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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의 총의로 휴전을 단호반대, 1953.06.12[출처] 한국민의 총의로 휴전을 단호반대, 1953.06.12|작성자 현대사스토리텔러

하늘벗삼아 2020. 1. 16. 09:47

미국은 1951년 5월 17일에 한국전쟁의 목적을 정치 목표와 군사 목표로 분리하여 먼저 군사 목표부터 추구함으로써 휴전협상을 통하여 쌍방의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는 것으로 변경하였다. 뒤를 이어 6월 1일에는 유엔이 ‘38도선 부근에서 휴전한다는 것은 유엔군의 참전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한국전쟁의 휴전협상은 사실상 유엔 회원국가들의 동의를 얻은 셈이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보도된 얼마 뒤인 6월 10일 당시의 임시 수도 부산에서는 수만의 군중이 궐기한 휴전반대국민대회가 개최되었으며, 이것이 휴전반대대회의 효시였다. 그 이후 한국 국민의 휴전반대대회는 휴전회담이 정체상태로 빠져들게 되면 잠잠해지고, 회담이 재개되면 궐기대회가 개최되는 가운데, 정부와 국회가 휴전반대성명을 발표하는 범국민적인 정치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렇듯 휴전을 극력 반대하는 이유는 국토통일에 대한 염원과 휴전 성립 이후의 안보에 관한 미국의 보장을 받아내는 데 있었다.

1953년 3월 하순 그 동안 정체되었던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으며, 이에 비례하여 휴전반대국민대회 또한 열기를 더해 갔다. 이러한 국민의 절대적인 호응에 힘입은 이승만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 포로 2만 7000명을 석방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서야 비로소 한국 국민의 동의 없이는 휴전의 실효성을 거둘 수 없음을 알게 된 미국은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경제원조 등 5개 항을 보장했으며, 한국 정부는 유엔군측의 휴전협상 조건에 동의하였다.

한국 정부는 최초 협상이 제기될 때부터 휴전 협상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해왔으며, 한국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휴전협정에 동의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엔군은 공산군과의 휴전 협상을 마무리 할 무렵 한국정부와의 관계는 도리어 악화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통일에 대한 강한 열망이나 북한의 남침에 의한 막대한 피해 사실, 중국과 소련의 군사력 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장차 다시 북한으로부터 침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 등 때문이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엔군사령관 클라크장군이 이대통령을 방문하였다. 이 회의에서 주요 문제는 유엔군과 중공군의 동시 철군이었다. 이대통령은 이 회의에서 상호방위조약체결과 소련이 침략할 경우 미국의 원조 보장, 그리고 평화가 확보될 때까지 해군의 봉쇄와 공중 방어의 계속 및 국군의 증강 등을 요구하였다.

이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하는 견해에는 변함이 없으며, 포로관리 차원에서 인도군이 한국 내에 입국한다면 내 명령으로 송환거부 포로들을 석방하겠다 ”는 결의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1953년 5월 미국은 휴전을 앞당기기 위해 서두르고 있었다. 클라크장군은 이대통령에게 적에게 제안할 송환거부 포로에 관한 유엔군의 최종안을 설명하였다. 그는 이대통령에게 휴전에 협력할 경우 정치·경제·군사적 지원을 보장해 주겠다고 설득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협력하겠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다고 반발하였다. 유엔군의 최종안은 한국 정부와 국민들을 경악케 하였으며 심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우선 휴전회담 한국 대표가 회담 참석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을 번복시키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국과 미국 정부와의 줄다리기는 계속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성명을 발표한 날, 유엔군사령관은 미대통령의 상호방위조약 교섭 용의와 경제 지원을 약속하는 서한을 전달하였다. 이 대통령은 이미 미국을 압박할 몇 가지 조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1953년 6월 8일 한국 국민의 기대에는 아랑곳없이 포로송환협정이 조인되자 한국민들의 휴전 반대운동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 대통령은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서한을 가지고 내한한 로버트슨에게 한국의 입장을 전달하였고 몇 차례의 토의 끝에 휴전에 합의하였다.

