹지않고 고스 란히 보관하였으며 계목에도 칭신하지 않고 자신을 신(臣)자 대신 거(巨)라고 썼다
◆1456: 형조참판 임명, 단종의 양위를 세조의 불법찬탈로 보고 단종을 다시 왕위 앉히려는 중 대한 음모를 주동 (사육신의거: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실패 윤6월7일 참형
(성삼문 이개 유응부등 창덕궁연회에서 거사을 하기로 했으나 雲劒을 폐하라는 왕명이 있어 후일를 기약하였는데 김질이란 사람이 불안하여 장인 정찬손과 상의 하여 세조에게 자백하여 모두 체포 세조가 박팽년이 인재가 아까워서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
처형장으로 가는 중에 금부랑 김명중이“공이 어찌하여 이러한 화를 입기에 이르게 되었는가?”라 하며 세조의 회유를 뿌리치고 죽음을 택한 박팽년의 의로운죽음이 안타까워서 물으니
“중심불평 부득불이(中心不平 不得不爾): 내 가운데 마음이 편치 않으니 부득불 이렇게 하지 않을수 없다”라 하였다
◎세조 : 당세의 난신(亂臣)이요 후세의 충신(忠臣)이다
◎매월당 김시습에 의해 노량진 아차산기슭에 안치(지금의 사육신 묘역)
◆1647(인조25년) : 박팽년 7대손 숭고 사육신묘 찾아 봉역을 수축 표석 세움
◆1655년(효종6년) : 노량진 묘역에 사육신 비석
◆1679(숙종5년) : 당시영의정인 허적이 육신의 분묘을 봉식하는 청원하여 윤허
◆1691(숙종24년 : 왕명에 의해 비망기을 내려 육선생을 복관시키고 사당에 민절서원을 사액
◆1758(영조34년): 영조는 자헌대부(자헌대부) 이조판서의 증직 충정(임금의 절개을 다한 것을 충(忠)이라하고 올바른 도리로서 남을 감복시킨 것을 정(正)이라 하다)의 시호를 내림
박팽년의 관력
| 세종17년 | 21년 | 26년 | 28년 | 29년 | 30년 | 문종1년 | 단종즉위 | 1년10월 | 1년11월 | 2년 2월 | 2년 8월 | 3년 4월 | 세조1년 | 1년11월 | 2년 5월 |
관 직 | 정 자 | 부 수 찬 | 부 교 리 | 교 리 | 직 전 | 직 제 학 | 집 의 | 부 제 학 | 좌 부 승 지 | 우 승 지 | 좌 승 지 | 형 조 참 판 | 충 청 감 사 | 예 문 제 학 | 형 조 참 판 | 중 추 원 부 사 |
◆제향서원 : 대전의 정절사(靖節祠) 과천의 민절서원 영월의 창절서원 대구의 낙빈서원 홍주의 노은서원 연산의 팔현서원 의성의 학산서원 순천의 겸천서원 대구의 육신사 대전의 숭절사
◆1775(영조): 어제(御製)60글귀를 지어 승지를 보내 육신묘에 치제
◆1782(정조6): 신도비세움
◆1791(정조15): 왕이 어제제문을 지어 사당에 치제
◆1972년5월 : 서울특별시 지방문화재 제8호지정
◎추강 남효온이 「육신전」을 지어 그후에 사육신으로 불리워짐
박팽년의 문학
김질이 세조의명을 받고 회유하려 했으나 굽힘없는 지조를 읊은 시조
가마귀 눈비 마자 희듯 검노미라
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오랴
님 向 一片丹心이야 고칠 줄이 이시랴.
金生麗水라 들 물마다 金이 남여
玉出崑崗이라 들 뫼마다 玉이 날쏜
암으리 思郞이 重타 들 님님마다 좆출야.
松竹雪月圖
어지러히 많은 꽃들이 아름다움을 다투고 있는 때에
누가 한 겨울의 風雪을 향해 가까이 하겠는가
식물은 앎이 없음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西山에 홀로 採薇人이 있을 뿐이로구나
세조가 영의정이 되어 조정에서 연회가 있을때 지은시
묘당 깊은 곳에 풍악소리 구슬프니
만사가 오늘에는 도무지 모를네라
버들잎 푸르고 동풍은 솔솔 부는데
꽃이 밝은 봄날은 더디고 더디구나
선원의 이룬 대업은 금궤에서 뽑아내고
성주의 큰 은혜 옥잔을 거우른다
즐겁지 않은 일은 어찌 길이 즐겁지 않을손가
노래 잇고 실컷 취해 太平詩로 가리로다
단종의 子規詩(영월 자규루에서 읊은시)
원통한 새가되어 제궁에서 나오니
짝잃은 그림자 깊은 산중이로구나
밤마다 틈을 타서 잠들려도 못 이루니
해가 가고 해가 와도 원한 맺힌 그 한이라
자규새 소리 멎고 조각달 밝은데
피눈물 흐르고 꽃송이 떨어져 붉었구나
하늘도 귀가 먹어 애소를 못 듣는데
어찌하여 수심많은 내 귀에만 들리느냐
초서 【醉琴軒千字文(】(초천자) :초서로 된 천자문
박팽년은 문장과 필법이 뛰어났는데 필법에서는 남북조시대 종요와 왕희지를 버금간다고 하였다.
