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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레지스탕스 若山 金元鳳 2/5

하늘벗삼아 2017. 3. 24. 23:02

김두봉은 1940년 7월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여 주석에 취임한다. 이때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있지만 공산주의 활동보다도 반일투쟁 활동으로 평가받을게 많고, 해방후 김일성대학 초대총장, 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회의위원장 등 여러 가지 직책을 맡고 활동하다, 1958년 3월 노동자 1차 대표자 대회에서 반혁명종파분자로 공격을 받고 축출이 된다. 1960년 김일성파와 옌안파의 싸움에서 옌안파가 숙청될때 북한의 협동농장에서 사망했다.


▲ 오른쪽부터 김일성,박헌영,김원봉,허헌,김달현 그리고 맨왼쪽이 김두봉이다. 1951년에 사망한 허헌이 살아있는 것으로보아 해방후 전쟁전인 1948~49년경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김원봉도 중앙학교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그것은 웅변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음으로다. 19세때 중국으로 유학을 결심한 김원봉은 무력투쟁만이 광복을 불러올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럴러면 강력한 군대를 가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자신이 군사학에 정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가장 강력한 군대는 독일이었으나, 당장 독일로 유학은 못가니 일단 중국에서 독일어를 배워서 차후에 독일로 유학을 가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당시 중국지역은 톈진이 독일의 조차지 였기에 톈진으로 가서 덕화학당(독일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한다. 유학자금이 없어 친구 한봉인(밀양출생 독립운동가,1898~1968)이 자신이 모아둔 돈과 돈을 훔쳐서 김원봉의 유학자금을 대주었다고 한다.



김원봉은 덕화학당에서 독일어 뿐만아니라 중국어도 같이 배웠다. 여름방학때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국 안동현에서 대한광복회 소속의 손일민(밀양출생 독립운동가,1884~1940)과 김좌진(1889~1930)을 만나는데, 그들로부터 고모부 황상규가 대구에서 장택상(친일파 전국무총리,1893~1969)의 아버지 장승원(친일파, 1853~1917)을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방학중에 중국이 연합군측에 서게 되고 1차대전중 독일에 선전포고를 해버려 중국에 있는 독일인들을 다 쫓아냄으로써 독일인 학교를 운영하던 사람들도 독일도 다 돌아가 벌이고, 학교는 폐쇄되어버림으로써 또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게 된 김원봉은 평생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체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 1920년대 금릉대학의 모습.. 50년대에 난징대학으로 개칭되었고 현재 난징 시내에 있다.  


1918년에 김원봉은 이여성,김약수와 함께 난찡의 금릉대학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운다. 여기서 만난 선배가 여운형(독립운동가,1886~1947)이다. 김원봉은 왜 금릉대학에 갔겠는가? 독일은 이제 아니다. 그래서 영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용주의 사고방식으로 오직 일제를 깨부수기 위해 배우고 할수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시작했던 김원봉이다.

 

Paris Peace Conference 1919


김원봉,이여성,김약수 세 사람은 세가지의 계획을 세운다. 첫째, 서간도지역으로 가서 군대를 조직할 것. 둘째, 상하이에서 잡지를 발행할 것. 셋째,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것이었다. 김원봉이 추구했던 것은 외교적 노선이 아니라 무력투쟁이다. 그래서 파리강화회의에 가는 이유도 자객을 파견해서 일본대표를 암살하고 이를 통해 세계인들에게 일본의 침략은 부당하고 조선은 독립해야한다고 알리려 했다.


▲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신한청년당 멤버(앞줄 왼쪽부터 여운홍, 고문격인 블레베씨 부부, 오른쪽 끝이 김규식, 뒷줄 왼쪽 두 번째가 이관용, 세 번째가 조소앙, 맨끝이 황계환) 


이는 신한청년당(파리도착시에는 임시정부로 바뀜)에서 김규식을 보내는 목적이랑 달랐다. 파리강화회의는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후의 전후처리 협상이다. 1차대전에서는 일본이 연합군측에 있어 굉장히 외교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김원봉은 신한청년당과 별도로 일본대표를 암살하기 위해 김철성(=김인태)을 파견했으나, 김철성이 도착해서 짐을 푸니까 가방에 숨겨놓은 총이랑 총알이 없어져 거사에 실패한다. 조선인 첩자가 빼돌린 것이다. 당시는 세작 밀정들이 어마어마 했으니 지금의 국정원 직원들보다는 뛰어났음은 분명하다.

 

▲ 당시 만주지역에 퍼져 있던 학교 및 무장독립단체들

김원봉은 서간도 지역으로 갔다. 당시 김약수가 길림에 먼저 가 있었다. 땅을 얻으러 간 것이다. 군대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군량미로 밥을 지어먹어야 했으므로 땅은 필수였다. 나라가 없는 상황에서 세금을 걷을 수도 없고 달리 조달할 방법도 없고 스스로 농사를 지어 둔전형식으로 경작을 해서 그기서 소출되는 쌀로 군대의 밥을 먹여야하는 것이다.

