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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레지스탕스 若山 金元鳳 4/5

하늘벗삼아 2017. 3. 24. 23:06


의열단의 한계가 전투부대이지만 이론적인 체제가 정립되지 않아 김원봉은 이것을 해결하고자 단재 신채호(역사학자,독립운동가,1880~1936)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해서 의열단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해 준다.

 


명문 중의 명문으로 알려진 조선혁명선언의 일부를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 강도 일본을 쫓아내려면 오직 혁명으로만 할 수 있으며,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다. ...... 우리의 민중을 깨우쳐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신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 10만이 폭탄을 한 번 던진 것만 못하며, 천억 장의 신문, 잡지가 한 번의 폭동만 못할지니라. ......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ㆍ암살ㆍ파괴ㆍ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이후에 의열단은 자금모금에 나선다. 독립운동도 돈이 있어야 할 것인데.. 밀정들의 난립, 일경들의 의열단 색출작업이 심해지자 소규모작전 가지고는 안된다. 군대를 처음부터 조직하고자.. 장제스가 교장으로있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김원봉 일생에 유일하게 졸업한 학교가 바로 이 학교이다. 1926년(국공합작의 모순이 촉발되어 국공대립이 심해진 시기..)에 들어가 김원봉은 크게 깨달은 게 있었다.

 


국공합작이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합심해서 앞으로의 미션들을 수행해나가자는 것인데 크게 두 번 일어났다. 첫 번째는 쑨원선생의 주창으로 국경과 그 주변지역에 있던 군벌들, 일본과 친했던 군벌들을 타도하고자하는 것이었다. 당시 군벌들이 일본과 손을 잡고 중국을 위기로 몰아넣기 때문에 행해진 미션이었다. 그 두 번째 국공합작은 만주사변이후 일본이 자꾸 처들어오니까 이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을 잡게 된 것이다. 그런데 국공합작은 표면적으론 그 목표를 다이루었다고도 할 수 있다. 1차때는 중국 북쪽의 군벌들을 몰아냈고, 2차때는 일본이랑 싸워서 일본에게 타격을 주었으니까..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모순이 굉장히 있었고 결국은 그 모순으로 인해서 국공합작이 깨지게 된다. 1차 국공합작때는 장개석을 필두로 한 국민당이 공산당을 무력화시키고 정권을 국민당이 잡게 되었고, 2차 국공합작때는 결국엔 국공내전, 힘을 키우고 있던 공산당이 국민당과 한판 싸우게 되가지고 장개석정권을 타이완으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만들어졌다.

 


당장의 눈앞의 목표만을 위하여 임시적으로 합작을 했기 때문에 목표가 달성될때 쯤에는 권력을 잡기위해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배신 때리는, 그런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한쪽은 자본주의적이고 한쪽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기반으로 했던 중국공산당이 한쪽에 있었다. 이런 사상적대립이 굉장히 심했기 때문에 미션완수를 거의 앞에 두고 한쪽이 한쪽을 배신때리고 한쪽은 쫓겨나는, 사상적 이념적 투쟁이 심각했다.

 

▲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은 압도적인 전력에도 연패를 거듭하고, 급기야 공산당의 수장 모택동은 전격적인 전쟁을 지시하고 결국 국민당은 대만까지 밀려나게 된다. 방어하기는 쉽지만 내륙으로 진출하기가 매우 힘든 섬 대만을 선택함으로써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국민당은 와해되거나 고립되어 공산당에 의해 각개격파를 당한다.


평소 이념투쟁 때문에 본 목표였던 항일투쟁을 제대로 못했다고 여겼던 김원봉은 이런 중국의 국공합작을 보면서 크게 깨달은 바 있어, 나중에 민족주의자들이 그렇게 반대했던 공산주의자들을 자기 밑으로 받아들였다. 김원봉은 공산당에 가입한 적도 없고 오히려 1925년 2월 동아일보 기고문에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를 합치자는 이야기를 했고 사회주의자를 비판적 수용하는 견지를 가지고 있었다.

