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측에서는 무시무시하고 신출귀몰한 것으로 소문이 나서 의열단이라면 오줌을 질질 쌀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사례로, 1921년 9월에 의열단원 김익상(1895~1943)이 전기수리공으로 위장해서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미 일본경찰들이 의열단을 무서워해 대대적인 검문검색을 벌이고 있었으니, 폭탄을 넣고 조선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조선인에 대한 단속이 심해져서 방어망을 뚫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김익상은 일본 와세다대학 교복을 입고 교복안에 폭탄을 숨겨서 국내로 잠입을 시도한다. 기차안은 단속이 심하였다. 옆에 앉아있던 아기를 안은 여인에게 접근, “아기가 참 예쁘네요”하면서 젊은 아기엄마랑 말동무가 되어 알콩달콩 이야기를 나누자, 검문단속 중인 경찰이 일본인 신혼부부로 판단해서 검문을 안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경성까지 무사히 도착을 한 김익상은 전기수리공으로 다시 위장을 해서 조선총독부에 잠입을 한다.
▲ 영화 <암살>에서 부부인척하며 위기를 모면하는 씬은 김익상의 의거에서 모티브를 땄다.
2층 비서과(총독실로 오인)과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는데,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하였으나 회계과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였다. 총독부가 폭발로 인해 혼란상태에 빠진 틈에 현장을 유유히 빠져 나왔고 번화가로 나와서는 목수로 다시 변장하여 탈출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이게 다 약산에게서 배운건데, 그런 얘기가 있다. 어느 건물에 약산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처들어갔더니 아무도 없고 똥파리 한 마리만 왱왱거리더라.. 그래서 약산에게 붙은 별명이 ‘똥파리’가 되었다. 변장술.. 이거 다 약산에게 배운 것이다.
가슴 아픈 사건도 있었는데.. 1922년 연말에 일본의 육군대장 다나까 기이치가 상해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그래서 약산이 다나까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명사수로 유명한 오성륜(1900~1947)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이때 동지들 중에 김익상(1895~1943)과 이종암(1896~1930)이 서로 가겠다고 싸웠다고 한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어찌보면 죽으러 가는 건데 서로 가겠다고 나서다니..
▲ 1922년 3월 상해 황포탄, 의열단은 이곳에서 일제 군부의 실세 다나까를 저격 시도하였다.
다나까가 배에서 내려 부두로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오성륜이 다나까를 향해 권총을 발사한다.(그런데 재수도 없지) 이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옆에서 모자가 날아간 여자가 모자를 잡으려고 다나까 앞을 스치면서 오성륜이 쏜 총알을 맞고 여자가 피살된다.
총소리에 놀란 다나까는 엎드린다. 엎드린 것을 보고 총을 맞았는 것으로 오인한 오성륜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너무 성급하게 외쳤고 정체가 노출되어버린다. 이때 뒤에서 지켜보던 김익상이 “아니잖아~”하면서 다시한번 다나까에게 총을 발사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나까가 쓰고 있던 모자만 꿰뚫고 지나갔다. 다나까는 황급히 대기중이던 자동차로 도망을 가자 이번에는 이종암이 폭탄을 던졌으나 차량의 뒤꽁무니에 터지는 바람에 거사에 실패하게 된다.
이종암은 현장에서 탈출에 성공하고 오성륜과 김익상은 체포가 된다. 나중에 오성륜은 감옥을 부수고 탈옥을 했다. 오성륜이 감옥에 있을때 미국인 아놀드 스나이더가 찾아온다. 왜냐면 당시 상해로 신혼여행차 온 것인데 자기 부인이 오성륜이 쏜 총탄에 절명한 것이었으므로 그것을 묻고자 온 것이었다. 오성륜은 한국의 입장과 왜 자기가 다나까를 쏠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오발되어 부인을 사망케 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말을 들은 스나이더도 이해를 했다고 한다.
▲ 당시 미주지역에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던 미주의 독립운동가들..
문제는 하와이의 이승만과 미국, 1908년 전명운(1884~1947), 장인환(1876~1930)이 매국노 스티븐스를 사살한 무력투쟁때 변호를 해주기는 커녕 온갖 짜증을 냈던 이승만이나, 외국에서 자국민 죽는 것에는 철저한 인권보호국으로 나서는 미국은 참아내질 못했다.
여론 몰이로 한국의 무장투쟁단체에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임시정부도 의열단과 김원봉에 대해 거리를 두게 되었다.
▲ 대한민국 3년(1921년) 1월 1일 임시정부요인 58명이 태극기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임시정부의 분열.. 임시정부 내부의 분열은 심각했다. 사상적 분열은 기본이고 독립운동에 대한 방법에 있었어도 외교투쟁론, 실력양성론(안창호), 무력투쟁론으로 갈라졌다. 심지어는 너 어디 출신이야를 묻는 출신지역적 분열, 너 양반출신이야 상놈출신이야를 묻는 신분적 분열까지.. 무엇 하나 분열의 원인이 아닌게 없을 정도였다.
