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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친일과 친독재 또 하나의 (범죄자)가족 삼성

하늘벗삼아 2012. 11. 28. 00:17


 



 

친일과 친독재, 부패와 노동 탄압으로 얼룩진 삼성의 역사

 

                                                                                *강철*


삼성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강하다. 전체 수출의 22퍼센ㅌ,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23퍼센트, 세수의 8퍼센트를 차지한다. 61개 삼성 계열사의 총자산은 2백9조 6백억 원이고 매출액은 1백39조 원으로 재계1위다.

삼성이 이렇게 거대한 부를 쌓아올릴 수 있었던 것은 이건희의 ‘뛰어난 경영철학’때문이 아니다. 삼성의 ‘신화 창조’는 역대 정권들과의 유착과 부패, 상상을 초월한 노동자 탄압으로 만들어졌다.

삼성의 역사는 부패와 탐욕, 노동자 탄압으로 얼룩져 있다. 친일로 시작해 발빠르게 친미로 변신하고, 이승만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까지 정권과 유착해 온갖 특혜를 받았고, 국가 권력의 도움으로 무노조 경영을 이어 왔다.


친일로 세운 기업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은 1910년 경상남도 선령에서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병철의 집안이 얼마나 부자였던지, 5가구가 넘는 종들을 부리고 있었다. “우리 집 형편은 보통은 살2천 석이요 흉년이면 1천5백 석이었다”(이병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한 이병철이 벌인 첫 사업은 일제 하에서 농민의 쌀을 수탈해 일본으로 보내는 과정에 빌붙는 것이었다. 삼성 창업자의 ‘고상한 철학’은 이미 이때부터 싹을 보이고 있었다.

이병철이 첫 사업의 후보지로 삼음 나산은 경남 일대의 농산물 집산지였다. 일본으로 보내려고 마산에 모이는 쌀을 연간 수백만 석에 달했다.

 

농민들의 시름과 한숨은 깊어갔지만, 이병철은 오로지 돈벌이에만 혈안이 됐다. 돈이 쌓이기 시작하자 김해평야에 나온 땅을 모조리 사들이고 대구와 부산에 주택부지를 사놓는 등 부동산 투기게 열을 올렸다. 삼성의 부동산 투기 역사는 이처럼 뿌리 깊은 것이었다.

 

“이렇게 손쉬운 돈벌이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토지 투자 사업은 순조로웠다. 식산은행의 금고가 마치 나의 금고로 착각될 정도가 되었다. 1년이 지나자 나는 연수 1만섣ㄱ거리, 2백만 평의 대지주가 되어 있었다”<호암자전>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이병철은 식품가게인 ‘삼성 상회’와 양조업을 시작했다. 전쟁이 게속되는 바람에 식품장사와 술장사는 돈 되는 사업이었다. 일제의 도움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브루스 커밍스가 <한국 현대사>에서 묘사했듯이 “이병철은 항상 자신을 ‘ 일본신사’로 여겼고 일본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했다”

이미 대구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된 이병철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부와 특권을 향유했다.

“항상 친구나 양조업자들과 어울려 요정으로 향하는 일이 잦았다. 돈과 시간을 주체 못해 밤마다 새벽1시가 넘어서 귀가하고 아침에는 열시가 넘어서 일어나는 나태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대구의 요정이 싫증이 나면 서울이나 동래 등지로 나들이를 했으며 그래도 마음에차지 으면 일본의 별부나 경도 등지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호암자전>




부정부패와 정경유착


해방 후 이병철의 사업 자금은 “적산”(일본인들이 남긴 재산“과 미국의 원조 자금에서 나왔다. 당시 적산은 국내 총자본금의 91퍼센트나 됐다. 당시 노동자들은 ‘적산을’ 통제해 사회화하려 했지만 이승만은 정권과 결탁한 친일자본가 등에게 ‘적산’을 불하했다.

 

이병철은 친일에서 친미로 발빠르게 변신했고, 그 결과 ‘적산’과 미국의 원조 자금을 끌어들여 축재 기반을 쌓았다.

이병철은 1951년에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한국전쟁이 낳은 물자부족과 물가앙등을 이용해 급속하게 부를 쌓았다. 이 회사는 1952년에 17배나 성장했다.

 

이승만은 이병철에게 제일제당과 제일모직과 같은 옛 일본 기업들을 거의 헐값에 내줬다. 이병철은 이승만에게 막대한 정치 자금을 제공해 이에 보답했다.

홍업은행주 83퍼센트, 조홍은행주 55퍼센트, 상업은행주 50퍼센트를 사들임으로써 전체 시중은행 주식의 50퍼센트를 손아귀에 넣은 이병철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부패한 이승말 일당과 유착해 탐욕을 채워 나갔다.

 

삼성은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에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1960년 4월혁명이 터지자 성난 민중은 부정축재자 이병철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시위대에 발포 명령을 내려 서울에서만 공식 통계로도 1백 명을 학살한 내무부 장관 홍진기는 나중에 이병철과 사돈 관계를 맺게 된다.(전 주미대사,<중앙일보>사장 홍석현이 홍진기의 아들이다.)

