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 - 김수영(金洙暎)
비가 그친 후 어느날-----
나의 방안에 설움이 충만되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고가는 것이 직선으로 혹은
대각선으로 맞닥드리는 것같은 속에서
나의 설움은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찾아갔다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아 그러나 지금 이 방안에는
오직 시간만이 있지
않으냐
흐르는 시간 속에 이를테면 푸른옷이 걸리고 그 위에
반짝이는 별같이 흰 단추가 달려있고
가만히 앉아있어도
자꾸 뻐근하여만가는 목을 돌려
시간과 함께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것
그것은 혹시 한자루의 부채
-----그러나 그것은 보일락말락
나의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것-----
하나의 가냘픈 물체에 도저히 고정될 수 없는
나의 눈이며 나의 정신이며
이
밤이 기다리는 고요한 사상마저
나는 초연히 이것을 시간 위에 얹고
어려운 몇고비를 넘어가는 기술을 알고있나니
누구의
생활도 아닌 이것은 확실한 나의 생활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
빈 방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앉아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보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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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金洙暎)
/ 1921~1968
시인. 서울에서 출생. 선린상고를 거쳐 도일, 도쿄 상대에 입학했으나 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했다가 1944년에 만주로 이주하였다. 그 곳에서 교원 생활을 하는 한편, 연극 운동도 전개하다가 8.15광복과 함께 귀국, 시작
활동을 하여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였다. 연희대 영문과 4년에 편입했으나 중퇴하고,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함께 합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서 주목을 끌었다. 6.25남침 때에는 미처 피난 하지 못해 의용군에 징집되었다가, 1952년에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풀려 나왔다. 그 후 교편 생활을 하고, 잡지사, 신문사 등에서 근무하였으며, 1956년 이후에는 자택에서 양계를 하면서
시작과 번역에 몰두하였다. 그 무렵을 전후하여 [웃음] [긍지의 날] [여름 뜰] [일] [거리]등에서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경험해야 했던
지성의 방황과 고뇌를 육성으로 노래하였다. 1959년에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간행하여 제 1회 시협상을 받았다. 그 밖에
<20세기 문학의 영역>등의 저서와 역서를 남겼다.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등의 시집과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 <퓨리턴의 초상>등이 사후에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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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絶望) - 김수영(金洙暎)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열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1965.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