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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 대통령 취임식 거행, 1953.01.22

하늘벗삼아 2020. 1. 16. 09:41

아이젠하워 대통령 취임식 거행, 1953.01.22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0.14 ~ 1969.3.28)는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재임기간 : 1952~1961).

​1890년 10월 14일 텍사스주 데니슨에서 출생했으며 1892년 캔자스주 애빌린에 정착하였다.

1915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차훈련소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며 국내에 머물렀다.

종전 후 1924년까지 파나마운하 지역에서 근무했으며, 육군참모학교에서는 장교 중 수석을 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어 워싱턴에 있는 육군전쟁대학을 거쳤다.

1932년 육군참모총장 더글러스 맥아더의 참모가 되었으며 1935~1939년 필리핀 군사고문을 지낸 맥아더 휘하에서 현지 주둔군 양성을 맡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북아프리카 지역 연합군사령관, 1943년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되었으며 1944년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킴으로서 1945년 5월 마침내 독일의 항복을 받아냈다.

전쟁이 끝난 후 1945년 육군참모총장, 1948년 컬럼비아대학교 총장을 거쳐 1950년 새로 창설된 나토(NATO)군 최고사령관을 지냈다.

195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애들라이 스티븐슨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당선직후인 1952년 12월 한국전선을 방문하였으며 다음 해 7월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 불구하고 한국전쟁을 휴전으로 마무리했다.

1960년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취임 후 국방정책으로 적으로부터 본격적 공격을 받을 경우 핵무기를 적재한 전략폭격기를 사용 즉각 반격한다는 뉴룩(New Look)전략 혹은 대량보복(massive retaliation)전략을 채택했으며, 대 소련관계에서는 소련의 확대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롤백(roll back)정책을 취하였다.

또한 중동지역에서 공산주의국가의 무력 침공시 도움을 요청하는 국가에 대하여 경제 및 군사지원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주도록 하는 아이젠하워 독트린을 의회가 승인했다.

그밖에 한국전쟁과 인도차이나전쟁의 휴전, 수에즈운하 문제 수습 등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하였고 UN총회에서 국제 원자력 관리 기구를 제창하였으며 스탈린 사망이후 세계평화를 위한 새 질서 모색을 위한 제네바 4대국 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후르시초프의 방미로 조성된 소련과의 화해분위기는 소련에 의한 미국의 정찰기 U-2기의 격추로 새로운 긴장관계가 조성되기도 했다.

1961년 퇴임 후 펜실베니아주 게티스버그에서 은퇴 생활을 했으며 1969년 3월 28일 워싱턴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승만 박사의 반공포로 석방은 자충수, 한국을 살린 것은 맥아더가 아니라 아이젠하워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유엔군과 공산군과 휴전협정이 무르익어가던 1953년 6월18일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을 결행했다. 유엔군의 눈을 피해 전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은밀히 전달된 명령에 따라 6월18일 00시를 기해서 수용소를 경비하는 헌병대는 미군들을 따돌리고 2만7000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유엔군과 공산군의 휴전협정의 선결과제인 포로 맞교환이 1대10의 비율로 아군에 절대적으로 불리했고 휴전이후 미군의 안보가 담보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강력 반대하고 있었다.

휴전협정을 방해하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은 미국을 놀라게 했고 결국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 휴전 이후의 불안감을 제거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 역사가의 일반적 평가이다.

"이승만 박사의 반공포로석방은 나라와 민족을 생각한 영웅적 쾌거가 아니라 자신의 과실을 감추기 위한 고도의 언론플레이였다"

유엔연합군과 공산군이 휴전협정에서 전기를 마련한 것은 1953년 5월25일이었다. 유엔군 측은 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들을 중립국 위원회에서 심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수정안을 제시해 공산군 측의 동의를 얻어냈고 6월8일 포로 송환 협정 최종안에 서명했다.

협정에 따르면 포로들은 자유의사에 따라 북과 남, 혹은 제3국으로 갈지를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 우리 정부는 그러나 북측이 제시한 국군포로 송환수가 8300여명에 불과했던 반면 북한에 돌려보낼 포로수가 10만 명에 달한다는 점과 무엇보다 휴전 후 전쟁이 다시 일어나면 유엔군이 다시 참전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들어 휴전을 반대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북진통일론'을 외치며 더욱 강경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은 중공군까지 참전한 상황에서 북진통일은 제3차 대전을 초래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발상으로 보았다. 전쟁영웅 출신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직접 전선을 시찰하며 단기간에 전쟁이 끝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더 이상 소중한 목숨들을 무의미하게 희생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사실상 휴전 협상이 타결됐음에도 전선은 더욱 뜨거워졌다. 특히 중공군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이승만의 기를 꺾기 위해 이른바 6월 대공세를 펼쳤다. 포로송환 협정이 타결된 지 이틀 뒤인 6월10일부터 17일까지 한국군 2군단(군단장 정일권 장군)이 단독으로 방어하는 중부전선 금성 돌출부를 일제히 공격했다. 아군은 총 13㎞의 전선에서 평균 4㎞씩 물러나는 패퇴를 당했고 단독 북진을 외치던 이승만 대통령의 체면도 뭉개졌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18일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으로 금성 대참패를 묻히게 했다.

"반공포로 석방으로 휴전협정이 물거품 되는 위기는 피할 수 있었지만 중공군의 '7월 대공세'라는 더 큰 비극을 초래했다"

중공군은 이승만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금성천 돌출부를 지도상에서 완전히 밀어버리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7월13일 밤, 중공군은 한국전 개입 이래 최대의 포 사격을 가한 후에 물밀 듯이 진격해 왔다. 한국군은 수도사단 부사단장이 포로가 되는 등 최악의 참패를 당했고 실제로 금성 돌출부는 완전히 일직선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금성천 전투 참패이후 이 대통령은 미국의 지원 없는 독자 북진이 불가능한 점을 깨달았기 때문에 휴전을 더 이상 반대할 수 없었다. 결국 7월27일 판문점에서 쌍방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3년 1개월의 기나긴 전쟁을 멈추는 역사적인 조인식이 열렸다.

"휴전협정이 미뤄지면서 6월과 7월에만 5만3000여명의 아군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군도 5000여명의 사상자가 나와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의 만용으로 죽지 않아도 될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됐다'며 크게 분노했다"

"한국전쟁의 진정한 영웅은 맥아더가 아니라 아이젠하워다. 사람들은 9월 인천상륙작전만 알지, 맥아더의 11월 평안북도 참패는 모르고 있다"

"맥아더의 주장대로 원자탄을 사용했다면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을 것이다. 사람의 생명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3차 대전을 막은 아이젠하워야말로 한국전쟁의 진정한 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