精神을 건강하게/삶의 흔적

한국전쟁 피난민 열차, 1950년

하늘벗삼아 2020. 1. 16. 09:19

사람들이 다시 피난길에 나섰다.

연말에, 마동 수는 피난 열차 지붕에 올랐다.

부산으로 가야 하는지 대구나 김천에서 내려야 하는지,

어디서 내리든 별 차이 없을 것이었다.

열차 지붕 위 아이들은 죽고 또 죽었다.

바람에 날려가서 죽고 졸다가 떨어져 죽고,

열차가 터널을 지날 때 터널 천장에 늘어진 철근에 부딪혀서 죽었다.

열차는 며칠 밤 며칠 낮이 걸려서 부산에 도착했다.

-김훈의 (공터에서) 중에서-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너다

우리도 머리에 썼던 수건에 닷 되 정도를 담아 가지고 서둘러 임진강 쪽으로 갔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다 사람들은 모두 쌀 창고에 매달려 있다 보니 임진강변에는 별로 사람이 없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강을 나룻배로 한 사람 건너주는 데 4000환이라고 해서 피난민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는데 전날 밤에 날씨가 갑자기 영하 30도까지 내려가서 임진강은 얼어붙었다. 강을 건너려고 남편이 막대기를 들고 얼음을 꾹꾹 눌러보면서 앞에서 가고 나는 얼음이 깨질까 봐 멀리 뒤에서 따라 걸었다.

이 강이 얼마나 깊고 얼마나 넓은지도 모르고 얼마나 얼었는지도 모르면서 얼음 위로 걸었다. 걸을 때마다 얼음 밑에서 물이 철렁철렁하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유엔군이 강변 초소에서 자기들 쪽으로 사람이 강을 건너오니까 총을 쏘아댔다. 총알이 지나갈 때마다 자지러지게 놀라 허리를 굽히곤 했다. 무사히 강을 건넜다.

드디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도착

계속 가다가 어느 집 외양간에 들어갔다. 소는 없고 지푸라기만 깔려 있는 것을 보고 거기서 하룻밤을 자는데 지금까지 피난 오던 중에 가장 편안하고 든든한 곳에서 잘 쉰 것 같았다. 볏짚으로 요를 하고 짚단을 풀어서 이불을 하니 얼마나 편하고 포근한지 아침에 일어나기가 싫었다. 서울 쪽으로 조금 가다 보니 경기도 파주라는 곳이 나오고 그곳에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다시 일산이라는 곳을 향해서 갔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피난민들이 더 가지 못했다. 행주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면 향토방위대로 잡아서 논산이라는 곳으로 보낸다고 해서 피난민 청소년들이 못 가고 있었다. 그곳 주민들은 모두 피난 가고 北에서 온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나흘을 묵었다. 그곳도 나무가 귀해서 남편은 산에 가서 생솔가지를 잘라다가 불을 때고 나흘을 쉬었다.

우리는 또 걸었다. 오라는 데는 없지만 남한으로 가야 산다는 생각에 가다 보니 행주나루라는 큰 강이 있어서 나룻배로 건넜다. 얼마 안 가서 소사라는 곳을 지나 영등포까지 왔다.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이제 드디어 대한민국 서울에 다 왔다는 그 기쁨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우리는 언니가 간호원으로 있는 서울의전병원이라는 곳을 찾아가려고 마포 나루터에 가서 배를 타고 서대문 쪽으로 들어가는데 오히려 수많은 서울 사람들은 거꾸로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과 반대로 서울 시내 쪽으로 가다가 서대문 쪽에서 향토방위대에게 붙잡혔다. 北에서 온 청년들은 모두 잡아서 제2국민병으로 보낸다고 했다. 남편도 붙잡아서 수용소로 들여보냈다.

큰일 났다. 나 혼자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서 궁리 끝에 그 향토방위대에게 아양을 떨면서 본인이 대한민국에 와서 군인 나간다고 인민군대에도 안 들어갔다고 해가면서 남편이 어제부터 몇 끼를 굶었으니 가서 아침 좀 사먹고 오면 안 되겠느냐고 꼬셨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가서 남편을 데리고 왔다. 짐 보따리를 거기 놓고 갔다올 테니 봐달라고 하고서는 우리는 오던 길로 되돌아서 마포 쪽으로 도망을 쳐서 다시 나룻배를 타고 영등포로 갔다.

배에서 내려 가다 보니 거기서 또 잡혔다. 잡혀가다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또 도망치고 그렇게 하루종일 몇 번을 붙잡히고 도망을 쳤는데 서울 지리를 모르니까 그 구역 내에서 맴돌다가 결국은 또 잡혀서 파출소 안 대기실로 들어갔다. 거기에 사람들을 모아두었다가 논산으로 보내 훈련을 시켜 군인을 만들어 전방부대에 보낸다고 한다.