세칭 박팽년의 호는 취금헌이나, 우암집(尤庵集) 에 의하면 박팽년의 초천자(草千字)를 써서 남기었는데 후일 그의 사위인 영풍군이 이책에다가 자신의 호(醉琴)를 새긴 인장을 찍어둔것이 세상에 유행하면서 취금이 박팽년의 호인 것으로 와전
【雙淸堂記】 1445년(세종27년)
○난계 박연이 쌍청(淸風明月)이라 당호를 짓고 편액을 쓰고, 박팽년이 그 기문을 썼다.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불고, 밝은 달이 아름답게 비치는 누각 천지사이에 바람과 달이 가장 맑은데 연기와 구름이 사면에서 모여들어 천지를 침침 게 가릴 때 맑은 바람이 그들을 쓸어내고 밝은달이 하늘과 땅을 투명하게 비추어 털끝 한 점 하나도 보이지 않는 깨끗한 세상처럼 자연의 세계처럼 신묘한 경지라 하며 사람 의 마음속에는 그보다 더 맑고 밝은것이 있는데도 사람이 모른다며 송유는 백이와 같은 인물 이라함. 쌍청당의 청청한 정신은 충청도 사람들을 청풍명월로 칭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夢桃源序 】1447년(세종 29년)30세
안평대군(匪懈堂)이 꿈중에 박팽년과 도원에서 산책한 내용을 화가 안견이 그린그림(夢遊桃園圖)에 서문을 썼다
박팽년의 유적
◆취금헌 박팽년 유허비
◎대전 광역시 동구 가양동 197번지
◎대전 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8호
헌종9년(1688)에 세웠다
헌종13년 비각을 세워 장절정(壯節亭)이라 하였다.
비문은 우암 송시열선생이 지었고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글씨를 쓰다.
6.25사변때 비각이 파괴되어 비신만 남아있다가 16대 자손 박상동이 비각을 세움
◆창계 숭절사
◎대전 광역시 중구 안영동 560
◎대전 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2호
1923년 창건 1978년 중건
취금헌 박팽년 선생과 청재 박심문선생 두분의 위패을 봉안한 사당
박팽년의 위패는 원래 동구에 있던 정절사에 모셔졌는데 대원군이 그 사당을 훼절한 후로 이곳에 모셨고, 박심문은 세종때에 예조좌랑을 거쳐 세조 2년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길에 육신의 처형소식을 듣고 의주에서 자결
◆계룡산 초혼각지. 숙모전
◎충청남도 기념물 제18호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789
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참형당한 박팽년 성삼문등 충신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제단
세조2년 사육신이 참수를 당하자 매월당 김시습이 통곡하여 동학사로 돌아와 그들의 충절을 기려 초혼제를 지내고 그후 초혼각을 세웠다.
1457년 세조가 우연히 들렀다가 감동하여 자기로 인해 죽은280여명의 이름을 적어 초혼각에 모시도록 했다.
영조때에 전소되고 고종때 중건하여 고종으로부터 숙모전으로 사액을 받다
◆박팽년 사우
◎충청북도 기념물 제27호
◎충북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 94
영조51년(1775)에 사우와 충신문을 세웠다
충신문에는 2남 순과 순의 유복자 일산의 명정이 함께하고 있다.
◆사육신묘
◎서울특별시 지방 유형문화재 제 8호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182-2
신도비 의절사 사육신육각비가 있음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응부 네분의 묘만 있던것을 1978년 확장하여 하위지 유성원의묘를 만들었다. 김문기의 가묘도 있음
◆창절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27호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단종의 복위을 도모하다 절개를 지킨 여섯충신들의 위패를 모신곳
장릉(莊陵)곁에 육신절사가 있었는데 1705년(숙종31년) 이 육신절사를 장릉밖으로 옮겨 지으면서 彰節祠로 개칭 1791년(정조15년) 생육신중 김시습. 남효온등 10분의 위패를 봉안
◆기타
육신사 (박팽년 후손들의 세거지) 숭절사(박중림포함 7위의 위패를 봉안) 태고정(유복자인 일산이 건립한 정자) 삼충각 (3대의 충절을 기리기위햔 비각) 6선생사적비(1979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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