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과연 모계사회로 돌아가는가 ?
우리 겨레의 선조들이 동북아대륙을 활동무대로 살았던 고대사회는 모계사회였다. 여자가 시가로 시집을 오지 않고 남자가 처가살이 들어가는 시대였다.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 남자는 본가를 떠난 후로 죽어서도 본가로 돌아올 수 없었고, 씨족간에 전쟁이 나면 처가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어야 했다.
여자에게 온갖 족쇄를 채우는 엄격한 시집살이 풍습은 조선왕조시대에 성리학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왕조 때와 같은 엄격한 여성의 굴레가 없었다.
남편이 대야성 전투에서 전사하여 홀로된 요석공주가 원효대사와 결합하여 설총을 낳은 사실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번 결혼한 여자라 하더라도 남편의 유고로 홀로되면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었다.
심지어 고려의 시가 <쌍화점>을 읽어보면, 당시 고려의 도성 송도의 여인들이 아랍인이 열고 있는 찻집(요즘말로 카페)을 드나들며 바람을 피운 정황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유목생활에서 농경생활로 바뀌어가고 있었던 고대의 우리 선조들은 사실상 모계 중심의 씨족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까닭은 남자는 목축과 농경을 위한 토지를 빼앗거나 빼앗기지 않기 위해 수없이 많은 전쟁에 나서야 했고, 수없이 많은 남자들이 씨족을 지키는 전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우리 겨레의 개국설화를 보아도 모계중심사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하늘에서 내려온 한웅과 곰네의 맏아들인 첫번째 단군 한검은 처가에 장가를 들어 장인의 부왕 노릇을 하다가 그 왕위를 계승하여 “한나라”를 건국했다. 요즘말로 표현하자면 , 장가 한 번 잘 들어 처가를 통째로 집어삼킨 셈이었다.
또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동부여 금와왕의 궁성에서 이미 결혼한 예씨 부인이 있었지만, 단신으로 탈출하여 졸본부여 고무서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가 고무서의 맏딸인 소서노와 혼인을 했는데, 이때 소서노는 전남편 우태와의 소생인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거느린 과부였다. 그러나 소서노는 당시 졸본부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씨족의 어머니였기에, 고립무원의 주몽이 건국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소서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소서노가 갖고 있는 재력과 씨족의 통치력을 기반으로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에게 동부여에서 전처인 예씨부인과 아들 유리가 찾아오자, 소서노는 황후의 자리를 예씨부인에게 넘겨주고,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가산을 정리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를 건국했다. 그런 까닭으로 유학이 뿌리를 내리기 이전까지의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소서노를 “건국의 어머니” 또는 “조상신”으로 제사를 드렸다.
이런 모계사회의 흔적은 주몽 말고도,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석탈해, 가야 시조 김수로,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 등의 설화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들 씨족의 시조들은 모두 아버지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알에서 태어났다거나, 탈해왕처럼 바닷가에 표류하는 상자 안에서 발견되거나, 숲속에 버려진 갓난아이로 설화는 표현하고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아버지의 신분이나 역할이 중요하지 않았던 모계중심사회의 탄생설화인 것이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무려 여섯 명의 황후와 스물세 명의 부인(夫人)들과 정략결혼을 한 까닭도, 실은 당시 신라말기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각지 호족세력의 본바탕인 “안방의 힘”을 왕건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힘으로 묶기 위함이었다. 실로 이들 스물 아홉 명의 황후들로 대표되는 호족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고려라는 나라는 건국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창세신화인 탐라섬 창조여신 설문대할망설화와 지리산 마고할미설화는 어미를 가장(家長)으로 하는 모계중심의 씨족설화인데, 이러한 종족의식은 고려말 남성우위의 성리학이 주류학문으로 자리잡으면서 바뀌기 시작했고, 조선왕조에 이르러 성리학이 나라의 통치 이데오르기로 작용하면서, 거의 완전하게 부계사회로 바뀌게 됐다.
그러한 연유로 우리 겨레의 핏줄 속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선험의식이 흐르고 있다. 그 하나는, 여성이 가문의 실권을 쥐고 흔드는 안방권력문화이고, 다른 하나는 남성이 여성에게 족쇄를 채워 안방에 가두어두는 사랑방권력문화다.
안방권력문화는 종족간의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고대사회에서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죽어나갈 때 살아남은 여성들이 종족유지를 위해 만들어낸 삶의 방식이고, 사랑방권력문화는 무(武) 보다 문(文)을 중시했던 남성들이 만들어낸 생존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안방권력문화의 위력이 가장 돋보일 때가 바로 전쟁을 치룬 후의 혼란스러운 때다. 위기일수록 여자가 남자보다 강하다는 걸 우리는 수많은 6.25전쟁 미망인들의 강인한 삶에서 볼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이 홀로된 여자의 몸으로 온갖 고생을 다 해가며 자식을 키우고 공부시켜 훌륭하게 키워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성공하여 주류사회의 내노라하는 여성으로 선 이들도 많았다. 이는 우리 한국여성이 가지고 있는 선험의식 가운데 “어미가 가문의 주인”이라는 주체성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과부는 보리가 서 말, 홀아비는 이가 서 말” 이라는 우리 속담이 바로 이 “여성이 가문의 주인”이라는 여성의 잠재의식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요즘들어 인터넷에도 한국사회가 모계사회로 회귀한다며, 우려를 나타내는 글들이 자주 뜨고 있다.
오죽하면, ~~~ 딸 둘에 아들 하나면 금메달/딸만 둘이면 은메달/딸 하나 아들 하나면 동메달/아들만 둘이면 목메달.
아들 둘 둔 엄마는 갈데없는 처량한 노파/딸 둘 둔 엄마는 해외 여행 전문가/딸 하나 둔 엄마는 딸네집 설거지꾼/아들 하나 둔 엄마는 양로원 신세~~~ 라는 우스개 소리가 나돌겠는가 ?
엘리트 집단인 국회와 여당이 야당으로부터 “유신독재의 유물”이라고 지탄을 받고 있는 한 여성정치인에게 접수되고 있는 작금의 한국정치상황은, 총체적 위기를 앞에두고 “가문의 주인으로 선험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는 어미”에게 안기고 싶은 젖먹이때의 본능이 되살아나서일까 ?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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