나는 이제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을 하다가 거기 감시원으로 있는 여자 경찰관에게 가서 나도 여군으로 가서 간호보조원이라도 하겠다고 하며 남편을 불러달라고 했다. 이왕에 가는 거 속옷이라도 갈아입고 갔으면 한다고 졸라대니 이 여순경이 가서 남편을 데리고 왔다. 우리는 속옷을 갈아입고 오겠다고 하면서 또 도망을 갔다.

남편을 어느 구멍가게에 기다리게 하고 약 한 40집 가량을 다니면서 사정을 해도 집을 못 구했다. 할 수 없어서 어느 이발관에 들어가서 수건을 빨고 열심히 일을 해 보여줬더니 일을 해보라고 허락해 줬다. 이 집은 직원과 가족은 청주로 다 보내고 주인 혼자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남편을 데리고 그 집에 가서 밥도 하고 반찬도 만들면서 10일을 같이 살았다.

기차지붕 위에 올라타고 또다시 남쪽으로

아침에 밥을 푸려고 하는데 일산 쪽에서 나는 대포 소리에 집이 무너져 밥솥을 덮치고 사람도 다칠 뻔했다. 전쟁은 다시 서울까지 밀려온 것이다. 우리는 다시 남쪽으로 피난을 가기 위해서 주인집 아저씨와 같이 영등포역으로 나갔다. 기차역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기차지붕 위에도 올라갈 곳이 없어서 겨우 사람 위로 해서 올라갔다. 그 추운 날 하루종일 눈비는 계속 오는데 기차는 떠나지 않고 있었다. 저녁 때가 되어서야 우리가 탄 차는 안 가고 저쪽 차만 간다고 해서 얼른 내려와서 그 차 지붕 위에 올라갔는데 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겨우 수원까지만 가고 또 안 간다. 거기까지 가는데도 아침에 보니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왜냐하면 둥그스런 지붕 위에 양쪽에 앉아서 서로 붙들어야 하는데 잠이 들면서 쥐었던 손을 놓치면 두 사람 다 떨어져 죽는다. 지붕 위에 몇 사람 남지 않고 다 떨어졌는데 얼마를 가다가 천안까지 가서는 또 안 간다고 해서 우리는 내렸다. 저쪽에 있는 기차가 간다고 해서 가보니 지붕에도 탈 데가 없어서 기차 물 넣는 화통에 탔다.

차가 가려면 물을 넣어야 한다고 내려오라고 해도 한 사람도 내려오지 않자 사람이 있는 곳에 물을 부어 사람 옷과 철판이 붙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섰는데 그 상태로 기차는 조치원까지 갔다. 사람들은 다 내려도 우리는 몸과 옷이 철판에 얼어붙어서 꼼짝도 못하고 있는데 화통 양쪽 가장자리에 붙어 있던 남자 한 사람이 움직여 얼음이 부서지면서 모두 내릴 수 있었다. 먼저 내린 사람들이 황톳불을 피워놓고 거기 앉아서 옷들을 말리며 기진맥진해서 여기저기 쓰러져 잤다. 우리는 주인집 아저씨가 빨리 가자고 해서 또 걸었다. 드디어 청주에 도착해서 주인집 아저씨네 식구들을 만났다. 서로 반가워하며 밥을 하는데 밥이 다 끓기도 전에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났다. 경찰들이 와서 또 피난을 가야 산다고 해서 밥도 못 먹고 그대로 둔 채 또다시 피난을 갔다.

가다 보니 고개가 아흔아홉 구비라는 피발령재(해발 361m)가 나왔다. 그 고개를 넘어가면 보은 속리산 가는 길이라 하여 그 길로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가는데 뒤에선 전쟁이 밀려 내려온다고 하고, 우리는 빨리 가야 하는데 눈보라는 치고 비탈길이 미끄러워서 아무리 가도 제자리걸음이다. 가다 보면 어린아이들을 눈 위에다 버리고 가서 얼어죽은 아이가 여기저기 많이 보인다. 아직 죽지 않은 아이도 있었는데 누구 하나 아이를 구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자기도 가다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다가 충북 보은군 옥천 월례리라는 동네까지 가서 구장님 댁에 자리 잡고 거기서 구정 명절을 지냈다. 이 댁은 방앗간 집인데, 발로 밟는 디딜방아, 소가 맷돌을 메고 다니면서 찧는 연자방아, 모터로 찧는 동동방아, 이렇게 많은 방아에 떡을 해서 그 동네의 많은 피난민들에게 한 바가지씩 나누어 주기도 하고 매일 저녁 고염이라는 감 같은 실과도 간식으로 주고 참 인심 좋고 情이 많은 할아버지셨다. 그 인심은 49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전순옥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자료:월간조선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