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역사발전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토된 문물 중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바로 곽말약(郭沫若) 동지가 주장한 것이다. 서적상의 기록은 완전히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또 어떤 것은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역사서는 그대로 믿을 수 없는 2차 자료일 뿐이다.
<출처 : 이경일 저 ‘다시 보는 주은래‘>
이경일씨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주은래가 중국 지도자로서 매우 하기 어려운 말을 과감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즉 유적으로 남아 있는 문물(文物)에 의한 증명을 강조하면서 문물을 통해서는 사실 증명이 가능하지만 역사기록은 거짓꾸밀 수도 있다고 지적한 것은, 바로 그 무렵 이미 중국 사학계에서 시작되고 있던 동북공정을 꾸짖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주은래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초대 수상으로서 27년 동안이나 재임하면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국인 특유의 중화사상에서 비롯되는 패권주의(覇權主義)를 공개적으로 배척했고, 이른바 당시 “제3세계” 라고 불리웠던 아시아, 아프리카의 후진국들과 성의 있는 외교를 펼치면서, 중국이 강대국처럼 거드름피우는 것을 스스로 경계했고, 외교관료들에게도 그런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하라고 독려했다.
특히, 주은래의 어록 가운데 “한(漢) 나라가 조선반도에 속령을 두었다 라는 가설을 정설로 만들기 위해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라는 대목은, 중국의 사학계는 물론 아직까지도 일제 식민사학의 망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사학계도 꾸짖는 말이어서 주목을 끈다.
지금도 이병도의 충실한 제자들로 형성된 한국의 주류사학계에서는 중국과 한국의 고대사에 등장하는 패수(浿水)를 대동강이라고 하는 주장이 대세이지만, , 주은래 수상은 이미 반세기 전에 고대 중국의 지리서인 <수경주(水經注)>에 “패수는 하북에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간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명시하면서 당시 중국역사학계가 추진하기 시작한 동북공정의 무리수를 비판했다.
이와 같이 이미 반세기 전에 중국 수상이 중국의 문헌과 유적 문물에 근거하여, 동북공정의 반역사성을 꾸짖고, 진실을 밝혔는데도, 오늘날 한국의 주류 사학자들은 일본이 주입한 ‘식민지 사관’을 고집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뒷받침하고 있다.
주은래 수상은 당시 북한학자들과의 만남에서, 고대사(古代史)에서 두 민족 간의 밀고 밀렸던 관계를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중국의 침략에 대항하여 여러분 나라의 훌륭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고, 이때 중국의 침략에 대항하여 일어난 나라가 발해"라고 했다.
또 그는 “한족(漢族)이 통치한 시기에는 중국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붙여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여러분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야말로 한국사람인 글쓴이가 하고 싶은 말을 반세기 전의 중국수상 주은래가 공개석상에서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주은래 수상은,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거짓꾸밀 수는 없다. 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라는 말로 당시의 면담을 결론지었다.
중국사학계가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동북공정”은, 1935년에 일본학자에 의해 발견된 이후로 세계 제 2차대전이 끝난 후에 발굴을 시작한 중국고고학계에 의해 1954년에 <홍산문화>라고 이름 지어진, 요녕성과 내몽고, 만리장성 일원에 펼쳐져 있는, 국가체계를 완벽하게 갖춘 BC4500~BC2500년의 문명유적을 중국 상고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이다.
중국의 학자들은 황하 중류 위수분지에서 일어난 한족(漢族)의 문화유적인 <황화문명 BC3000년 무렵>을, 동이족의 문화유적인 북신문화-대문구문화-용산문화를 포함한 <산동문화>와 더불어 중국문명의 발상이라고 주장하여 왔지만, 홍산문화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산동문화의 뿌리가 <황하문명>이전의 홍산문명에 있다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홍산문화 유적의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고고학적 분석은 홍산문명의 주인공이 황하문명의 주인공인 한족(漢族)이 아니라 동이족(東夷族)이라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중국사학자들도 홍산문명과 더불어 홍산문화를 이어받은 점이 확실한 <산동문화>의 주인공도 동이족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민족인지 밝히기를 꺼려하고 있다.
전백찬을 비롯한 극히 소수의 양심적인 중국학자들만, 동이(東夷)는 상고시대에 중국에서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던 桓國(한나라)를 세운 韓民族(한겨레)이며, 홍산문화와 산동문화는 이들 동이족의 문화였다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중국의 고문헌에는 홍산문명을 언급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이 기록한 <한단고기>에는 홍산문명시기(신석기 문화)를 천제 환인들의 치세로, 산동문명시기(청동기 문화)를 환웅천황들의 치세로, 역대 통치자들의 실명까지 밝히며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일부 국수주의 재야사학자들은 천제 한님(桓因)의 치세와 천황 한웅(桓熊)의 치세까지를 우리 겨레 역사라고 주장하지만, 글쓴이는 그 주장에 동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한단고기 자체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한검이 한나라를 건국한 BC 2333년 이전의 동북아대륙은 훗날 유라시아 대륙의 여러 나라들을 건국한 부족 또는 씨족들이 각축을 벌이면서도 한나라(桓國)의 울타리 안에서 서로 어울려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고하건데, 홍산문화와 산동문화는 우리 한겨레는 물론 한족(漢族), 몽골겨레, 돌궐겨레 등 당시 동북아 대륙에서 살고 있었던 여러 족속에게도 그들의 선사(先史)문화가 된다고 믿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