酒 와 茶/홍차

차 이야기

하늘벗삼아 2012. 10. 28. 04:24



1. 신농씨(神農氏)가 시작한 차

중국의 전설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인 기원전 2737년에 신농씨(神農氏)가 차를 처음 마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농씨는 백성들에게 농경과 목축을 처음 가르쳤다는 머리가 소의 모습을 한 고대 중국의 황제입니다. 신농씨는 산과 들에서 나는 여러 식물을 직접 먹어 보면서 먹을 수 있는 것을 가려 내었습니다. 그러던 중 독초에 중독되어 차나무 밑에서 쉬면서 끙끙 앓고 있었는데 떨어진 나뭇잎을 씹어 먹자 정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차를 처음에는 먹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실제로 중국차에 떡차(餠茶)가 있고 차의 원산지로 생각되는 중국 운남성(雲南省) 일대에 차를 발효시켜 먹는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약초로 먹다가 나중에 끓는 물에 넣고 마시게 된 것 같습니다.

 

또다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농씨는 위생을 생각해서 백성들에게 먹을 물을 모두 끓여서 마시라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변경 지방을 순시하던 중 차나무 그늘에서 쉬었고 하인은 물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한 나뭇잎이 떨어져 하인이 끓이는 물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물의 색이 변하면서 좋은 향기가 풍겼습니다. 이를 보고 신농씨가 마셔 보니까 맛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차를 마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도의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처음 먹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몇 년 동안 잠자지 않고 명상을 하는데 졸음이 자꾸 와서 옆의 수풀에서 잎사귀를 따서 씹자 정신이 맑아지고 피로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자리는 보리수 아래이지만 깨달음을 얻기까지 수도하도록 도와준 나무는 차나무인 셈입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차는 불교와 함께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 일대로 퍼져나갔습니다.






2. 중국인이 차를 마시다

이렇게 인류와 역사를 같이 하는 차는 중국 남부 운남성과 티벳, 미얀마에 자생하는 동백나무과의 상록수입니다. 학명인 Camellia sinensis 는 중국의 (sinensis) 동백나무 (camellia) 란 뜻입니다. 야생의 차나무는 높이가 30 m 가까이 자라며 따라서 처음에는 원숭이를 훈련시켜서 잎을 땄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차나무는 품종개량이 되어서 사람이 잎을 따기 쉽도록 높이가 1 m 안팎입니다.

 

차의 원산지로 생각되는 운남성(雲南省) 지역은 13 세기 원나라 시대에 들어서야 중국의 영토가 되었으므로 처음으로 차를 먹은 사람은 실제로는 이 지역의 원주민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습관이 중국인에게 퍼지면서 중국인들이 이를 달여서 마시기 시작한 것이 차의 기원일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중국인들도 차를 수입하였던 것입니다.

 

중국에서 차는 처음에는 약용 음료였으나 6세기 이후 당나라 시대부터는 음료로서 널리 마시게 되었습니다. 맛이 있을 뿐 아니라 끓인 물을 쓰기 때문에 위생적이여서 인기가 있었습니다. 한국에는 7세기 (그 전에도 토착종 차를 마신 기록이 있으나 중국종이 들어왔습니다), 일본에는 8세기에 전래되었으며 실크로드를 따라 서방으로도 전래되어 티벳 지방이나 중근동에서도 차를 마시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차는 중국의 많은 문헌에 등장합니다. 삼국지에는 처음에 유비가 노모에게 차를 갖다드리다가 도적들에게 빼앗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나라 때 육우(陸羽)는 차의 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 다경(茶經)을 썼습니다. '茶者南方嘉木也' 로 시작되는 책입니다.






3. 중국에서 발전하는 차 제조법과 음용법

옛날에는 차를 어떻게 먹었을까요. 신농씨(神農氏)가 찻잎을 맛보았다는 전설이 있듯이 처음에는 생잎을 씹어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햇볕이나 바람에 말려서 보관하고 이윽고 불을 피워서 끓여서 마시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차 제조법과 차 음용법이 발전함에 따라 차는 보다 향기롭고 맛있게 되었습니다.

