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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

하늘벗삼아 2018. 10. 30. 09:20

< 아이히만의 유언 > ㅡ 1962년 5월 31일 1962년 5월 31일 한밤중. 한 늙수그레한 남자가 교도관들에 의해 끌려왔다. 그는 사형수였고 그가 그날 죽어야 할 운명임을 알고 있었지만 크게 동요하는 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특이하게도 세 나라의 이름을 들며 그 번영을 기원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나하고 연고가 있는 이 세 나라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월드컵 A조 예선 정도라면 모를까 이 세 나라가 연결되는 고리는 보이지 않지만 그에게는 상관이 있었다. 사형수의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이었다.


아이히만은 원래 히틀러처럼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오스트리아에서 자랐다)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된 이후 아이 영화 에 등장하는 큰딸의 보이프렌드처럼 열렬한 나찌 추종자가 된다. 친위대원으로서 나찌의 유대인 말살 작업에서 중책을 맡았던 그는 독일 패망 후 귀신같이 사라져 아르헨티나에서 15년 동안 숨어 살다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의해 체포돼 왔다.


아르헨티나는 자국민의 납치에 가까운 체포에 격렬히 항의한 바 있었다. 모사드는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아르헨티나 인을 감금,심문하여 자신이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자백을 받아낸 후 약을 먹여서 때마침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이스라엘 외교 사절단의 일원이 술에 취한 것처럼 위장해서 이스라엘행 비행기를 태웠던 것이다. 아이히만의 유언은 계속됐다. 그 유언은 수백만 명의 생명을 지상에서 사라지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한 위인 치고는 평범하고 담담했다. “나는 전쟁 규칙에 따라야만 했소. 여러분, 또 만납시다. 이게 운명이라는 거겠지. 나는 지금까지 신을 믿으며 살아왔고, 신을 믿으면서 죽어갈 거요." 나찌는 초반에는 유태인들을 몰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유럽 대륙 아닌 곳으로 추방시킬 요량이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부터 아프리카 동부의 마다가스카르까지 거대한 유태인 게토를 세울 곳을 물색했다. 이때 아이히만은 오늘날의 이스라엘 지역, 즉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켜 보려고 팔레스타인까지 갔지만 영국과 아랍인들의 반대에 부딪쳐 빈손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독일에서의 유태인 추방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던 아이히만은 친위대에서 승승장구하지만 친위대의 수장 하이드리히가 “유태인 추방”을 “유태인 전멸”로 그 시책을 전환하면서 악마의 작업에 손을 담그게 된다. 1942년 1월 20일 유태인들 절멸 계획이 수립된 반제 회의에 서기로 참석했던 그는 곧 유태인 절멸을 위한 수송부의 책임자가 됐고 이윽고 “유태인 문제 최종 해결”을 위한 부처간 회의의 의장격으로 유태인 학살에 나서기 시작한다. 그의 지휘 하에 수백만 명의 유태인들이 효율적인 철도망을 통해 각 수용소로 집결됐다. 재판 과정에서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수송물이 수용소에 도착한 순간 나의 권한은 끝났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회스에 따르면 사실이 아니다.


 “처음에는 트럭 배기가스를 뿜어 죽이려 했으나 너무 비용과 시간이 들어 고민에 빠졌을 때 치클론B (독가스)를 해결책으로 내놓은 건 아이히만이었다.” 경천동지할 범죄행각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통 사람처럼 친절하고 성실했고 가족에게 끔찍한 가장이었으며 유태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잠을 못이룰 정도로 심약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회스도 비슷했다고 한다. 상부로부터 오는 잔인한 명령을 어떻게든 완화해 보려고 노력했다고 하니까.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손에서 대학살은 빚어졌고 아이히만은 그 핵심으로 지목된다.


선량한 아르헨티나인 리카르도로 변장하고 살던 그의 정체는 아들 클라우스가 연애를 하면서 밝혀지기 시작한다. 연애 상대자의 아버지가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였던 것이다. 그 아버지가 나찌 전범 사냥꾼 시몬 비젠탈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은 유명하다. “더러운 아이히만 놈을 보았네!” (Ich sah jenes schmutzige Schwein Eichmann) 앞서 말한 것처럼 모사드에게 체포돼 이스라엘 법정에 선 그는 계속 외친다.


자신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면서. “나는 신 앞에서는 유죄이지만 이 법 앞에서는 무죄다.”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아버지라고 해도 반역자 혐의가 있으면 죽였을 것이다. 나는 명령을 따르고 정신적 만족감을 얻을 준비가 충만했다.” 민간인을 죽이라는 명령에도 그대로 따라야 했느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연합군은 공습으로 민간인들을 죽이지 않았나? 명령은 따를 수 밖에 없다. 물론 그렇지 않고 자살할 자유는 있다.” 검사는 그에게 사형을 구형하면서 수많은 죄상 가운데 하나를 덧붙였다.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은 죄.” 그것은 “명령에 대한 복종은 미덕이었다.”는 아이히만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었다.


일부 유태인을 비롯하여 아이히만의 가족들이 감형을 탄원하지만 이스라엘 대통령은 그들에게 친필로 이렇게 써 보낸다. “너의 칼이 많은 어머니들에게 자식을 잃게 했으니 너의 어머니 또한 자식을 잃은 여자가 될 것이라.” (사무엘상 15장 33절) 사실 아이히만은 영화 에 등장하는 수용소장 같은 괴물은 아니었다. 아마 평생 그의 손으로 직접 사람을 죽인 일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성실하게 한 종족의 말살 계획을 수립했고 실행에 옮기고 공을 세웠다. “명령 때문”이었다. 그 명령에 저항하지 못하고 의심하지 못하고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그는 수백만의 살인자가 되고 만 것이다. 결국 살인자는 명령이 아니라 아이히만 자신이었던 것이다.


이건 비단 아이히만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회사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말단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일 또한 아이히만과 동일한 혐의를 받을 수도 있는 거니까. 1962년 5월 31일 아이히만은 세 나라의 만세를 부르며 목매달렸고 특별히 제작된 화로에서 아우슈비츠의 유태인들처럼 소각된 후 이스라엘 군함에 실려 지중해에 뿌려졌다. 미국이 빈 라덴을 바다에 뿌린 바로 그 이유였다.


누군가의 기념물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그런데 오늘날 아이히만의 범죄를 가장 절실히 되새겨야 할 집단이 바로 이스라엘 군과 이스라엘 국민들이 된 것은 아이러니다. 나찌에게서 배운 듯이 팔레스타인을 겁박하고 있는 그들은 아이히만의 아내에게 이스라엘 대통령이 써 보낸 사무엘서 말씀을 봉독할 의무가 있어 보인다. 아이히만이 목이 매달리듯 그들도 응징을 받을 것이니까. 그것이 ‘신의 뜻’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