▲ 초대대통령이었던 이승만(右)을 탄핵하고 2대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은식(左)은 "아직 있지도 않은 나라를 미국에 미리 팔아먹어려는 이승만은 이완용 보다 더한 놈"이라 성토했다.
그래서 분열을 두고 보지 못했던 박은식(1859~1925) 등 몇몇 민족운동가들이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라고 요구를 한다. 여기서 개짝이 났는데, 임정을 끝까지 가지고 가자는 보수파(김구)와 임정의 폐단을 고쳐서 재창조하자는 개조파(여운형,안창호)와 아예 그냥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다시 만들자는 창조파(신채호,박용만)로 나뉘어 졌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1890~1923)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 압제했던 공간인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을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조선총독부 3대 총독인 사이토를 암살하기 위해 서울역에 잠입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일경 20여명과 총격전을 펼쳐 그중 10여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으나, 결국 1월 22일 일제군경 1000여명에게 은신처를 포위당하자 쌍권총을 쏘며 지붕을 타고 넘으며 무려 3시간의 총격전을 펼쳐 많은 일경들을 사살한 끝에 총알이 다 소진되자 마지막 남은 1발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결 순국하셨다. 열사의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11발의 총상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대한 남아의 기개를 떨치고 산화하신 것이다.
1924년에는 김지섭(1884~1928)이 동경에서 개최되는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질 목적으로 폭탄 3개를 행낭속에 숨기고 일본 배에 승선하였다. 하지만 열리기로 한 의회가 휴회하자 계획을 바꿔 일본왕궁을 폭파하려고 왕궁과 가장 가까운 다리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모두 약한 소리의 폭음만 내고 불발되고 말았다. 배를 타고 오는 동안 폭탄에 장시간 습기가 배여서 그리된 것이었다. 열사는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복역중 옥사하셨다.
▲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해방후 고국땅을 밟기 직전에 배안에서 작고한 이종희 선생
1925년 3월, 의열단은 밀정 가운데서 가장 악질분자인 김달하(김활란 언니의 남편)라는 자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형의 집행을 단원 이종희(=이인홍,1890~1946)와 이기환에게 명하였다. 김달하는 북양군벌의 거두 단기서의 부관으로 있으면서 뒤로는 조선총독부의 밀정노릇을 하고 있었다. 조선 독립을 위하여 열렬히 싸우고 있는 모든 애국지사들의 비밀을 탐지하여 왜적에게다 팔고 있었던 것이다. 김달하의 집을 급습하여 그를 포박하고는 죄상을 알리고 새끼줄로 목을 조아 죽였다. 중국경찰은 시체 옆에 떨어져 있는 사형선고서로 보아 이것이 의열단원의 소행임을 알았으나 깊이 수사하지 아니하였다.
1926년에는 나석주(1892~1926)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한 의거도 있었다. 그는 인천항으로 상륙하여 먼저 고향에 있는 부모님과 부인, 아들, 딸부터 보고 싶었으나 피눈물을 삼키며 서울로 향했다. 조선식산은행으로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굉음은 들리지 않았다. 불발탄이었다.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으나 태연하게 정문으로 나섰다. 그렇다면 이제 동양척식주식회사이다. 동척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나석주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폭탄을 던지고 권총을 난사하면서 백주대낮에 일거에 7명을 사살한 후에 자신의 총으로 자결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구보다 김원봉이 앞섰다. 김원봉과 의열단은 끊임없는 무력항일투쟁으로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김원봉은 독립운동가 중 가장 높은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김구가 60만원인데 반해 김원봉의 현상금은 100만원(현재 시가로 약 320억원)이 걸렸는데, 이 기록은 반 세기 이후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에게 내건 5천만달러(우리돈 약 520억원)로 갱신되기 전까지 세계 최고가 기록이라니 대단하다.
더욱 대단한 것은 당시 일본군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감을 드러냈음에도 단 한차례도 일본경찰에 체포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포위망을 좁혀도 신출귀몰하게 빠져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김원봉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경찰에게 뺨을 맞는 수모를 당하고 북으로 넘어간 사람.. 역사란 승자들의 기록, 기득세력집단의 기록이라, 쓰고싶은 라인에 선 사람들 중심으로 쓰여지고, 그기에 벗어난 사람들은 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는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중심의 항일투쟁사이고, 한인애국단에 가려 상대적으로 조명을 못받았지만 의열단의 암약이야말로 실상은 일본군에게는 가장 두려운 존재 그 자체였다.
[출처]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레지스탕스 若山 金元鳳 3/5|작성자 알찬리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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