 


김규식(독립운동가,1881~1950)이 어느정도 민족주의자였는가 하면, 조봉암(독립운동가,1899∼1959)이 해방 후에 만나자는 것을 한때 공산당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 그가 왜 약산이랑은 손을 잡았을까? 약산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중에 해방 직전에 김구의 임정에 들어가는데, 그기서 직제상으로는 넘버 투가 된다. 그러면 임정은 민족주의자계열이므로 사회주의자를 받아줄 리가 없지 않은가?

 

▲ 왼쪽부터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에서 장개석, 주은래 등 중국의 최고지도자들과 교분을 쌓는다. 이후에 안광천(사회주의 독립운동가, 1897~?)을 만난다. 경남 진영 출신의 공산주의 이론가로 거물급 인사였다. 1929년에 김원봉은 안광천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고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운영하였다. 이때 활동, 특히 레닌주의정치학교라는 이름 때문에 우파로부터 완벽한 공산주의자로 매도를 당하는데.... 약산은 공산주의를 하기위해서 공산주의활동을 한 게 아니라 효과적인 대일투쟁의 연장선상에서 공산주의활동을 했다고 보는게 옳다. 약산에겐 이념따위는 중요한게 아니었고 가장 효과적인 항일투쟁 방법만이 머릿속에 있었을뿐이다.

 


이에 대해 김성숙(독립운동가,1898~1969)은, 약산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요 애국자로 항일을 앞세운 투사였지 공산주의가 좋아서 그기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였다. 레닌주의정치학교도 공산주의자간부를 양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항일청년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독립운동가들의 증언이 여럿 있다.

 


박차정(1910~1944)은 동래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시절부터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근우회 여성운동 지도자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런데 집안 자체가 허덜덜한 골수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우리가 일제에 국권을 빼앗겼던 그해 이걸 수치로 여기고 아버지 박용한은 비분강개에 못이겨 자결하셨고, 두 오빠 박문희(1901~?)과 박문호(1907~1934) 둘다 독립운동가 였다. 숙부인 박일형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였으며, 김약수, 김두봉 등도 어머니 김맹련과 사촌관계 였으니 그야말로 독립운동가패밀리 였다. 그렇치만 박차정의 말년도 역시 좋지 않았다. 이 나라는 친일파의 말년만 좋아지는 그런 나라이다.


▲ 박차정은 국내에서 못다 이룬 독립투쟁을 둘째 오빠와 그 동지들인 의열단원과 함께 중국에서 해나간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 믿기힘든 추진력과 카리스마를 지닌 그녀를 마음에 둔 김원봉은 1년 뒤 그녀와 결혼하였고 이후 난징으로 옮겨 청년투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 정치간부학교에서 박차정은 교관이자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전개하던중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고 그 휴유증으로 1944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오른쪽은 둘째 오빠인 박문호로 1934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고작 27세에 옥사하셨다. 


박차정은 1930년에 광주학생운동과 노동자 파업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했다해서 다시 구속이 된다. 이때 어머니 김맹련은 독립운동한다고 중국에 가 있던 아들 박문호에게 연락해서 “니 여동생 성격이 이러니 못고친다. 차라리 본격적으로 만주벌판에 보내 니가 데리고 독립운동을 시켜라”라고 이른다. 오빠 박문호가 의열단원이어서 자연히 약산과 박차정은 만나게 된다. 이때 약산의 나이 34세, 박차정은 22세 였다.

 


미남에 엘리트였고 말빨 좋고 외국어도 하고 옷도 단정히 잘 입는 김원봉에 대한 소문이 아나키스트적인 면모가 있어 결혼을 안할거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사실은 박차정을 만나기 전에 벌써 결혼을 한번 했는데 상처를 하였다. 재밌는 것이 첫부인이 죽었을때 사인이 성병, 박차정도 성병으로 돌아가심.. 물론 총탄에 대한 휴유증으로 돌아가셨다고 공식적으로 나와 있지만 소문은 그렇다.

김원봉이 워낙 잘생겼고 여자들이 따랐고 술을 엄청 좋아했으므로.. 또 당시엔 항생제가 없어 치료약이 낙후되어 위험했다. 임질이던 매독이던 위험할수 있다. 옛날에는 화류병이라 그랜는데 이것이 약산이 와이프들에게 옮겼을 개연성이 높다. 영웅은 호색인가?

