精神을 건강하게/삶의 역사

로자 룩셈부르크와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보나

하늘벗삼아 2012. 8. 1. 10:54



로자 룩셈부르크와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보나


독일에 로자 룩셈부르크(1871.3.5~1919.1.15)가 있다면, 한국에는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1885.2.22~1918.9.16)가 있다.

 

 

독일정치이론가이며 사회주의자로자 룩셈부르크(왼쪽 사진)가 폴란드 출생의, 철학자 또는 혁명가라면,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연해주 출생의 한국인으로서, 러시아 사회주의 노동당 극동 조직의 비서와 외무위원이라는 중책을 맡아 활동한 혁명가이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나중에 창설된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의 이론가였다면,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한국인이 조직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정당인 한인사회당의 실제적인 설립 주체인 동시에 이동휘와 더불어 사회주의 항일투쟁의 쌍두마차였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신문 <적기 赤旗>를 창간했고, 나중에 독일공산당(KPD)이 된 마르크스주의자 혁명그룹 스파르타쿠스단을 조직하여 19191월에 베를린에서 볼셰비키혁명을 기도하다가 실패하여, 우익 의용군과 잔류 왕당파 군대에 체포되어 참혹하게 살해되었다면,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왼쪽 사진)는 1918년 초 하바로프스크의 공산당 조직의 책임비서이자 회계 및 외무위원이라는 중책을 맡아 볼셰비키 혁명과업을 수행 중, 혁명을 반대하는 러시아 제정파의 백위군과 일본군의 침공을 받아 , 피신하다가 아무르강에서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마침내 총살을 당했다.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가 조국 광복투쟁의 방편으로 러시아 공산당원이 되어 볼셰비키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장지락(1905~1938 : 님 웨일즈의 논픽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은 조국 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의 방편으로서 중국 공산당원이 되어 모택동, 주은래, 주덕, 진과부 등과 함께 대장정을 함께 한 중국공산혁명의 주역이었다.

 

광복 후 이들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의 투쟁 행적은, 신생 대한민국의 친미 반공 정권에 의해 의도적으로 감추어지고 외면되어 왔지만, 역사의 진실은 은폐한다고 해서 은폐되는 것이 아닌 법, 마침내 장지락은 2005년에,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2009년에 각각 그들의 조국 광복투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그들이 공산당원이었지만, 조국광복투쟁의 방편으로서 택한 러시아와 중국 공산혁명 참여였고, 그 방편을 통한 뚜렷한 조국광복투쟁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결과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한인 여성 공산주의자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1885222일 연해주 시넬니코프 마을에서 태어,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아버지의 러시아 친구인 M. I. 스탄게비치의 손에서 양육되었다. 김 알렉산드라는 김나지야(러시아 학제의 인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면서M. I.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 1908년에 아들 뱌체슬라프가 태어났지만 술에 찌들어 지내는 남편과 이혼하고, 1914 우랄로 이주하여 강제동원된 중국인, 인 등이 함께 일하고 있는 목재가공장에서 통역원으로 일했다.

시기에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혁명에 적극 가담하여 러시아 사회주의 노동당 예카테린부르그(현 스베르들로프스크) 위원회와 연대투쟁하여 짜르의 목재가공장에 강제동원된 중국과 한국의 노동자들 5천 여 명을 해방시키는 최초의 노동투쟁을 성공시켰다. 

이로써 당의 인정을 받고,  1917년 초 7월에 당의 명령에 따라 극동으로 돌아와서 전쟁포로와 한인, 중국인에 대한 선전선동사업을 열정적으로 펼치는 한편, 당시 하바로프스크에 있던 독립운동가 이동휘(후일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역임)와 더불어 조국광복투쟁을 위한 항일투쟁을 주도적으로 전개했다.

