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 어느 날, 15세의 한 소년이 청운의 뜻을 품고 한양으로 간다. 그는 조광조 밑에서 공부를 한다. 1519년 가을에 있었던 현량과에 천거되었으나 합격자 수가 너무 많아서 최종 합격자 명단에서 빠진다. 나이가 너무 어려서 다음에 합격하여도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중종 임금께서는 이를 아쉬워하여 그에게 종이를 하사한다.
그런데 그 해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스승인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를 당하고 사약을 받는다. 소년은 출사를 포기하고 낙향을 한다. 고향인 담양군 창암촌에 머물면서 꽃과 나무를 가꾸면서 세상을 등지고 산다. 그가 바로 소쇄처사 양산보(1503-1557)이다.
양산보를 만나러 소쇄원을 간다. 대숲 바람이 불어오는 소쇄원은 입구에서부터 청량하다. 소쇄원은 이름이 참 별나다. 소쇄 瀟灑란 말은 ‘맑고 깨끗하다’라는 뜻인데 그 출처가 중국 제나라의 문인 공치규(447-501)가 쓴 <북산이문 北山移文>이다. 여기에 소쇄출진지상(瀟灑出塵之想 : 맑고도 깨끗하며 세속을 뛰어넘는 고결한 생각)이란 말이 나온다. <북산이문>은 종산에 은거하다가 혜염 현령으로 출사한 주옹周翁이 임기를 마치고 다시 종산으로 은거하려 하자, 평소 주옹의 출사를 못마땅하게 여긴 공치규가 신령의 말을 빌려 이 산에 못 들어오게 하는 경고문이다.
먼저 소쇄원 원림을 한번 둘러본다. 대봉대를 지나 제월당과 광풍각을 간 다음 위교를 건너 다시 입구에 선다. 제월당과 광풍각은 광풍제월 光風霽月에서 따온 이름이다. 광풍제월은 중국 송나라 때 명필 황정견이 성리학자 주돈이(1017~1073)의 인물됨을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가 갠 뒤 해가 뜨면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과 같고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胸懷灑落 如光風霽月)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주돈이는 태극도설을 주창한 송나라의 성리학자로서 주자(1130-1200)의 대 선배 격이다. 양산보도 스승인 조광조와 마찬가지로 주돈이를 존경하였다 한다. 그래서 주돈이가 쓴 <통서>와 <애련설 愛蓮說> <태극도설>을 항상 글방에 간직하고 있었다 한다.
다시 제월당으로 발길을 향한다. 제월당은 방과 마루가 있는데 양산보가 거처하던 곳이었다. 방 안 벽에는 글씨가 여러 폭 붙어 있고 소치 허련의 난초 그림도 있으며, 천장에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있다. 벽에 붙은 한문 글씨를 자세히 보니 <귀거래혜...>로 라고 써져 있다. 이 시가 바로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귀거래사이다. 양산보는 평소에 은일시인 隱逸詩人 도연명을 흠모하여 <귀거래사>와 <오류선생전>, <독산해경>을 즐겨 읽고 도연명 같은 삶을 살려고 하였다 한다.
도연명. 그는 중국 강서성 구강시의 시상 柴桑이라는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시상은 양자강 중류에 있으며 북으로는 여산 廬山을 등에 업고 남으로는 파양호를 바라보고 있는 명승지이다. 그는 29세부터 관리 생활을 시작하여 몇 번의 벼슬을 하다가 41세에 팽택 현령을 사직한 뒤에는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 그는 <귀거래사>를 쓴다.
귀거래사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시상마을로 돌아오는 심경을 읊은 시로서, 세속과의 결별 선언문이기도 하다.
귀거래사
자, 돌아가자. 歸去來兮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이미 내가 잘못하여 스스로 벼슬살이를 하였고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괴롭혔거늘 어찌 혼자 한탄하고 슬퍼만 하겠는가?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바른 길을 쫓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았노라.
(중략)
이제 모든 것이 끝이로다! 이 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이 그 얼마이리. 어찌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으며 이제 새삼 초조하고 황망스런 마음으로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부귀는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오. 또 죽은 후에 천제가 사는 천국에서 살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때가 좋다 생각되면 혼자 나가서 거닐고, 때로는 지팡이를 세워 놓고 김을 매기도 한다.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니,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랴.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니,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랴.’ <귀거래사>의 마지막 구절은 마치 장자가 역설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선언 같다.
이어서 제월당 마루를 둘러본다. 거기에는 제월당 현판과 여러 개의 편액들이 걸려 있다.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 송순, 양응정, 기대승의 한시, 그리고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의 시가 있다.