 

▲ 박차정의 유해는 해방후 김원봉에 의해 밀양에 안치된다.

   박차정의 하관식을 지켜보는 김원봉(가운데 모자벗고 있는 사람)


34세에 요절.. 약산이 나중에 유골을 가져와서 밀양에 와서 묻는다. 자기는 고향에 묻히지 못하지만.., 죽었으니까 또 결혼을 독립운동가랑 하게 되는데 1945년에, 이때 주례는 백범이 선다.

 

 

송씨 자매들.. 왼쪽부터 메이링, 아이링, 칭링.. 이들은 각각 장제스, 공샹시, 쑨원과 결혼했다.


1932년 장제스의 도움으로 조선혁명군사간부학교를 중국 난찡 외곽으로 옮긴다. 그리고 국민당의 동의를 얻어서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형성한다. 1920년대 후반 김원봉이 공산주의에 많이 몰두한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국민당정부와 손을 잡게 되었다. 김원봉이 공산주의자라면 중국 국민당과 과연 손을 잡을 수가 있겠는가?

 

 


오히려 말년에 북에서 축출당할때는 이 일로 해서 장개석 일파라고 김원봉에게 딱지가 붙게 된다. 마지막 조선의용대 분대장을 역임했던 김학철(소설가,독립운동가,1916~2001)의 말을 들어보면 김원봉의 사상이 공산주의가 아니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학철 왈, 김학무(독립운동가,1911~1943)가 장제스를 암살하는데 협조해달라고 김원봉에게 요청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 김원봉은 “장제스를 해치우는게 우리의 급선무가 아니요, 지금 그 자의 속셈은 우리를 이용해보자는 거요. 그렇다면 우리도 그 자하고 장기를 두서 안될게 뭐가 있소. 우리는 일제타도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이용해야 하지 않겠소”.. 흑묘백묘론, 검은 고양이건 흰 고양이건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것이 약산의 정확한 포지션이었다.

 


비운의 독립운동가 김학철(소설가,독립운동가,1916~2001)은 일제와의 전투중에 다리에 총상을 입고 다리를 절단한다. 그리고 1946년 이승만 꼴을 보기 싫어 월북했다가 또 다시 김일성 체제에 화가 나서 중국으로 망명했으나, 중국의 문화대혁명때 반동분자로 몰려 20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고, 죽기 직전인 2001년 귀국하여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을 방문하여 박차정의 묘소를 들러고 중국으로 돌아가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 일제시대 문인들의 친일은 거대한 물줄기였다. 일제의 세력이 백년 이상은 더 지속될거라 오판한 이 머리좋은 글쟁이들은 일제의 회유에 재빠른 순응을 택하였다. 이육사·윤동주·이상화·심훈 등이 없었다면, 그야말로 한국의 근대문학사는 참담했으리라! 여기에 끝까지 지조를 지켰을 뿐만아니라 처절한 독립운동까지 벌인 인물이 이육사 이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본명은 이원록으로,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1년 7개월간 옥살이를 할때의 수인번호가 264 였다.

어떤 예감 때문이었는지 선생은 1943년 베이찡으로 떠나면서 이 사진을 찍어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이듬해 1월 베이찡주재 일본 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시었다.


조선혁명군사간부학교는 1기생 26명, 2기생 55명, 3기생 44명의 간부를 배출하였다. 1기생 중에는 그 유명한 이육사(시인,독립운동가,1904~1944)가 있었다. 이렇게 결성된 조선의용대는 중국 국민당정부와 연대해서 항일전을 펼쳐나가는데 워낙 인력이 소수 엘리트다 보니, 직접적인 교전보다는 선전전, 심리전 이런 활동에 주력하게 되었다고 한다.

 

▲ 우리 근현대문학을 연 문인들은 모두 친일부역자들 이었다.

왼쪽부터 최남선, 이인직, 이광수, 주요한


이후에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여 중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단체들을 하나로 합치려고 시도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지청천(1888~1957)을 중심으로 한 신한독립단, 김규식(1881~1950)의 대한독립단, 김학규(1900~1967)의 조선혁명당, 조소앙(1887~1958)의 한국독립당, 김구(1876~1949)의 한인애국단 등의 여러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김원봉은 이 단체들을 하나로 묶자라고 제안했는데, 조소앙과 김구가 반대하였다. 앞으로 김구는 약산이 뭐를 하자면 무조건 반대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구보다는 김원봉의 이름이 훨씬 앞서갔기 때문에 김원봉을 중심으로한 유일당 운동에 참가하고 싶지 않았던거다.

