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센프에서 태어난 그녀는 아버지와 헤어진 가난한 홀어머니 품에서 자라 열 살 때 학교를 그만뒀기에 무용레슨도 못 받았지만, 인적이 없는 숲 속으로 해변으로 뛰어가 나체로 춤을 추었는데 그때 바다와 나무가 그녀와 함께 춤을 추고 있음을 가슴 깊이 느꼈던 감정은 후에 어떤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열정적인 춤을 추게 된 근성이 됐다.
15세때 시카고로 떠났지만 진취적이고 자연스런 그녀의 춤은 발붙일 곳이 없자 1주일만에 뉴욕으로 향한다. 2년간의 뉴욕생활에서도 술집에서 캉캉류의 춤을 추며 목숨을 부지한 삼류무용수 생활에 희망이 없자 1899년 가축수송선을 타고 유럽으로 떠났다.
발레의 고장 러시아는 그녀의 새롭고 진취적인 춤에 충격과 동시에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켜 그녀는 무용학교를 세우게 되고 그녀의 자유로운 사상과 영혼을 춤에 녹여 열정적인 춤을 추며 성공의 가도를 질주해 현대무용의 서막을 열었다.
고전 무용의 틀을 깨고 맨발의 자유로운 춤으로 거리와 무대 위를 나비 같이 날아다니는 던컨의 아름다운 시절 그녀는 사람을 춤추게 하는 것은 영혼과 정신이지 기교가 아니라고 했다.
‘덜 입고 나온 듯한 옷차림’과 맨발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그녀는 짧은 시간 안에 유럽 예술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푸른 눈의 아름다운 남자 에드워드 코든 그레이와의 사이에서 딸 데어도르를 낳았고 미국의 재력가 패리스 싱어(Paris Singer)와의 사이에서 아들 패트릭을 낳았다.
이 아이들이 그녀 인생의 가장 큰 비극으로 자리 잡는다. 꽃이 만발한 4월의 비 내리는 봄날, 던컨은 두 아이 데어도르와 패트릭, 그리고 보모와 함께 운전사가 운전하는 르노 자동차를 타고 거처인 베르사유에서 파리 시내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춤 연습 때문에 지루해할 아이들을 집으로 먼저 돌려보냈는데, 그때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탄 자동차는 센 강을 따라가다 엔진이 꺼졌고 운전사가 차 밖으로 나와 다시 엔진을 걸었을 때 차는 강둑의 경사면으로 미끄러져 물속으로 곤두박질쳐버렸다. 차를 강에서 꺼냈을 땐 사고가 난 지 한 시간 반이나 지난 뒤였고, 아이들은 보모에게 매달린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이들이 죽은 뒤 1914년 던컨은 러시아로 떠났다.
1921년 모스크바 한 파티장, 늦게나마 막 도착한 던컨은 의자에 앉아마자 한 청년에게 손짓을 한다. 앞에 온 청년의 금발의 곱슬머리를 만지며 “머리가 황금색이야!”라며 청년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며 “천사로군! 아니 악마 같으니!”라고 혼잣말 하면서 다시 키스를 했다.
그 금발의 청년이 예세닌 이였다. 44세의 던컨은 27살의 금발의 청년에게서 비명한 아들을 떠올렸고, 그렇게 만난 세기의 무용수와 천재 시인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들었다.
서로 다른 세대와 다른 인생관과 다른 이념을 뛰어넘은 사랑은 불꽃사랑이 망가져 불행에 이르는 길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라도 하듯 결혼에서 이별까지 3년이란 시간으로 숨가뿐 막을 내린다.
던컨은 예세닌을 만난 이후 단 하루도 평화로운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그가 대단한 천재일 뿐 아니라 대단한 미치광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엄청난 고통과 대가를 치러야 했다.
던컨은 예세닌을 처음 본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금빛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처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어. 그는 어린 패트릭의 모습이었어. 패트릭이 성장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데 어떻게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겠어?”라고.
그녀는 유럽 여행을 위한 세관 신고 때문에 예세닌과 혼인 신고를 하게 되었는데, 50세 가까운 나이를 38세로 속였다. 그들의 15개월에 걸친 신혼여행은 악몽 그 자체였다.
