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한일 비밀회담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국민들은 굴욕적인 대일외교에 크게 분노했다. "읭? 징용·징병으로 끌려가서 받지 못한 임금만 20억 달러가 넘는다더만.." "겨우 3억 달러만 받겠다고?" "젠장, 이런 굴욕이 어딨음!" 때문에 학생과 지식인들은 졸속적인 협정이라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6.3 항쟁) "한일회담 반대!" "박정희 정권 물러가라!" 성난 학생들은 박정희의 화형식을 거행하는가 하면, 경찰차까지 탈취하며 청와대 최후저지선을 위협했다. 학생들은 '박정권 물러가라' 등의 낙서를 썼다. 결국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시위대를 1200명이나 체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 여론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자, 64년 8월 중정은 느닷없이 이런 발표를 한다.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의 변란을 꾀하던" "지하조직, 인민혁명당(인혁당) 일당 47명을 붙잡았다." 그것은 한일협정 문제로 온정신이 쏠려 있던 국민들에게 뒤통수를 한방 후려치는 일대의 충격이자, 관심 전환이었다. 하지만 얼마 후 검사들의 발표로 또 한번 충격을 줬다. 4명의 담당 검사 모두가 공소를 기각한 것이다. "관련자들을 기소할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슴돠." "정말로 간첩이라면 난수표·조직강령·가입증 따위가 나왔다든지," "증거 사진이나 녹음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증거도 없이, 중정에서 작성한 조서만으로는 구속할 순 없어요." "관련자들 전부가 고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조서를 썼다고 하던데요." 결국 정부는 해당 검사들은 모두 잘라버리고, 새 검사에게 사건을 넘겨 관련자들을 모두 기소했다. "인혁당 관련자 13명에게 모두 실형이 선고되었다." 그런 식으로 정권은 '안보위기'를 부각시켜 악화된 여론에 물타기를 하며 위기를 탈출할 수 있었으니, 그렇게 짭짤한 재미를 본 이후로 정권은 위기가 있을 때마다 용공조작에 맛을 들이게 된다. "데모하면 모두 다 빨갱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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