 

단병차(團餠茶) :
기록상 3세기 초에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차는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의 주요 차였습니다.찻잎을 따고 증기로 찐 후 압착하여 떡으로 만들고 불에 쬐어 말려서 메주같은 덩어리 모양으로 만든 것이며 단차(團茶)나 병차(餠茶, 떡차)라고도 합니다.

 

잎차 :
송나라 시대부터는 찻잎을 증기로 찐 후 건조시켜 만든 잎차가 시작되었습니다. 단병차와 달리 찻잎 고유의 향미가 잘 보존되므로 점차 인기를 끌게 되어 명나라 시대에 이르서는 덖음차가 만들어지기 시작되어서 오늘날과 거의 같은 잎차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차를 마시는 법도 계속 발전하였습니다. 처음 나온 단병차는 여러가지 파나 생강 등 여러가지 양념을 넣거나 소금 등으로 간을 하였습니다. 차 덩어리를 불에 구운 뒤 식혀서 가루를 내고 끓인 물에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가루차를 넣어 우려내어 마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티벳이나 몽고 등 중국 변방지역의 소수민족들은 이러한 차를 마십니다.

 

송나라 시대에는 점다법(點茶法)이라고 해서 차사발에 차가루와 끓는 물을 붓고 차선(찻솔)으로 휘저어 거품을 내어서 마시는 법이 유행하였습니다. 이 방법은 오늘날 일본차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명나라 시대가 되자 잎차를 편리하고 맛있게 마실 수 있도록 오늘날과 같은 찻잎을 다관에 넣고 우리는 포다법(泡茶法)으로 마시게 되었습니다.






4. 유럽으로 전래되고 영국에서 인기를 끌다

유럽에는 17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차가 전해졌습니다. 당시 바다를 주름잡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상인이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 시초입니다. 처음에는 음료보다는 만병통치약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궁정에서 시작된 차를 마시는 관습은 17세기 중엽 네덜란드에서 자란 찰스 2 세와 포르투갈에서 온 캐더린 왕비가 영국 궁정에 차를 소개하면서 영국에 전해졌습니다.
차는 영국에서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가격이 계속 내려가게 되어 귀족층 뿐 아니라 서민들도 마시는 음료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영국의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이 술을 마시고 곤드레가 되는 것보다는 차를 마시고 열심히 일하기를 바랬습니다. 이리하여 영국에는 차가 독일의 맥주나 프랑스의 포도주와 같은 국민적인 음료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에는 와인이나 초콜렛, 카피 등 다른 음료에 눌려서 차가 주요한 음료가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1721년에는 드디어 네덜란드를 누르고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차 수입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아직 홍차가 없었고 녹차에 우유나 설탕을 타서 마셨습니다.
참고로 각 나라의 차의 발음은 차가 전래된 중국의 지방의 사투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차를 중국 광동성(廣東省)에서는 'CHA', 복건성(福建省)에서는 'TAI' 라고 부르는데 광동성 발음은 주로 육로를 따라 전파되어 한국과 일본의 'CHA', 아라비아의 'SHAI', 터어키의 'CHAY', 러시아의 'CHAI' 등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복건성 발음은 주요 차무역항이었던 하문(廈問, Amoi) 을 통해서 해상으로 전해져서 유럽에서 영국의 'TEA', 프랑스의 'THE', 독일의 'THEE' 과 같이 발음되게 되었습니다. 단 포르투갈은 광동성 마카오에서 차를 전해받았으므로 'CHA' 입니다.