 

 

 

 


또 한가지 민족주의자들은 의열단을 비난했다. 이유는 의열단내에 빨갱이들이 있다. 심한 경우는 이승만의 경우, 약산이랑 결별해라 계속 만나면 나는 김구 당신을 안만나겠다고 했다하니, 우리 내부 안에서도 이념투쟁을 계속했다는 말이 된다. 중국 공산당 국민당이랑 우리도 하등 다를바가 없었던 것이다.

단일정당 결성에 열성적인 김원봉에 대해 일제가 사찰보고서를 쓴 게 있다. 약산이 이렇게 단일운동을 열심히 하는게 김구를 끌어내리고 자기가 중심이 되어 할려고 했다. 이것은 전형적인 이간계, 일제가 우리의 내부를 이간질시키고 분열시키려고 쓴 것 같다.

 


1935년 6월 20일, 단일정당운동 노력으로 드디어 민족혁명당이 창당된다. 언론집회결사신앙노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대규모생산기관 및 독점적기업의 국유화, 토지의 국유화, 농민군대 등을 명시했는데.. 이거는 100년이후 지금의 진보정당의 당 정당정책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것이다. 약산은 민족주의자면서도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17개조의 당강을 보면 정치경제교육부분에서 국민평등을 구현한다는 삼균주의 원리를 구체화한 것으로 이는 결국 민족주의·민족주의·사회주의 이념의 융합을 꾀한 것이고 식민지 반(半)봉건사회라는 조선의 사회혁명에 입각해서 민족해방과 사회변혁을 양대과제로 하되, 민족문제 해결을 우선과제로 하여 민족대연합전선을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이때 창단식 임원에는 김규식,조소앙,지청천 등의 민족주의자 뿐만아니라 사회주의자 김두봉도 들어가 있었다. 김구의 임정는 참가하지 않았고 장준하(1918~1975)도 김원봉은 판에 박힌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하면서 참가하지 않음으로 해서 반쪽짜리 단일정당이 되었다.



이후에 결국 파벌싸움으로 조소앙이 탈퇴, 지청천계도 이탈하고 만다. 김원봉이 공산주의자인 최창익(사회주의독립운동가,1896~1957)과 허정숙(사회주의독립운동가,1902~1991)을 받아주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김원봉이 중심이 되서 민족주의계열, 공산주의계열을 다 받아서 어떠케던 큰 뜻을 만들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랑 결이 맞지않는 사람이랑은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꾸로 웃긴건 최창익은 김원봉의 노선에 반대해 당을 깨는데 공을 세운다. 김원봉의 생각의 핵심은 언제나 이념따위보다는 항일투쟁에 더 높은 가치를 두었다.

 


최창익과 허정숙, 재밌는 건 허정숙인데, 단발령에 항의를 한 사람으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자르고 그랬고 1910년대에 이미 사랑없이 섹스가 가능하다는 프리섹스주의자 였다. 첫남편 임원근(사회주의독립운동가,1899~1963) 역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간 사이에, 남편의 동료였던 송봉우(사회주의독립운동가,1900~?)랑 동거해서 첫남편 사이에 아들이 있었음에도 송봉우랑 또 아들을 낳았다. 나중에 의사이자 조선일보논설위원이었던 신일룡이란 남자를 만나 동거를 하는데 여기서도 애를 또 낳았고, 그리고 최창익을 만나서 결혼해서 애를 또 낳음으로써 네 아들의 성이 다 달랐다고 한다. 더욱이 아들 놓은 것만 네 사람이지 그냥 프리로 즐긴 사람들은 숱하게 많았다고 전해진다.

 


1956년에 연안파로 몰려 최창익은 김일성에 숙청을 당하는데, 그때 허정숙이 증인으로 나왔는데 자기 남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최창익만 숙청이 되고 허정숙은 살아남아서 늙어 죽을때까지 북한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