 


1919년 2월에 김약수가 김원봉과 이여성을 봉천으로 부른다. 그 와중에 3월 1일 대한독립만세라는 소리가 한반도에서 울려온다. 이 소식을 듣고 세 사람은 부둥켜안고 서로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울고난 뒤 김원봉은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아니었다. 비폭력투쟁으로는 절대 독립을 쟁취할 수가 없다. 독립을 위해서는 그것은 한계였다. 반드시 무장투쟁이 필요하다. 완전독립을 위해서는 무장투쟁만이 정답이었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세 사람 중 이여성과 김약수는 조선으로 돌아가서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김원봉의 생각은 달랐다. 가봤자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난 여기 남아서 폭력투쟁을 계속하겠다며 약산만 남게 되었다.

 

▲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영농 장면, 사진 왼쪽에 당시 무관학교 건물이 어렴풋이 보인다.


1919년 김원봉은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다. 동료로는 윤세주(1901~1942), 한봉인(1898~1968), 한봉근(1896~?)이 있었고, 교장은 이시영(대한민국 초대부통령,1869~1953) 교관으론 지청천(1888~1957), 김경천(1888~1942), 이범석(1900~1972)등이 있었다.

폭탄제조법, 군사학 등 열심히 훈련받던 어느날 마적떼가 처들어와서 재산과 총기를 탈취해버리는 희한한 사건이 발생한다. 김원봉은 이에 충격을 받고 졸업 3개월을 남겨놓고는 자진 퇴학을 결심하게 된다. 김원봉을 따르던 많은 젊은이들이 동반 자퇴할 것을 결심하나, 교장 이시영의 만류로 김원봉 혼자만 자퇴키로 했다.


 

1919년 11월 9일에 길림성에서 동지 12명과 함께 무장항일투쟁을 위한 독립비밀결사체를 조직하니 그것이 바로 의열단이다.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곽경(郭敬)·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鐘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喆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권준(權俊)이 13명의 의열단원은 창단 직후 ‘공약(公約) 10조’와 ‘5파괴(破壞)’, ‘7가살(可殺)’이라는 행동목표를 지침으로 채택했다. 공약 10조는 첫째,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 둘째,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다. 셋째, 충의(忠義)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해야 단원이 된다. 넷째, 단(團)의 뜻을 우선하고 단원의 뜻을 실행하는데 속히 한다. 다섯째, 의백(義伯)한 사람을 선출해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 의백이란 훌륭한 성품을 지닌 지도자이다. 여섯째, 언제 어디서든 매월 한 차례씩 상황을 보고한다. 일곱째, 언제 어디서든 모이도록 요청하면 꼭 응한다. 여덟째, 죽지 않고 살아 단의 뜻을 이루도록 한다. 아홉째, 한 사람은 다수를 위해, 다수는 한 사람을 위해 헌신한다. 열째, 단의 뜻에 배반한 자는 척살한다.

 


5파괴(破壞)는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기타 왜적의 주요 기관이다. 반드시 제거해야할 대상 일곱가지 7가살(可殺)은, 1.조선총독부 총독이하 고관 2.일본군 주둔군의 수뇌들 3.대만 총독부의 총독과 고관 4.매국노 5.친일파의 거두들 6.적의 밀정 7.소작농을 착취했던 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 등이었다. 의열단의 조직고문으로는 김대지(金大池)·황상규(黃尙圭)가 맡았고, 단장으로는 약산 김원봉이 선출되었다.


 

13명의 의열단, 그러나 폭탄, 총.. 아무것도 없었다. 다닉삼이라는 중국인으로부터 폭탄 3개와 탄피, 폭약제조용 공약품 등을 구입하고, 안창호의 도움으로 2000여에 달하는 탄피제조기와 공약품을 기증받고 폭탄제조를 연구하고 있던 임정 산하 별동대 구국모험단의 김성근(독립운동가,1892~1947)을 길림으로 초빙하여 상해에서 익힌 폭탄제조법의 기술을 전수받게 된다.

 

▲ 당시 의열단의 의거를 다룬 기사, 하단에 20대 초반의 앳된 모습의 김원봉의 사진이 있다.


첫 번째 의거 전에 일단 폭탄을 한국으로 반입시켜야 했다. 밀양의 쌀가게로 쌀을 위장해 보낸다. 김원봉이 직접 가려했으나 단원들의 만류로 이종암이 가게 된다. 1차는 발각되지만 2차로 보낸 폭탄은 발각되지 않았다. 요원들이 서울 인사동 중국집 중화루에 모여 2차로 보낸 폭탄을 가지고 테러를 하자는 모의를 한다. 그러나 이 계획정보가 밀정에 의해 새어나가 당시 경찰 300명이 급습하여 윤세주,이성우,곽재기,한봉인,신철휴가 검거되었고, 이종암과 김상윤은 다행스럽게 도망을 갔다. 당시 신문에 「조선총독부 파괴음모 검거」.. 이로써 의열단이 계획했던 대규모의 최초 폭파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의열단 이란 이름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윤세주,이성우,곽재기는 징역 8년, 한봉인,신철휴는 징역 7년을 받게 된다.