5. 밀수되고 위조된 차

영국의 차에 대한 세금은 18세기 중엽에는 119% 에 달하였습니다. 이렇게 높으므로 당연히 밀수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대단히 이윤이 높았으므로 농부, 상인, 수도사, 정치가등 많은 사람들이 이에 끼어들었습니다. 네덜란드와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몰래 들여온 차는 전국 각지로 밀수조직의 지하통로를 따라 운반되었습니다.
밀수 뿐 아니라 위조도 성행하였습니다. 차에다가 마시고 남은 차찌꺼기뿐 아니라 버드나무나 감초잎으로 만든 가짜 차나 심지어는 재와 양의 똥을 섞어 만든 것까지 섞어서 만들었습니다.
물론 법으로 여러 차례 금지되었지만 엄청난 이윤이 걸려 있는 한 사라질 리가 없었습니다. 1784년에 월리엄 피트 (소 피트)가 1784년에 차에 대한 세금을 119% 에서 12.5% 로 내릴 때까지 밀수는 계속되었습니다. 위조는 1875년에 식품 및 의약품 조례에 의하여 엄한 법이 적용되고 나서야 비로소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6. 전쟁과 차 - 미국 독립전쟁과 아편전쟁

제국주의 시대에 이르러 차는 커다란 두 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신대륙 사람들은 영국인과 마찬가지로 차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렇지만 영국이 어려운 경제를 메꾸기 위하여 신대륙으로 가는 차에 무거운 세금을 물리자 차 불매운동을 벌이고 차 상자를 바다에 집어 던졌으며 (보스톤 차 사건, 1773), 급기야는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이 이후로 미국인은 차 대신 커피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장사에는 밝아서 나중에 처음 tea clipper 을 만들어 차 무역에 혁명을 일으킨 사람은 미국인이었습니다.

 

중국과 차 무역을 하는데 있어서 장애물은 비단 언어 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차 대금으로 해마다 엄청난 돈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영국은 생각 끝에 인도에서 아편을 싸게 재배해서 중국에 몰래 팔아 이를 메꾸었습니다. 이에 중국 정부는 아편을 금지했고 영국은 아편을 팔기 위해서 아편전쟁 (1840)을 일으켰습니다.






7. 차 무역으로 고속범선 (tea clipper) 이 발전하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중국 남부에서 대량의 차가 유럽으로 운반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인도양을 지나고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을 북상하여 런던으로 오는 기나긴 길은 1년 내지 1년 반이 걸렸습니다. 이렇게 오랜 항해 중에 차는 상했으며 또 그 해에 런던에 들어온 첫 차는 경매에서 특별히 비싸게 팔렸습니다. 그리하여 범선은 점차 개량되어 선체는 늘씬하게 되고 바람을 최대한 받기 위해서 돛대와 돛이 매우 커졌습니다. 이를 clipper 라 불렀으며 범선의 완성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1년 이상 걸리던 길이 약 100일 로 단축되었습니다.

 

19세기 중순에는 미국과 영국의 clipper 들이 중국 복건성에서 런던으로 차를 싣고 가는 경쟁이 연례행사가 되었습니다. 중국의 Canton 강에서 출발하여 동지나해를 남하하고 인도양을 지나 남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고 대서양을 올라가서 아조레스 제도를 지나 런던으로 들어온 후에는 예인선에 끌려 테임즈 강을 올라와서 선착장에 누가 먼저 찻짐을 던지는가 겨루었습니다. 이 경쟁은 지구를 반 바퀴 도는 기나긴 경주이지만 흔히 몇 분 차로 승부가 결정되곤 했다고 합니다. 양주 상표로도 나오는 유명한 범선인 Cutty Sark 도 tea clipper 로 태어난 배입니다. 1870년대에 증기선이 나올 때 까지 이들 화려한 범선들은 바다에서 가장 빠른 배였습니다.

 

1870년경까지 영국은 차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수입하였습니다. 양도 엄청났지만 여기에 걸린 이윤도 대단했습니다. 중국에서 차를 한 번 실어나르면 그 댓가로 차를 나른 배를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나중에는 이 때문에 전쟁까지 일어납니다 (아편전쟁 (1840년)). 이렇게 되자 영국은 다른 나라에서 차를 만들 궁리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낙점된 곳이 인도입니다.