예세닌은 술에 취하면 던컨을 더러운 늙은 암캐라고 불렀고, 뛰쳐나갈 때까지 폭행했으며, 호텔 기물이 산산조각 날 정도로 파괴했다. 그는 신경쇠약, 알코올 중독, 간질에 시달렸고 광적으로 돈, 반지, 시계, 술, 신발, 모자, 실크 셔츠, 손수건, 스카프에 탐닉했다.
던컨이 각 도시의 박물관이나 콘서트에 데려갈 때마다 예세닌은 모든 양복점 앞에 멈춰 서서 맘에 드는 물건은 무엇이든지 바로 사버리곤 했는데, 던컨은 푸른색 정장에 심홍색 넥타이, 흰색 부츠를 신은 예세닌을 옆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금발의 천사가 바로 제 남편이랍니다” 평생에 걸쳐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추한 것을 추방해야 한다고 했던 그녀에게 예세닌과의 삶은 추함 그 자체였다.
예세닌과 함께 떠난 미국 순회 공연은 술과 연습 부족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선 그녀의 종말을 더욱 재촉했다. 게다가 공연 도중에 나체에 가깝게 흘러내린 의상 때문에 그녀는 공산주의자, 매춘부, 천박한 댄서 등으로 미국 언론에 묘사되었다.
그때 던컨은 이렇게 반박했다. “왜 내 몸의 일부가 노출되는 것을 조심해야 하지요? 그것이 무엇인가를 상징한다면 그것은 여성의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며 청교도주의의 속박과 편협한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신체를 숨기는 것이 외설적인 것입니다. 내 몸은 내 예술의 성전입니다.”
1925.12.21일 모스크바 정신병원에서 갓 퇴원한 예세닌은 24일 생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 3년 전 던컨과 신혼을 즐겼던 앙글르테르호텔에 투숙 하고 27일엔 잉크가 없자 손목을 칼로 그어 흐르는 피로 시<잘 있거라>를 쓴다. 그리곤 다음날 창문에 목을 맨다.
“잘 있거라,
나의 벗이여, 잘 있거라
사랑스러운 벗이여, 너는 나의 가슴속에 있다
운명적인 이별은 내일의 만남을 약속한다.
잘 있거라, 나의 벗이여,
손도 못 잡고 말없는 이별이지만
한탄하지 말고 슬퍼하지 말라, 눈살을 찌푸리고-
인생에서 죽는다는 건 새로울 게 없다
하지만 산다는 것도 물론 새로울 게 없다.”
-<잘 있거라>-
던컨은 니스로 거처를 옮기고 좌우명을 ‘무한하게’로 바꿨다. 이 말은 한때 전 세계적으로 유명했으나 이제는 술 한 병 살 수 없는 가난뱅이 전직 무용수로 고독하게 죽어가는 것만은 혐오한다는 그녀 식의 선언이었다.
지난 어느날 던컨은 에세닌의 양복주머니에서 묵직한 봉투 하나가 마루에 떨어지는 걸 보게되는데 봉투 속엔 에세닌이 던컨 몰래 고향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내려고 숨겨 두었던 돈 이였다. 예세닌은 기혼자였다.
위선에 찬 자본주의를 경멸했고 자연스러운 신체 동작을 숭배하며, 예술 세계가 잃어버린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거침없이 관습에 도전했으며, 소리와 빛처럼 만질 수 없는 자유스러운 춤을 추었던 던컨의 명예는 추문과 비극에도 결코 손상될 수 없었다.
2년 후인 1927.12.14일 밤8시 니스, 이탈리아 청년 팔체토가 지붕 없는 스포츠카 부가티를 몰고 던컨 집 앞에 도착했다. 새로운 사랑을 맞이하듯 던컨이 차에 오르자 청년은 문을 닫고 시동을 걸었다.
던컨은 세찬 바람에 빨간색의 긴 스카프를 목에 단단히 두르고 “안녕, 영광을 향해 떠나요!”라고 외첬다. 청년이 엑셀레이터를 밟자 던컨의 목이 뒤로 꺾였다. 스카프가 바람에 날려 부가티 뒷바퀴 회전축에 걸렸던 것이다.
던컨이 늘 했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내 영혼이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가 될 때까지 지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