김 알렉산드라는 1917105, 블라디보스톡에서 개최된 러시아 사회주의 노동당 극동지역 회의에 대표단으로 참석할 만큼, 러시아 혁명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볼셰비키 혁명을 반대하는 제정파의 러시아군대와 일본군의 토벌공격을 받아 혁명동지들과 피신하다가 아무르강에서 체포되어, 1918916일 새벽 4, 일명 ‘죽음의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현재 ‘죽음의 골짜기’에는 김 알렉산드라와 동료 볼쉐비키 당원들을 기리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으며, 김 알렉산드라가 일했던 건물에는 10월 혁명 5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판과 얼굴형상이 붙여져 있다.

 

당시 상해에서 간행된 <독립신문> 1920417일자는 김 알렉산드라, 혁명사상으론 대한여자(大韓女子)향도관(嚮導官), 사회주의로는 대한여자의 선봉장, 자유정신으론 대한여자의 고문관(顧聞官), 해방투쟁으론 대한여자의 사표자(師表者) "라고 극찬하며, 20, 22일까지 그녀의 생애를 연재로 소개했다.

또 스스로 항일독립투쟁의 노병이라고 칭했던 대한신민단의 김규면 선생은 자신의 비망록(현 러시아공화국 극동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 국한문 혼용체 문서)에서 아래와 같이 김 알렉산드라를 높히 평가하고 있다.

김 알렉드라뜨브나는 가장 열렬하고, 민활한 정치 수완이 있는 혁명자이었다. 동무는 일즉히 우랄 베림 나제쓰진스크 공장에서 자본가들과 투쟁하여 결국은 그 노동자들을 적위군부대에 동원시키었다. 동무는 4월 혁명의 참여자이다.

알렉싼드라 김여사는 북조선 경흥의 김두세의 딸이다. 한인사회당 창조자이고, 쏘비에트 원동 고려인 적위군 창건자이고, 볼쉐비크 레닌당원으로 고려인에 첫 사람이고, 공산주의의 고려혁명자의 첫 수령이고, 붉은 주권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당한 자로도 고려인에 첫 사람이고, 원동 변강 소비에뜨 정부 외교부 위원으로도 첫 사람이었다.

알렉산드라 김여사 동무는 최후 마지막 시각까지 태연한 기색으로 서서 불덩이 같은 의분을 토하면서 적을 꾸짖었다. 나는 볼쉐비크인 고려혁명자이다라고, 공산주의만세를 부르면서 적의 총탄을 받었다. 김 알렉싼드라는 쏘비에트 혁명력사와 고려혁명력사에 영원히 빛날 페이지를 자랑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 알렉산드라가 활동했던 하바로브스크시 맑스 거리 22번지에는 오늘날 그녀의 얼굴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고, “1917-18년 이 건물에서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 김(스딴께비치)이 일했다. 그녀는 볼셰비키당 시위원회 사무국원이며 하바로브스크시 소비에뜨 외무위원이기도 했다. 1918년 그녀는 영웅적으로 죽었다." 기록되어 있다.



김 알렉산드라는 19182월에 리동휘, 김립, 박애, 리한영, 오와실리, 유쓰쩨빤, 박원섭 등 볼셰비키 혁명 찬동자 수십인의 발기로서 소작농민, 비고용농군, 노동자를 망라하여 "한인협회"를 조직하였다.

이 한인협회의 주장은 “원동소비에뜨 주권 확립과 볼쉐비주의를 따라 갈 것과 고려 독립운동을 사회주의의 길로 촉진시킬 것을 과업으로 정하고, 원동해방운동을 고려해방운동의 전제 조건으로 삼아 적위군 지원부대를 조직한다.” 였다.

러나 당시 연해주의 원동의 러시아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고려인 농민들 마저도 이들의 혁명활동을 가소롭게, 또는 가증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런 동포들의 싸늘한 반응에 대응하여 김 알렉산드라는 4월에 한인협회 위원회 확대 회의를 열어, 한인협회의 기초와 주장에 근거하여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한인사회당은 조직, 선전, 군사 3부를 설치하고 당원 모집, 지부조직, 주의선전, 지원군 적위부대 편성에 진력하였다.


다음은 1963925일에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안지쟌시에 살고 있는 이인섭이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보나 회상록>의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이인섭김 알렉산드라를 따라 볼셰비키혁명에 참여했던 항일독립투쟁가이자 김 알렉산드라의 최측근 동지였다.