8. 영국에서 발전하는 차 문화

애프터눈 티 (Afternoon tea) : 차가 들어오기 전에는 영국인들은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 끼만을 먹었습니다. 1840년에 베드포드 백작부인이 시장기를 참지 못하고 오후 5시 경에 차와 케이크, 과자등 가벼운 식사를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보다 좀 전에는 샌드위치 백작이 두 빵조각 사이에 다른 것을 끼워서 먹는 방법을 발명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오후에 차를 마시면서 샌드위치를 먹는 관습이 생겼으며 사교적인 행사가 되었습니다.

 

하이 티 (High tea) 와 로우 티 (Low tea) : 두 가지 차를 마시는 법이 생겼습니다. Low tea 는 상류층 사람들이 오후 4시경 다과회를 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서 유래되었고 High tea (또는 Meal tea) 는 노동자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 6시경에 고기 등 요리를 먹으면서 차를 마시는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low 와 high 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유력한 것은 차를 마시는 테이블의 높이가 low tea 는 낮은 다과회용 탁자, high tea 는 높은 식탁에서 마셨기 때문이라는 설입니다.

 

커피 하우스
: 커피가 차보다 먼저 들어왔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지만 주로 차를 마시는 곳이었습니다. 커피 하우스는 1 페니 대학 (Penny Universities) 이라고도 불렸는데 1 페니만 내면 차를 마시고 신문을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변호사, 작가, 군인 등 다양한 모임이 이곳에서 열렸으며 에드워드 로이드가 상인들과 모였던 커피 하우스는 나중에 국제적인 보험회사인 로이드 (Lloyd's) 가 되었습니다.

 

티 가든 (Tea Garden) 과 팁 (Tips) 의 유래
: 티 가든은 신사숙녀들이 야외로 차를 마시면서 연주회, 카지노, 꽃구경, 모닥불놀이 등을 즐기는 모임입니다. 커피 하우스와 달리 성별이나 출신계급에 따라 구애받지 않고 함께 모일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해군을 격파한 넬슨 제독이 엠마를 만난 곳도 바로 티 가든에서였습니다.
티 가든에는 T.I.P.S. 라고 씌인 작은 나무상자가 테이블마다 있었습니다. 이 T.I.P.S. 는 'To Insure Prompt Service' 의 약자로서 손님이 웨이터를 빨리 부르고 싶으면 이름 그대로 '즉시 서비스할 것을 보증하는' 상자에 동전을 넣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팁을 주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본 차이나(Bone China)
: 찻잔과 찻주전자도 중국에서 수입되었습니다. 중국의 찻잔에는 손잡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인들이 마시는 홍차는 중국의 녹차보다 훨씬 뜨거웠으므로 손잡이가 달리게 되었습니다. 또 영국인들은 소의 뼈를 흙과 섞어서 홍차의 색이 돋보이는 부드러운 흰 색의 도자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이 본 차이나(bone china) 입니다.






9. 차 교역과 영어

대량의 차를 교역하게 되자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언어를 통하기 위하여 합성언어가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피진영어 (Pidgin English) 입니다. 영어, 포르투갈어, 인도어, 중국어 등이 뒤섞인 영어이며 상업적인 용도로 쓰였습니다. 'Pidgin' 은 중국어로 '장사하다(do business)' 라는 뜻입니다.
차 교역의 영향은 현대에도 영어 단어로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 Mandarin : 중국의 (차 교역을 맡은)관리 - 포르투갈어의 명령하다는 뜻인 "mandar" 에서 유래
  • Cash : (차 무역에 쓰이는) 통화 - 포르투갈어의 상자나 돈궤짝을 의미하는 "caixa" 에서 유래
  • Caddy : (차 무역용 표준) 상자 - 무게 단위를 의미하는 중국어에서 유래
  • Chow : 음식의 속어 - 음식 화물을 의미하는 인도어에서 유래






