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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레지스탕스 若山 金元鳳 1/5

하늘벗삼아 2017. 3. 24. 22:58

우리나라에서도 북한에서도 버림 받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비운의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불꽃같이 싸우다가 자기 목숨받쳐 구할려고 했던 조국이 해방되자 둘로 갈라지고 두 곳 모두에서 버림을 받는 김원봉의 비극적 운명은 우리나라의 비극적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 한다.

김원봉은 1898년 8월 13일(음력) 경남 밀양군 내이리 901번지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해김씨 찬판공파 42대 김주익, 어머니는 월성이씨 이경념의 장남으로 같은 동네 윤희규(작명가)을 찾아가 첫아들 이름을 김원봉이라 지었다. 그런데 바로 윤희규의 아들이 김원봉 평생의 친구이고 동지였던 윤세주(1901~1942)이다.

▲  석정 윤세주 선생은 밀양 내이리에서 김원봉과 함께 나고 자라 불멸의 길로 가신 독립투쟁의 영도자이다.  1942년 5월 타이항산 전투에서 일본군 40만을 상대로 겨우 수천에 지나지 않는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전투를 수행하던 중 십자령고개에서 포위된 항일연합군(팔로군)의 퇴로를 확보해주고자 동지들과 엄호사격으로 항일연합군을 탈출시키지만 자신은 총탄을 맞고 장렬히 산화하셨다. 이때 생명을 건진 대표적 인물로 펑더화이, 주더, 등소평 등이 있다.


함께 의열단 활동을 했고 조선의용대의 책사 노릇을 했던 윤세주는, 일본군이 1942년 조선의용대 대대적 토벌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전사했다. 타이항산 전투에서 많은 열사들이 사망했는데, 지금도 타이항산 지방 마을에 가면 중국사람들이 조선의용대 노래부터 열사들의 무덤까지 다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그 묘역을 그 지역사람들이 조성해 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다 잊고 있는데, 우리는 김원봉과 조선의용대의 흔적들을 찾지도 않는다고 하는데, 그 지역사람들에게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분들을 죽어서라도 이땅으로 모셔와야 하는데 이토록 근본없는 나라일까?

 

▲ 조선의용대의 활약을 기리는 허베이성 한단시 서현의 정율성 전시관.. 타이항산은 산세가 험하여 일찍부터 군사전략의 요충지로 이용되었는데, 중국 국민당 지구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가 어찌 중국 공산당 팔로군 지구로 간 것일까. 조선의용대의 활약상은 동포사회에 전해져 민족의식을 자각하는데 큰 울림을 주었고, 또 일본군에게는 적잖은 충격과 공포심을 주었으며 무엇보다 팔로군과의 사이에 혈맹적 관계가 강화되는 효과가 있었다.


김원봉의 친모가 동생 경공을 낳다가 사망하게 되자, 아버지는 영양 천씨 가문에 천연이랑 재혼을 해서 두자리 수의 많은 이복동생들을 두게 된다. 하지만 이중에 막내동생인 학봉(당시 여자 갓난애기)만 살아남고, 나머진 모두 보도연맹사건때 빨갱이로 몰려 총살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김원봉의 월북으로.. 불행한 가정사 이지만 이 모든 것은 민족살인마 이승만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인 것이다.

 

▲ 가장 안타까운 분단 민족의 현실이었던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공산주의 확산을 방지하고자 대국민 사상책으로 보도연맹 가입을 반강제로, 공무원들의 실적올리기로 종용해 놓고, 정작 전쟁이 나자 이 사람들이 혹시 북한군에 협조할지 모른다고 의심한 이승만의 명령으로 민간인 수십만명을 무고하게 영문도 모른체 학살해 버렸다.


김원봉의 조상들은 대대로 역관을 지냈다. 위로 치고 올라가 보면 선조 한 분이 서얼 출신이라 역관으로까지 갈 수 밖에 없었던거다. 할아버지는 중국어 통역, 아버지는 일본어 통역, 그래서 그런지 김원봉은 언어에 상당한 재능을 가져, 조선어,영어,일본어,독일어까지 4개국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역관이라 먹고 사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두 자릿수 자식들을 다 먹여살릴 수가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서른 마지기의 땅이 있었다는데, 보통 한 마지기가 200평으로 보면 대략 6000평 정도의 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생각해보면 잘 살고, 내 한 몸 누리기에는 나라가 어찌되어도 별 상관이 없는데 굳이 독립운동으로 나선다는 것이 더욱 대단한 것이다.