-이 여성은 자기 인민의 조국의 믿을 만한 딸, 맑스-레닌과 혁명주의 투쟁의 길에 나선 최초의 동방 여성이었고, 세가지 혁명에 참여했었다. 이 분은 한국 농부의 가정에서 1885222일에 극동의 연해주 니콜스크-우스리스크, 뽀끄로브스크구 시네니꼬프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극동철 건설장에서 통역의 일을 했던 아버지 김뽀도르와 중국, 한국, 러시아 노동자들 사이에서 자랐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그녀는 중국어를 잘했다. 그녀는 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어 교원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영어, 불어, 일어를 배웠다.

1905년 러시아 혁명때 그녀는 블라지보스또크에서 러시아 볼세비키와 함께 활동하였으며, 바로 그때 시내 혁명지도자들이 체포되었을 때, 그녀는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19141차 세계대전 당시 짜르 당국이 우랄 산맥에서 벌목장에서 일할 한국인들을 모집하였다. 그들 중에 김 알렉산드라는 통역으로 일하였다. 19172월 혁명때 그녀는 강제 모집된 한국, 중국 노동자들 중에서 우랄노동자동맹이라는 볼세비키 조직을 만들었다. 이 동맹은 소비에뜨 정권을 쟁취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맨세비키에 대항하여 투쟁하였고, 투쟁시 벌목장 등에서 5,000명이상의 한국, 중국 노동자를 해방시켰다. 네브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극동 위원회 위원장이 회상하는데 볼세비키 제2차 극동회의가 블라지보스또크에서 105일부터 18일까지 개최되었다. 대표자 중 김 알렉산드라도 있었다고 한다.

19171213일에 하바로브스크를 장악하였다. 도시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김알렉산드라는 3명의 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고, 그녀는 외무부장이었고 동시에 러시아 사회 민주노동당 시위원회 책임비서였다. 시 위원회 지방 관리위원회에서는 아무도 시 위원회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바로브스크 시 위원회에 그녀는 집행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김 알렉산드라는 외세들의 공격 때 백계 장군 깔 꼬프의 앞잡이에게 야만적으로 학살되었다.

19183월에 한인사회당이라는 볼세비키 당이 하바로브스크에서 조직되었다. 연해주에서 국내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김 알렉산드라는 영어, 불어, 중국어, 한어로 외세를 반대하는 삐라를 써서 보급했고, 룬은 소비에뜨 조국을 옹호하는 데 목숨을 바쳐 달라고 노동자들에게 호소했다. 그녀는 극동인민위원회 외무부 부장으로서 중국, 한국, 헝가리, 체코 등의 민족으로서 구성된 국제부대를 형성하는데 직접 참가했으며, 이 부대를 전선으로 파견했다.

19189월 초에 하바로브스크로부터 아무르주 쪽으로 선박으로 철수할 때, 그녀는 포로가 되었다. 김 알렉산드라를 잡은 그들은 그녀를 깔 꼬프에게 넘기었다. 아무르강 가의 숲에서 그녀는 열성 혁명가들과 함께 1918925일에 총살당했다. 총살 당하기 전 그녀는 감옥에서 한국 사람들이 러시아 볼세비키들과 긴밀하게 접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녀는 이것만이 조선 해방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투옥 기간 동안에도 그녀는 한국인들을 위한 군사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총살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자존심을 지켰고, 우리를 고무시켰고, 우리에게 신선한 힘을 주었다. 미국, 영국, 일본 강점자들이 소비에뜨 극동을 점령했는데 그 점령은 임시적인 것이다. 소비에뜨 인민들은 레닌의 지도하에 그 더러운 힘을 악력을 벗어 버리고 유일한 주인이 될 것이다. 조선의 미래도 꼭 같다.