 

▲ 1920년대 부산경찰서의 모습


안타까운것은 뭐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체, 자기는 중국에 있는데 자기 단원들은 다 잡혀갔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소식이 부산경찰서 소속 김태석(친일경찰,1883~?)이가 의열단을 잡은 공로로 부산경찰서장으로부터 훈장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에 빡이 돌은 김원봉은 부산경찰서 폭파를 지시한다.

 

▲ 1914년 여름, 조선의 독립을 모색하기 위해 세계 무전여행에 나서는 김철성(=김인태)(左)을 배웅하기 위해 왕치덕(中)과 오택(右)이 모여, 영남루가 보이는 밀양강을 배경으로 범상치않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산상업학교에 다니고 있던 이들 세 사람은 10대의 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스스로 독립된 사고 속에서 우리 민족의 아픔을 안타까워하며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김철성은 이를 계기로 중국에서 의열단에 가입했고, 왕치덕, 오택도 역시 친구인 박재혁, 최천택 등과 함께 부산의 의열단원이 되어 의열투쟁 등 독립운동에 뛰어 들었다.


이때 간 사람이 박재혁(1895~1921)..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가 고서수집에 취미가 있다는걸 알고, 고서판매상으로 위장 부산으로 잠입하였다. 처음에는 나가사키, 대마도를 거쳐 안전하다는 루트로 고서 책들 사이에 폭탄을 끼어넣어가지고 보따리에 싸메고 들어왔다. 부산에 도착하자 부산상고 동창인 오 택(독립운동가,1897~1948)에게 내일 내가 이런 일을 하려는데 하루만 좀 재워달랬더니, 오 택 왈, “거사를 행하면서 내 집에 와준게 고맙네.. 덕분에 의로운 이름을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으니까!”

 

▲ 사전 답사후 찍은 마지막 기념촬영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같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엷은 미소와 가지런히 편 손은 박재혁의 평온하지만 의로운 결기를 보여주는 반면, 굳은 표정으로 주먹을 쥔 최천택에게서는 친구를 걱정하는 다소 경직된 모습과 함께 '너를 그리고 오늘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는 강한 결기를 느낄 수 있다.

박재혁은 1920년 9월 14일 거사 당일에 역시 부산상고 동창인 최천택(독립운동가,1896~1962)과 용두산공원에 올라가 경찰서 주변을 정찰하고 기념으로 사진촬영도 하였다. 중국인 고서상으로 위장한 박재혁은 검문에 통과하고 진기한 고서가 있다고 서장과의 면회를 청하였다. 경찰서장의 집무실로 인도되어 하시모토와 보자기를 펴면서 진기한 중국고서를 꺼내는척 하면서 폭탄을 끄집어내어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리고는 유창한 일본말로 “왜적 하시모토!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니가 우리 의열단 동지들을 체포하여 몹쓸 짓을 한 것을 다 알고있다. 조선민족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한다” 라고 외치고 폭탄을 던졌다. 하시모토는 폭사하고 박재혁도 부상을 입고 잡혀서 재판후에 사형을 언도받는다. 그러나 박재혁 의사.. “왜놈 손에 죽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겠다”며 곡기를 끊고 결국은 굶어 죽는다. 이때 나이가 26살 꽃다운 청년이다.

 


그런데 박재혁이 거사를 하러 가기 전에, 김원봉은 하시모토를 죽이기전에 놈의 죄상을 알려주고 죽이라고 지시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지시가 박재혁이 도망갈 시간을 남겨놓지 못했다. 그래서 이부분을 김원봉은 매우 자책했다고 한다. 내가 잘못 지시한 탓에 동지 박재혁이 죽었다. 이런 자책과 더불어 의열단 첫 번째 의거의 성공에 대한 자축 이런 와중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박재혁이 죽기전에 일본에서 쓴 편지였다. 「어제 나가사키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형편이 뜻대로 되어가니 이 모든게 그대가 염려해준 덕분인 듯 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즐겁습니다. 그대의 얼굴을 다시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다음 의거는 1920년 12월 27일에 김원봉의 고향친구인 의열단원 최수봉(1894~1921)이 사과자루에 폭탄을 넣고 밀양경찰서 강단에 두 발의 폭탄을 던졌다. 첫 번째 폭탄은 불발탄, 두 번째 폭탄은 집기만 망가뜨렸다. 최수봉은 도주 후에 할복자살을 시도했는데, 긋긴 그었는데 실패하고 체포가 된다. 치료받은 후 재판에 넘겨져서 사형을 언도받고 집행당한다. 이때 나이 27살, 역시 꽃다운 나이를 나라에 받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