 

▲ 약산이 국외에서 독립투쟁을 할 당시 국내에 남아 있던 가족의 사진..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아버지 김주익, 그 옆이 계모 천연이, 앞줄 중앙이 막내 동생 김학봉, 뒷줄 오른쪽 양복을 입은 사람이 의열단 단원이다. 약산이 국내 가족들을 보고 싶다하여 국내에 잠입했던 의열단원과 같이 찍은 사진이다.  

 

김원봉은 여섯 살때부터 서당을 다녔고, 11살 때 밀양공립보통학교로 편입하지만, 1911년 일본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날 친구 윤세주와 같이 일장기를 똥곽에 처넣어 버리고 이것으로 학교를 잘린다. 잘리고 나서, 밀양군 내일동의 동화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이 된다. 원래 항일운동으로 잘렸기 때문에 받아주는 곳이 없는 법인데, 동화중학교 교장이 독립운동가 전홍표라서 가능했던 것이다.

 

▲ 동화학교 터 전경의 모습


전홍표(1869~1929)야 말로 김원봉에게 어릴때 독립애국사상을 고취시켜준 사상적 멘토가 되어준 분으로 학생들에게 항상 우리가 목숨이 있는 동안은 강도 일본과의 투쟁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투철한 배일사상을 교육시켰다고 한다. 김원봉 이외에도 최수봉, 윤세주, 김상윤, 김소지, 박소종, 정동찬 등이 전홍표로부터 감화를 받고 국내외에서 독립투쟁전선에서 활동한 대표적 항일투사 들이다.

 


그래서 일제는 전홍표를 위험인물로 지목하고는 그가 운영하던 동화중학교를 재단법인이 아니라는 허위맹랑한 이유로 폐쇄를 명한다. 이에 김원봉은 재단법인이 아니라는 이유이니까 돈만 있으면 학교를 다시 열 수 있지 않을까 판단해서 어린 나이에 직접 돈을 모으러 다닌다. 결국에는 80원이라는 거금을 모아서 전홍표에게 전달하는데, 전홍표는 어린 제자에게 80원으로는 재단을 만들 수도 없고 설사 만든다고 하더라도 왜놈들과 싸우는 교육을 하다보면 어차피 학교는 다시 폐쇄될 것이다며 거절한다. 일제가 학교를 폐쇄시킨 이유가 딴 데 있었는데 순진한 열혈남아 였던 것이다.

 


동화중학교가 폐쇄가 되자, 아버지는 고모부인 황상규(1890~1931)에게 보낸다. 황상규는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한 독립운동가로서, 유명한 일화 하나.. 동양척식주식회사(우리나라 토지를 몰수해서 우리나라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만든 기관)에서 일하던 사람을 설득해서 창녕군의 1년치 소작료를 전부 독립운동자금으로 기부토록 만들기도 했고, 밀양폭탄사건(1920)이라는 무장항쟁에 연루되어 검거되는데, 엄청난 고문을 당했음에도 끝까지 자백하지 않아서 일본경찰이 백지로 황상규를 기소한 일화도 있다고 한다.

 

▲ 해방후 국내에 들어온 김원봉은 전국 순회연설에 나섰는데, 그 중에서도 고향인 밀양에서의 반응은 아주 각별했다. 밀양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김원봉은 표충사에 들른다. 어린 시절 병법을 공부하며 독립운동의 꿈을 키웠던 곳, 27년만에 돌아온 이곳에서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한 부푼 꿈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시 마산에서 창신학교를 운영중이었던 황상규에게 김원봉을 보내려고 했으나, 황상규가 이왕이면 큰 물에서 놀게 해줘라고 해서 경성으로 보내게 된다. 경성에는 김원봉의 이모할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그기서 신학문을 배워오도록 한 것이었다. 이모할머니는 돈이 엄청 많아서 너무 큰 집에서 종을 부리면서 떵떵거리면서 잘살고 있었는데, 반골기질이 있는 김원봉은 백성들은 핍박받고 굶주리고 있는데 딴나라 사람이라는 생각에 짜증이 확나서 그냥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온 김원봉은 생가에서 50리 떨어진 표충사로 들어가서 삼국지, 육도삼략, 손자병법 등을 읽기 시작했다. 나라를 구할려면 힘이 있어야 하고, 힘이 있으려면 전법을 알아야 한다고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주목할만한 것은 지역적인 특색이라는게 있는 것이다. 밀양에서 왜 독립투사가 많이 나왔겠는가? 예전에는 통신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지역사람들끼리 네트워크가 활발했고, 그러다보니 그 지역민끼리 재교육하고 재교육하고 전해듣고 전해듣고 하면서 그 지역의 정서라는 것이 베여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김원봉 역시 어릴때부터 김종직과 사명대사 유정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며 그런 얼이 깃든 표충사에서 공부를 하면서 항일투쟁에 대한 신념을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거다.