그녀는 재판소를 자신의 혁명선전의 연단으로 만들었다. 김 알렉산드라는, “나는 공산주의자다, 민족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했고, 나는 조선 혁명가이며, 조선 인민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해서 러시아 볼세비키들과 함께 해방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지금도 우리는 소련의 해방을 위하여 싸울 것이다. 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죽을 때 붕대를 치워 버리고 내 자신의 죽음의 장소를 선택하겠다고 하고 천천히 깊은 생각을 하면서 바위쪽으로 13보를 걸어 나갔다.

사랑하는 나의 동지들 , 남녀노소들이여. 오늘의 우리의 적들이 많은 애국자들과 친구들과 나의 삶을 빼앗아 가고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 이념은 빼앗을 수 없다. 우리가 싸웠던 사업은 승리할 것이다. 내가 13보를 걸은 것은 조선이 13도였음을 의미한다. 한국의 각 도에서 공산주의의 씨가 훌륭한 꽃으로 펴라. 한국의 룬은이들, 이꽃을 손에 들고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라. 이 해방은 너희들의 자랑의 대상이 될 것이다. 여러분! 우리의 후배들이 조선을 다 해방시키고 사회주의가 건설되는 것을 볼 것이다. 볼세비키여 영광스러워라!“

총소리가 나고 그 녀의 몸이 바위에서 뚝 떨어졌다. 강물 속에서 그녀의 소리가 없어졌다. 이 사건이 있은 후 하바로브스크 시민들은 아무르강 유역에서 오랫동안 낚시를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학살 당한 후에 한인사회당 중앙위원회 성원들인 이동휘, 김립 등이 그녀의 사업을 계승하였고, 조선 빨지산 부대들을 조직하고 운영하였다. 1919년에 박진순을 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모스끄바의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파견하였다. 그후 한인사회당 위원들이 연해주로부터 상해로 갔고, 상해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1920년 코민테른의 지도자인 보이띤스키의 지도하에 고려공산당으로 개칭되었다.

1921년에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인 이동휘가 모스끄바로 갔는데 레닌의 접견을 받았다. 1922년 말에 베르흐네우진스키시에서 이동휘의 지도하에 한국공산당 대회가 열렸다. 시베리아에서는 김 알렉산드라의 동지인 안용학, 이인섭 외에 다른 동료들이 국내전쟁 동안에 5차 붉은 군대 직속 빨지산 부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 빨지산 부대는 국제부대로 되었고, 그 빨지산 부대의 조선연대는 공산주의 연대라고 불리웠다. 안용학 동지는 그 때 중국 근로자들의 대표로서 코민테른 2차 대회에 참여했다. 김 알렉산드라가 학살된 후 그의 동료들은 극동의 완전한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러시아 빨지산 부대와 함께 소비에뜨 정권을 위하여 싸웠다.

극동주 해방후 하바로브스크 향토박물관에서는 김 알렉산드라에 대한 전시관을 만들었다. 그 전시관에 그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소책자-한국말로 된 한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그녀에 관한-가 있었고, 한국 빨지산들이 소비에뜨 정권을 위해 참가했다는 자료와 사진도 있었다. 그전에 붉은 빨지산들은 러시아동지들과 함께 평등하게 소비에뜨 기관들과 단체에서 일을 했다. 한국 근로자들은 우리나라 사회주의 건설에도 참여했고 평화롭게 살았다. 스탈린의 개인 숭배시기에는 이전의 빨지산 부대원들은 체포되었고, 김 알렉산드라의 전시관도 폐쇄되었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에 열린 1956러시아 공산당 20차 전당대회에서 고려공산당이 러시아 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공적이 다시금 공인되면서부터 김 알렉산드라에 대한 시와 글 등이 북한 및 러시아의 신문 잡지 등에 게제되었고, 그 초상화가 북한 평양시 중앙혁명 박물관에 걸렸.

한국인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 중앙아시아 카자크스탄 공화국 수도 알마아타시에 있는 조선극장에도 홍범도의 초상화와 함께 그녀의 초상화가 걸려 있으며,  지금도 그녀의 생애와 투쟁에 대한 연극이 공연되고,  혁명동지들의 회고록과 아들의 자서전, 그리고 그여를 기리는 시와 소설 등도 다수 간행될 정도로 그녀는 한국인 여성 혁명가로서 재소한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