 

이병철이 국민의 지탄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가 있던중에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 이후 설립된 부정축재 처리위원회의 조사 결과 이병철이 이승만에게 4억 2천5백만환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이 드러났다. 또, 귀속재산.국유재산.불하 부정액이 5천만 호나, 조세포탈액은 33억 5백만 환에 달했다.

 

박정희 정권은 부정축재자에게 공장을 건설해 그 주식으로 벌과금을 납부하도록 하는 부정축재환수절차법을 공포해 부정축재와 불법정치자금 제공자에게 면죄부를 줬다.

 

1966년에 폭로된 사카린 밀수 사건은 삼성이 얼마나 파렴치한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삼성은 비료공장 건설자재라고 속여 한국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품목만을 골라 밀수입해 엄청난 돈을 벌었다. 암을 유발하는 사카린을 비롯해 표백제, 전화기, 수세식 변기, 욕조에 이르기까지 1만여 가지가 밀수 품목이었다. 밀수 총액을 2천억 원이었다. 당시 사카린 밀수사건을 주도한 이병철의 큰아들 이맹희는 박정희 정권이 1967년 대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밀수에 깊이 관여했다고 실토했다.

훗날 이건희한테서 대선 자금을 받은 김대중도 1966년 9월에 국회에서 이병철의 구속을 주장했다. 11월에는 서울대 학생들이 ‘반(反)밀수재벌 학생투쟁위원회’를 결성해 “민족의 피를 빤 이병철을 즉각 구속하고 민족적 대죄를 진 악덕재벌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요구했다.

 

대중적 분노에 직면한 이병철은 “건설 중인 한국비료를 국가에 바치는 동시에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갔다”고 발표했다. 2005년 X파일 수사가 시작되자 미국으로 도망간 이건희가 이듬해 귀국해 ‘사회헌납’ 운운하며 벌인 8천억 원 돈 잔치는 삼성 일족의 오래된 전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병철은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언론 사업에 손을 댔다. 라디오서울과 동양텔레비전 방송, <중앙일보>를 세워 삼성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심산이었다.

1만 5천 점이 넘는 소장품을 자랑하는 삼성문화재단의 문화재도 정당하게 수집된게 아니다. 1966년 9월,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던 때 석가탑 도굴사건이 발생했다. 도굴범들은 석가탑 외에도 황룡사 초석, 남산사 사적, 통도사 부도 등 13개 사찰과 고적을 파헤쳤다. 도굴품들의 종착역은 이병철의 형 이병각이었다.

 

삼성전자는 삼성과 박정희의 ‘특별한 관계’가 없었더라면 탄생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1968년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은 전자공업의 국내공급량이 이미 넘치고 있으며, 삼성이 들어오면 중소자본이 몰락한다면서 삼성의 전자업종 진출을 반대했다. 정부의 허가 절차도 지지부진했다. 이병철이 몸소 나서 박정희를 만난 후 ‘전자공업진흥법’이 제정됐다. 이 법에 따르면 “정부는 전자공업의 육성을 위해 재정자금에 의한 전자공업 육성자금을 조성해야 한다.” 정부는 삼성전자 설립을 위해 돈도 주고 공단도 만들어 줬다. 삼성조선과 호텔신라도 “정부의 요청에 의해” 인수되고 설립됐다.

 

삼성과 독재 정권과의 유착을 전두환 정권에서도 계속됐다. 1980년 전두환이 취임 직후 재벌의 문어발 확장을 금지하는 9.27조치를 발표했으나 삼성의 문어발은 계속 늘어났다. 전두환은 고속도로 건설, 차세대 전투기, 반도체, 율곡사업 등의 이권을 삼성에게 줬다. 삼성은 한국전자통신, 조선 호텔등 10여 개 기업을 설립하거나 인수했고 부동산 투기로 ‘삼성왕국’을 넓혀갔다.

전두환 정권 하에서 승승장구하던 이병철은 전두환에게 확실하게 답례했다. 그는 여덟 차례에 걸쳐 무려 2백 20억 원을 전두환 정권에게 헌납했다. 물론 이 자금은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와 학생 들을 탄압하는 비용으로 쓰였다.

이병철은 죽기 직전에도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기는커녕 편법상속을 저질렀다. 1987년 이병철은 치밀한 공작을 꾸며 당시 자산총액 11조원의 그롭을 단돈 1백50억 원의 세금만 물고 이건희한테 넘겼다.

 

1987년에 이병철이 죽자 이건희는 곧바로 회장직을 승계했다. 물론 이건희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것은 회장직만이 아니었다. 정경유착, 부패, 무노조 등 삼성의 ‘경영철학’도 통째로 물려받았다.

이건희는 아버지에 뒤질세라 아홉 차례에 걸쳐 모두 2백 50억 원을 노태우 정권에 헌납했다. 또 199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에게 적어도 1백억 원 이상의 정치자금을 제공했고, 김대중에게는 ‘보험료’로 5억원을 제공했다. 2002년 대선 때는 한나라당에게 3백40억 원, 노무현에게 (공개된 바로만)30억 원, 김종필에게 15억 원을 제공했다.

김용철 변호사가 밝힌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노무현 정부 하에서도 삼성의 비자금은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3줄 요약: 거의 100년 째 이건희 일족이 우리 머리위에서 뛰어 놀고 있군요.

온갖 불법과 날치기 꼼수를 통해.

이것이 삼성의 역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