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보보드니(러시아어: Свобо?дный)는 한국어로 자유라는 뜻이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알렉세예프스크였다가, 이후에 스보보드니로 바뀌었고, 한국인들은 의역을 하여 자유시로 불렀다.
자유시 사변, 흑하사변(黑河事變)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27일에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이만시, 알렉세예프스크, 스보보드니)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1] 레닌의 적군(Red Army)이 대한독립군단 소속의 조선 독립군들을 포위, 대부분이 사상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강제노역소로 끌려간 사건이다. 조선의 분산된 독립군들이 모두 집결하였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의 독립군 세력이 모두 괴멸된 사건이다.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불상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스보보드니(러시아어: Свобо?дный)는 한국어로 자유라는 뜻이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알렉세예프스크였다가, 이후에 스보보드니로 바뀌었고, 한국인들은 의역을 하여 자유시로 불렀다.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분하에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 따라서 한국독립군들은 이동 중에 미산에서 독립군을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으며, 독립군은 연해주의 이만(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과 자유대대의 오하묵등은 자유시에 군대주둔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지휘권을 둘러싸고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가 대립했다.
이사건으로 독립군은 대부분이 상하이파(이동휘) 공산당으로 들어갔다.
1921년 6월 27일 갈란다라시윌린은 사할린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했다.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 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사할린의용대가 불응하자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자유시사변은 사할린의용군이 볼셰비키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전투 끝에 전사자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의용대는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다른 견해에서는, 소련 영내의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은 적군(소련군)과 백군(반혁명군)의 내전에서 적군을 도왔는데, 이것은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이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
[비극의 내력]
* 1918년
(1) 11월 11일 -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남
(2) 시베리아에 출동해서 구 제정-러시아의 백군과 협력하여 레닌의 적군과 싸우던 미국과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그 외의 연합군이 철수함
(3) 일본 국회가 러시아에서 일본군을 철수하기로 결의
* 1919년 3월 1일 - 3·1 운동
(1) 일본은 소련의 붉은 혁명을 일본에 수출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레닌과 화친조약을 맺음
(2)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만주에 있는 조선 항일 무력단체들을 토벌하기로 함
(3) 일본군 19사단은 북간도의 북로군정서군을 공격.
* 1920년
(1) 6월 - 봉오동 전투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이 중국 지린성 허룽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과 싸워 크게 이김. (2) 10월 21일 -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침. 일본군 21사단은 남쪽의 서로군정서군을 공격.
(3) 연이어 대패한 일본군은 만주에 있는 한국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 개시함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로 인해 독립군은 전략상 부득이 노령(露領)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동중 밀산(密山)에서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하여 새로운 대한독립군단을 탄생시킴. 병력은 약 3,500명 정도
(4) 대한독립군단이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로 진입. 분산된 모든 독립군들을 자유시로 불러모음
* 수많은 부대가 총집결한 대한독립군단 내부에 군권장악과 관련한 권력투쟁이 발생함
** 1921년 6월 27일
- 레닌의 적군이 대한독립군단의 소수파와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공격함. 자유시 참변 발생. 탈출한 사람은 드물고, 분산되었던 조선의 독립군들이 모두 모여서 3500명의 대규모 부대를 이루었다가 레닌의 적군에 모두 사살되거나 부상당하거나 강제노역소로 끌려감. 적군의 총부리에 몰려 만주로 넘어가기 위해 깊은 제나강을 건너던 수많은 젊은 독립군들은 모두가 제나강에 빠져 죽었다. 우리의 손으로 이룰 대한독립이 사라져간 비참한 사건이었다.
조선의 독립군 세력이 거의 모두 와해되버렸으니 ....
이후로 조선 독립군 운동이 막을 내렸다고해도 과언은 아닌것이다. 오호애재여 ~.....
김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 라는 걸출한 이론가가 살아 있었더라면......
레닌이 아시워했던 1921년 자유시 참변, 그리고 일본과 타협하기위해 벌렸던 1936년 조선인 전체 스탈린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정책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리던 독립군과 그 기반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참조 자료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8j2448a 자유시 참변 - 1 제나강의 애사(哀史)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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