● 스탈린의 사망과 휴전의 급물살

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했다. 스탈린이 사망한 다음 날 저녁, 공산군들은 모든 전선에서 불꽃과 폭죽을 하늘로 쏘았고 병사들은 공중을 향해 조총 사격을 했다. 스탈린의 사망은 곧 한국전쟁에도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정전회담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51년 12월에 타결되었고 지금까지 포로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모든 의제가 합의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53년 2월 말, 미국은 부상 포로의 교환을 제의했었다. 그러자 이 제의를 소련 측이 수용키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4월 '부상 포로 교환협정'이 조인되었고 4월 20일 ~ 5월 3일 동안 UN 측은 북한군 포로 5천, 중공군 포로 1천을 북으로 송환했고 공산 측은 국군 포로 470명, UN군 포로 150명을 남으로 송환했다.

UN측 6600명과 공산측 620명을 맞바꾼 셈이었다. 즉 부상포로 교환 문제는 미국이 양보했으니, 일반 포로 교환 문제에 있어서는 공산측이 양보를 해야 할 차례였다. 결국 공산측이 제의를 했다.

"좋다. 자유석방으로 하겠다. 먼저 돌아가겠다는 포로들부터, 즉각 송환하자. 다만,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이 과연 진짜로 그런지 의문이다. 강요 때문인지, 자신의 의사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송환을 바라지 않는 포로들은, 중립국 출신의 위원들이 감사하는 상태에서 의사를 물어보도록 하자."

미국이 수락했다. 이로써 18개월을 질질 끌었던 포로교환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었다.

이승만은 더 과격한 쇼를 감행한다.

"듣는 척도 안하시겠다? 좋았어. 이번에는 제대로 깽판 좀 쳐보자. 반공포로 싹 다 석방시켜!"

그렇게 명령을 하달 받은 헌병들이 전국의 수용소로 파견됐다. 그리고 미군 보초들을 영창에 가두어 버리고 반공 포로 석방에 들어갔다. 6월 18일 새벽 5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포로 심사과정에서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해버린 것이었다. 대구·부산·마산·광주·인천·논산 등지에 수용 중이던 반공포로 3만4천 명 가운데 2만7천 명이 그렇게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다만 탈출 도중에 UN군의 사격으로 61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이승만의 조치로 관심 끌기에는 성공했지만, '휴전'이라는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공산 측은 투덜댔지만, 미국이 해명하자, 의외로 쉽게 받아들였다. 그만큼 휴전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확실하게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7월 12일의 일이었다. 사실 이승만의 진짜 목적은 여기에 있었다. 반공 포로 석방은 '북진통일'과 마찬가지로, 결국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기 위한 일종의 이벤트였던 셈이다. 다만 반공포로 석방의 대가는 분명 있었다.

휴전을 절실히 원했던 공산 측은 이승만의 휴전 동의를 끌어내기 위해서라도 국군을 강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그런 이유로 발발했던 게, 휴전 막판에 벌어졌던 '금성전투'였다. (중공군 7차 공세) 이 전투로 인해 국군은 2만 명 가까운 병력이 손실되고 서울 면적의 1/3이나 되는 귀중한 영토를 상실하고 만다. 그리고 그 손실은 끝내 회복할 수 없었다. 불과 휴전협정 1주일을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도 이승만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했다.

로버트슨 "교활하고 임기응변의 재주가 있는 장사꾼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라를 국가적 자살행위에 몰아넣을 수 있을 만큼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평했다.

"이승만은 너무 비협조적이었고 그가 고집을 부린 사례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공산 국가 못지 않게, 이승만은 너무도 불만스러운 동맹자였으며 이는 아무리 심한 말로 비난해도 지나치지가 않는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한국전쟁이 미소 냉전 대결의 희생물이었음을 간과하고 있었다. 북한의 탱크에는 USSR이라는 소련제 마크가 새겨져 있었고 남한의 대포에는 USA라는 미제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휴전의 대가로 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는 것은 미국이란 강대국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체면이 서지 않을 수도 있는 '성가신 요구'에 불과하겠지만, 냉전의 대리전을 치러야 했던, 약소국의 입장으로서는 생존이 걸린 너무도 '절실한 요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