먼저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시가 적힌 현판을 본다. 소쇄원 48영은 소쇄원 자연경관 48가지를 읊은 시이다. 이 시에는 단순히 경치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생의 도가 있다.
<소쇄원 48영>중에서 양산보에 관한 시 한 수를 음미하여 보자.
제2영 개울가에 누운 글방
창이 밝으면 책을 읽으니 물 속 바위에 책이 어리비치네. 한가함을 따라서 생각은 깊어지고 이치를 깨닫는 연비어약의 경지에 들었네.
이 시는 하서 김인후가 양산보를 일컬어 쓴 시이다. 하서는 ‘소쇄옹의 학문과 생각이 연비어약 (鳶飛魚躍)의 경지에 들었다’고 칭찬을 하고 있다. 연비어약이란 <시경 詩經>에 나오는 말로서 ‘솔개가 하늘을 나는 것이나 물고기가 못에서 뛰는 것’은 모두 자연스러운 도의 작용으로서 군자의 덕화가 널리 미침을 의미한다.
다시 눈길을 끈 것은 송순, 양응정, 기대승의 한시가 적혀 있는 편액이다. 자세히 보니 이 시들은 소쇄옹 양산보에 대한 만시이다. 소쇄처사 양산보는 1557년 3월에 소쇄원의 안방에서 별세한다. 이 때 많은 시인 묵객들이 조문을 하였고 만시를 지어 올렸다. 그중 가장 슬퍼한 사람이 하서 김인후이다. 그의 슬픔은 너무 컸다. 그 슬픔을 나타낸 것이 하서가 지은 <소쇄원주인만 瀟灑園主人挽> 이란 시이다.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한 것이 몇 해이던고. 고요하고 한가한 소쇄원이네. 이 사람 지금 이미 이승 사람이니 병든 내 다시 무슨 말 하겠는가.
백발이 온통 목을 뒤덮었는데 청산은 가물거려 넋을 끊어놓네 부질없이 오곡의 물만 남았으니 누워서 전원을 거슬러 볼까 생각하네.
이렇게 만시를 쓴 하서 김인후는 장례식에서 소쇄옹에게 이제 저 세상에 가면 먼저 죽은 하서의 딸이자 소쇄옹의 며느리(양자징의 부인)도 보겠노라고 하면서, 그 딸을 만나거든 그녀에게 안부나 전해 달라고 했다 한다. (하서의 딸이자 소쇄옹의 며느리는 소쇄옹보다 7년 먼저 죽었다)
그러면 제월당에 걸린 송순의 시부터 감상하여 보자. 송순과 양산보는 이종간이다. 양산보의 어머니가 송순의 고모이다. 나이는 송순이 양산보보다 열 살 이상 많아 이종형이 된다.
보배로운 임천은 옛 구름에 잠겨 있어 길 잃으니 어느 곳에서 자네를 찾으랴 사가 謝家의 뜨락엔 난초 바야흐로 가득하고 증씨 曾氏의 집 앞엔 저녁햇살 어스레한데 돌 뚫는 바위 시냇물만 홀로 목이 메이고 담장의 붉은 꽃나무는 누굴 위하여 향내를 내는가 옛 동산길이 새로운 길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늙은 나무에서 우는 소쩍새 소리 차마듣지 못하네.
外弟瀟灑處士輓
珍重林泉鎖舊雲 路迷何處覓微君 謝家庭畔蘭方郁 曾氏堂前日欲曛 穿石巖溪空自咽 引墻花木爲誰芬 故園永與新阡隔 老樹啼禽不忍聞
현판 한가운데에 있는 시는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했던 양팽손의 아들인 양응정이 지은 만시이다. 양산보는 양응정의 큰 집 형이며, 양산보를 조광조에게 소개한 이가 양팽손이었다.
천인이 해중산에서 솟아났으니 무늬가 같은 후손 아롱진 옷을 입네. 정성 높은 자손은 추모하는 마음 기울이고 학식 높은 선배는 따라 받드네. 어진이의 덕을 입으니 복 있는 백성 용사를 만나니 수명이 인색해 막막한 구천에서 응당 통곡할 것이니 북풍에 원초리 풀도 얼굴 수그리네.