10. 홍차의 탄생

이에 대해서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녹차를 배에 싣고 가는데 적도의 뜨거운 태양열을 받아서 찻잎이 발효되어 유럽에 와서 상자를 열어보니 찻잎 색깔이 까맣게 변해 있었습니다. 버리기 아까와서 마셔 보니까 훨씬 맛이 있어서 모두 이러한 차를 마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찻잎을 따자마자 가열해서 말리기 때문에 이렇게 발효되기 어려우며 또한 홍차의 발효는 찻잎 자체의 산화효소에 의한 것이므로 이렇게 발효된 것은 곰팡이투성이의 썩은 차가 되어서 마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찻잎에는 산화효소가 있어서 그대로 놓아 두면 자연 발효가 일어납니다. 중국에서는 잎을 딴 즉시 가열하여 효소를 불활성화시켜 녹차를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제조과정중 우연히 잘못되어 발효된 차가 만들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롱차(烏龍茶) 등 반발효차와 완전발효차인 홍차가 태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최초의 홍차는 17세기 초에 복건성(福建省) 숭안(崇安)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언제부터 유럽인들이 홍차를 마시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다음과 같이 생각됩니다. 처음에 유럽인은 차에 설탕이나 우유를 타서 마셨습니다. 중국에서 들어오는 차는 대부분 녹차였지만 반발효차인 오룡차(烏龍茶)도 조금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기름기 많은 중국요리를 먹은 후에 오룡차를 마시면 입안이 개운하듯이 고기를 많이 먹는 유럽인에게는 발효된 차가 입맛에 더 맞았던 것입니다. 이에 중국은 오룡차를 더 많이 수출하면서 점점 더 발효시켜서 홍차를 만들게 된 것 같습니다. 이는 1780년에 중국차의 대표격인 키먼(Keemun, 祁門) 차가 문헌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19세기 중순이 되자 영국의 차는 거의 홍차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또 1839년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인도의 아삼 지방의 차는 발효된 차였는데 이것이 인기를 끌어서 홍차가 퍼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1. 인도에서 현대 차의 대표적 브랜드들이 나오다

다즐링 (Darjeeling) 차 : 중국은 차 수출로 엄청나게 이익을 보고 있었으므로 차나무를 키우는 방법이나 차의 제조법 등은 극비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몰래 산업 스파이를 보내서 차 제조법과 차나무를 빼내었습니다. 이를 인도 전역에서 시험재배한 결과 히말라야 기슭의 피서지인 다즐링 지방이 가장 적합하여서 여기에 중국 원산의 차나무를 심어 차농장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홍차의 샴페인으로 불리는 다즐링 (Darjeeling) 차의 기원입니다. 실제로 다즐링 차의 머스캣 향은 중국의 오룡차나 키먼(Keemun) 차와 비슷하죠.
아삼 (Assam) 차 : 1831년에 인도 북동부의 아삼 지방에서 야생의 차나무가 발견되었습니다. 영국인 입맛에 잘 맞는 차였습니다. 정글 속에서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던 아삼 지방 일대는 곧 거대한 차농장으로 바뀌었으며 여기서 영국인과 인도인이 가장 많이 마시는 아삼 (Assam) 차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실론 (Ceylon) 차 : 실론 섬 (지금의 스리랑카) 은 원래는 커피가 많이 나는 곳이였으나 1869년 이후에 병충해로 커피농장이 전멸하였습니다. 이에 아삼 지방의 차나무를 옮겨 심었습니다. 이것이 실론 (Ceylon) 차입니다. 아삼 차와 실론 차는 같은 계통인 셈입니다.






12. 미국이 발명한 일회용 tea bag 과 Iced tea

1904년에 뉴욕의 한 차 가게에서 헝겊주머니에 찻잎을 넣어 샘플로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간편한 것이 인기를 끌어서 일회용 tea bag 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회용으로 포장된 차를 차 주머니 (tea bag) 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같은 해에 아이스티가 미국 센트루이스 박람회장에서 우연히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미국의 차는 대부분 녹차였는데 한 영국 상인이 홍차를 전시하였지만 무더운 날씨에 아무도 뜨거운 홍차를 거들어 보지 않았습니다. 이에 즉석에서 얼음을 부어 시원한 아이스티를 만들어내자 불티나게 인기를 끌었고 급기야는 박람회장의 2대 히트상품이 되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이집트의 배꼽춤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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