精神을 건강하게/독도,일제침략

왜적(倭敵)처럼 흉잔(凶殘) 포학한 자!!

하늘벗삼아 2012. 8. 1. 14:32






아아! 세계민족 중에서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자 수없이 많지만 어찌 우리겨레처럼 남녀 노유가 참혹하게 도살(屠殺)을 당한 자 있을 것이리오.  역대 전쟁사상에서 군사를 놓아 살륙 약탈한 자 수없이 많지만 저 왜적(倭敵)처럼 흉잔(凶殘) 포학한 자는 들은 적이 없다.


백기(白起)가 장평(長平)에서 20만 명을 묻어 죽이고 항우(項羽)가 신안(新安)에서 20만 명을 죽인 것이 잔인 무도의 최고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모두 전투원이었다.

 
저 왜적이 우리 서·북 간도의 양민 동포를 학살한 일 같은 것이야 어찌 역사상에 일찌기 있은 일이겠는가.


각처 촌락의 인가·교회·학교 및 양곡 수만 석을 모두 불태우고 남녀 노유를 총으로 죽이고 칼로 죽이고 매질하여 죽이고 결박하여 죽이고 주먹으로 때려 죽이고 발로 차서 죽이고 찢어 죽이고 생매장하고 불에 태우고 가마에 삶고 해부하고 코를 꿰고 옆구리를 뚫고 배를 가르고 머리를 베고 눈을 파내고 가죽을 베끼고 허리를 베이고 사지(四肢)를 못박고 수족을 잘라서 인류로서는 차마 볼 수 없는 일을 저들은 오락으로 삼아 하였다.

 

우리 동포가 혹은 조손(祖孫)이 함께 죽고 혹은 부자가 함께 참륙(斬戮)당하고 혹은 남편을 죽여 아내에게 보이고 혹은 형을 베어 아우에게 보이며 혹은  상인(喪人)으로 혼백(魂魄) 고리를 가지고 난을 피하다가 형제가 함께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산모가 기저귀에 싼 어린애를 품고 화를 피하다가 모자가 같이 명을 끊었다.


그 밖에 허다한 일을 종이에 다 적을 수 없으며 우리와 화양(華洋) 각처의 조사 보고도 그 참상을 다 말할 수 없었다.


이것은 적 일본군이 간도 침입 후 저지른 전고 미증유의 만행에 대한 백암((白岩) 박은식朴殷植)의 (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하편 제30장 ‘왜적 학살 아 양민 지 대참화)’ 논술이다.


과연 일본군이 혼춘사건을 구실로 삼아 간도 지방에 침입한 후 우리 거주 동포들에 대한 잔인 무도한 만행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들이 정작 대병을 간도 지방으로 투입한 것은 1920년 10월 2일 이른바 혼춘사건이 있은 후의 일이지만 실은 그 지방에 있는 우리독립군의 세력이 성장 발전함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들의 소위 ‘불령 선인 초토 계획(不逞鮮人剿討計劃)’을 작성한 것은 이미 벌써부터의 일이었다.

 

때문에 저들은 간도 침입과 함께 진작부터 우리 독립운동단체 간부의 본적·성명·주소·연령·용모·특징·경력 등과 독립운동단체 소재지의 지리 등을 정밀하게 조사하여 가지고 나갔다.


따라서 적측은 10월 상순에 기림(磯林)·목촌(木村)·동지대(東支隊) 및 보병 제28여단의 대 병력을 혼춘(琿春)·연길(延吉)·왕청(汪淸)·화룡(和龍) 등 각 현에 침입시켜 계획에 의한 소위 초토(剿討) 작전을 전개하여 각처에서 독립운동단체 및 간부들의 소재지를 습격하였다. 또 두만강(豆滿江) 연안 지역의 무산(茂山)·온성(穩城)·회령(會寧)·종성(鍾城)· 경원(慶源)·경흥(慶興) 등 각지의 경찰서 및 강 내·외 주재 파견의 헌병 경찰대들까지 동원하여 대규모적 전투, 살인 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2)

 

그러나 적측의 이러한 계획과 활동은 거의 실패에 돌아가게 되었다. 즉 적측의 이러한 공세를 예측한 독립군에서는 이미 중국측의 양해를 얻어 혹은 오지로 자리를 옮기고 혹은 병력을 나누어 산병전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계획하였던 독립운동단체의 소재지 및 간부진에 대한 소위 ‘토벌 작전’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여기에 다시 독립군의 주력 부대를 추격하던 적의 동 지대(東支隊) 병력이 뜻밖에도 청산리(靑山里) 부근 전투에서 큰 패전을 당하고 보니 기고 만장, 독립군을 당장 섬멸할 듯이 날뛰던 저들 적군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벼르고 별러서 억지의 구실을 붙여 겨우 진행하던 계획이 결국은 허사가 되고만 셈이었다.


여기서 적 일본군은 그들의 포학 잔인의 근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독립군을 공격하는 대신 우리 동포가 있는 각 부락을 닥치는대로 습격하여 무참한 살륙 행위를 강행하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소위 독립군 초토(剿討) 계획의 형식적인 실적을 올려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간도일대에서 영농 생활을 하던 대다수의 우리농민들을 닥치는 대로 결박·살륙하였다.

저들의 제19사단 사령부가 1920년 12월 20일자로 조사 작성 한 소위 초토 결과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