天人湧出海中山 符彩雲孫尙被斑 誠篤白華傾慕悅 識高前輩斷追攀 遺賢藪澤民何福 値歲龍蛇壽亦慳 漠漠九原應結痛 北風萱草日摧顔
아울러 고봉 기대승의 만시도 적혀 있다. 소쇄옹이 별세한 1557년 3월, 이 때는 고봉 기대승이 아버지 기진의 3년 시묘살이를 끝낸 때이었다. 고봉의 만시는 원래 “만모인 5언 4운 5수 挽某人 五言四韻五首”이다. 양산보라는 이름이 적혀 있지 않고 그냥 모인이라고 쓴 한시이다. 기대승은 소쇄처사 양산보에 대한 만시를 쓰면서 왜 그냥 “모인(아무개)”이라고 하였을까. 이는 고봉이 세상에 드러나기 싫어하는 소쇄처사의 마음을 가장 잘 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벼슬도 안하고 도연명처럼 은자의 삶을 산 분에게 무슨 이름이 필요하였을 것인가.
고봉의 만시는 5수중 제4수와 제5수가 제월당에 걸려 있다.
바다와 산은 영기를 모으고 하늘과 땅이 서로 일민 逸民을 도왔네. 삼여 三餘에 학문을 많이 쌓았고 한 골짝에 또 봄을 간직했었네. 뜻이 멀어 선배를 따르고 말이 깊어 뒷사람을 계시하였네. 처량하게 옥석을 남겼으니 부질없이 방진 ·芳塵만 우러르노라
海嶽鍾英氣 乾坤相逸民 三餘多積學 一壑又藏春 意遠追先輩 言深啓後人 凄凉留玉舃 空復仰芳塵
지하로 수문하러 떠나가니 인간의 무채를 어기었구려 존망의 정이 망극도 한데 이승 저승 길이 아득만 하구나 요락한 임당은 그대로 변함없는데 처량한 장구는 그 모습이 아니네. 적계로 멀리 조문을 못하니 동쪽을 바라매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地下修文去 人間舞綵違 存亡情不極 幽顯路猶依 寥落林塘是 凄凉杖屨非 炙鷄乖遠造 東望淚沾衣
여기에서 1,2,3 수도 여기에서 같이 소개한다.
소쇄원 원림이 유벽하고 청진한 지개가 유유했네. 꽃을 심어 따뜻한 꽃잎이 열리고 물을 끌어들여 청류가 솟구쳤네.
고요하고 가난한 것 싫어 아니하고 한가로이 그대로 늙는 것 걱정하지 않았네. 어찌 갑자기 돌아가실 줄 알았으랴 슬프게도 흰 구름만 떠 있네.
瀟灑園林僻 淸眞志槪悠 裁花開煖蘂 引水激淸流 靜與貪非厭 閒仍老不憂 那知遽觀化 怊悵白雲浮
스스로 유취를 탐할 줄 알아 부름을 기다리지 않고 찾아오곤 했네. 명에 편안하여 별경에 숨었고 실의에 빠져 맑은 의표 숙여졌네.
한번 취했던 일 도리어 꿈을 이뤘으니 거듭 노니길 다시 마음먹었었네. 야학에 옮긴 것을 수심에 겨워 듣고 슬픈 눈물은 찬 밤에 뿌리노라
自覺耽幽趣 參尋不待招 安排藏異境 落拓偃淸標 一醉還成夢 重遊更作料 愁聞移夜壑 衰涕灑寒宵
초년에는 순유의 업이더니 중년에는 거사의 몸이었네 공명은 죽백에 비었지만 덕의는 향리에 가득하도다.
한번 웃자 숨긴 배를 잃어버리니 천추에…… 원문 1자 결 ……나무 새롭네 마음 아파라 기구전에 어찌 다시 이 사람이 있으랴
蚤歲醇儒業 中年居士身 功名虛竹帛 德義滿鄕隣 一笑藏舟失 千秋□樹新 (원문 1자 결) 傷心耆舊傳 那復有斯人
소쇄옹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는 누구였을까. 만시를 보면 김인후 송순 기대승 양응정등이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도 임억령(당시 담양부사), 김윤제 , 김성원, 고경명, 정철도 참석하였으리라. 이들은 모두 소쇄옹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었다.
소쇄원을 나오면서 제월당 한 곳에 걸려있는 양산보의 면앙정 차운 시 마지막 구절이 생각난다. “난간에 기대어 눈동자를 돌려보니, 세상과 인연하는 소식이 끊겠구나.” 이 시구가 바로 소쇄처사의 마음이리라. 이름 없는 한 포기 들풀이 되어 고결하게 산 양산보. 그가 세상과 등지며 만든 원림은 지금은 한국의 대표적 원림으로 뭇 사람들의 볼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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