 

  복식사 부분 터를 다진 역사화가 이여성의 <조선복식고>(좌, 1947)와 남쪽 출판사 '민속원'에서 2008년 재출간된 같은 서적. 가운데 사진은 <조선복식고>에 수록된 사진으로 이여성의 고증에 의해 제작된 상고시대 여성의 의상으로 이화여전 학생에게 입혀 촬영했다고 한다.


절에서 나와 상경하여 중앙학교 2학년에 편입되었는데, 당시 중앙학교는 김성수(친일파,1891~1955)가 인수한 뒤에 교장은 유근(1851~1921)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학교에서 김원봉은 평생의 동지 두 사람을 만난다. 바로 김두전(1892~1964)과 이명건(1901~?)이다. 호로 쓰면 김약수(若水;물과 같이)와 이여성(如星;별과 같이)이다. 이국 땅에서도 조국을 잊지말라는 뜻으로 약산의 고모부인 황상규가 김원봉(若山;산과 같이)과 함께 셋이 중국으로 떠나기 직전 지어준 호이다.

 

 ▲ 제헌의회 국회부의장 신분으로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체포된 김약수의 기사(1949.6.25)


두 사람의 독립운동가 이명건과 김두전이 왜 우리나라에 안 알려졌나하면 이 두사람 모두 월북한 사람들이다. 이명건(이여성)은 독립운동가이고 미술가였다. 동생이 이쾌대(1913∼1965)로 굉장한 미술가이다. 한국이 낳은 천재 리얼리즘가로 2014년에 우리나라에서 이쾌대 전이 한번 열렸었다고 한다. 이쾌대 그림은 굉장히 비싸게 팔린다고 한다.

김두전(김약수)는 왜 월북했냐면 반민특위 활동을 하였는데 이승만이가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집어넣어버리자 구속된 찰라에 전쟁이 터져 북한군이 와서 풀어줘서 그래서 월북한 것이다. 자의에 의한 월북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되어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 부산 기장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평생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후 연안파와 함께 북한으로 가서 초대 수령을 역임했다. 6·25전쟁시 모택동은 김두봉을 믿고 30만 대군을 한국에 내려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동란후 소련파 김일성에 의해 실각당하고 급기야 협동농장에서 노동자로 사망하였다. 남이나 북이나 독립과 통일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사람들은 권력찬탈자에 의해 떼거지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근대 한국사의 비극이다. 남에서 초대대통령이 이승만이 아닌 여운형이나 김구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처럼, 북에서 김두봉이 계속 정권을 잡았으면 우리의 남북관계와 민족통일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1기 졸업생 중에 천재가 있었으니 전학년 전과목을 만점 받았던 김두봉(1889~1960)이다. 북한 권력에서 최고권력까지 올라간 인물로, 1889년 부산 기장읍 출생으로 배재대 재학중 반일 비밀단체 대동청년당으로 활동하다 적발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이후에 최남선의 조선광문회에서 주시경을 도와 최초의 우리말사전 <말모이> 편찬사업에도 종사했다.

1935년 김원봉과 함께 조선인민혁명당을 결성하고 이때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인민혁명당 내에서 김원봉계와 지청천계의 내분으로 지청천이 제명되어 따로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지만, 김두봉은 내분에 관여하지 않고 중앙위원으로 남아 군관학교 졸업생을 각지에 파견하고 중국측 항일전에 합류하였다. 김두봉의 길 역시 김원봉의 길처럼 이데올로기적 싸움을 하고싶어하지 않했다. 오로지 항일투쟁에만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