精神을 건강하게/독도,일제침략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동양평화사상

하늘벗삼아 2012. 8. 6. 10:01






“안중근에 대한 사형은 3월 26일 오전 10시 집행됐다. 유언이 있느냐고 물으니 ‘유언은 없다. (이등박문 저격은) 동양평화를 위해 한 일이다. 여러분도 동양평화를 위해 노력해 달라’고 답했다. 이어서 동양평화 만세 삼창을 요청했으나 불허했다. 백지와 백포로 눈을 가리고 기도를 허락했다. 안중근은 약 2분간 묵도했다. 2명의 간수에 이끌려 계단을 올라 효수대로 향하는 그의 모습이 아주 조용했다. 사형 집행을 끝내니 10시 4분이었다. 이날 안중근은 고향에서 보내온 조선복(상의 백색, 하의 흑색)을 입고 가슴에 성화를 안았다. 그 태도가 아주 침착하여 안색은 물론이고 언어조차 평상과 조금도 다름없이 태연자약하였다. 죽음이 닥치는데도 옥중에서 전기(‘안응칠역사’)를 탈고하고 ‘동양평화론’ 총론과 각론 1절을 썼다.”

 

 

이태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영웅 안중근의 최후’를 기록한 일본측 보고서와 일본인 통역관 소노기(園木)의 회고를 소개하는 것으로 강연의 서막을 열었다. 안중근 순국 101주기를 이틀 앞두고 열린 강연이라 그런지 강연장의 분위기는 사뭇 엄숙했다. 사형 집행 직전에 촬영한 흑백사진 속에서 안중근은 의연함을 잃지 않은 채 청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안중근은 의사(義士)인가, 장군(將軍)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별 문제의식 없이 ‘안중근 의사’라고 불러 왔다. 하지만 의사라는 호칭은 다분히 개인적 의분에서 촉발된 행위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더욱이 안중근 본인은 법정에서 일관되게 자신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고 소개했다. 일제는 1910년 2월 6일부터 14일까지 8일 동안 급행으로 공판을 진행하고 사형을 언도했다. 당시 4회의 진술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때마다 안중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적장을 처단했다. 따라서 나에게 적용할 것은 만국공법의 육전 포로에 관한 법이다.’ 하지만 일제는 이 거사를 극구 개인 행위로 격하시켰다. 우덕순, 조도선 등 ‘공범’도 사실 ‘친구’일 뿐이라며 석방했다.”

 

 

 

 

 

 

안중근 ‘의사’ 아니라 ‘장군’이다

 

물론 거기에는 일본의 의도가 있었다. 일본은 한국이 스스로 일본의 보호국이 되기를 바란다고 국제사회에 선전해왔다. 그런데 안중근이 법정에서 “1899년 만국평화회의 때 ‘육전 포로에 관한 법’이 개정돼 의병도 교전단체에 포함시켰으니 나를 포로로 대우하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것은 한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일본의 침략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아직도 식민사관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 많다. 안중근을 ‘의사’라고 불러온 것도 그 중의 하나인데, 본의 아니게 일본의 의도에 따른 셈이다. 당장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면 적어도 본인이 주장한 ‘대한의군 참모중장’을 병기하는 것이 옳다. 그런 점에서 육군본부 참모총장 작전회의실 중 하나를 ‘안중근 장군실’로 명명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대한의군은 고종황제가 1907년 7월 간도관리사 이범윤과 연해주 고려인 대부 최재형에게 군자금 30만엔(쌀 10만석)을 보내며 항일기지 건설을 독려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설립됐다. 1908년 5월 정식으로 발족한 대한의군은 대한제국 궁내성 관리로 의병활동을 했던 김두성을 의병총독으로, 안중군을 우장군으로 세우고 회령과 영산 등 국내로 진공하는 군사작전을 펼쳤다.”

 

두만강을 건넌 안중근 부대는 일본군 50명을 포로로 잡는 전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수용시설이 없을 때는 포로를 방면한다’는 만국공법을 준수했다가 위치를 추적당해 역공을 당한다. (지나친 감성적 휴머니즘은 죄악이다.) 패전의 충격에 시달리던 안중근은 12명의 동지와 ‘단지동맹’을 맺고 나라를 찾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했다. 하얼빈 거사에 제일 먼저 자원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안중근은 왼손 약지를 잘라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썼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안중근이 생명을 바쳐 살리려 했던 대한제국을 ‘형편없는 나라’였다고 폄훼하는 정서가 있다. 분명히 밝히건대 그것은 사실과 전혀 다른 편견일 뿐이다. 대한제국과 고종황제는 근대국가를 건설하며 영세중립국을 지향했다. 영세중립에 필요한 군사력은 3~5만인데, 대한제국은 기마병을 포함 시위대와 진위대 등 근대식 군대를 체계적으로 양성했다. 도시 개조에도 적극 나서 넓은 도로 위로 전차가 다녔고 전봇대가 즐비했다. 서울에 전차가 달리기 시작한 것이 1899년인데, 동경보다 3년이나 빠른 시점이다. 서대문에 철도정거장이 들어선 것도 러일전쟁 이전인 1901년이다. 이런 것들 전부가 일본이 들어와 해준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물론 그것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실과 전혀 다르다. 도리어 일제는 군대를 해산하고 철도부설권을 탈취하는 등 대한제국이 근대국가로 성장하는 것을 방해했다. 사실 대한제국과 고종황제가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 노력했다면 일제가 한반도에 침략할 명분이 없어진다. 일제가 유포한 ‘무능정부·바보군주’ 구도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중근과 이등박문의 격돌에는 국제정치적 배경이 있었다. 하얼빈-우스리스크-블라디보스톡으로 이어지는 동청철도 부설권을 청국으로부터 할양받은 러시아 재정대신 코코세프의 원래 파트너는 미국의 철도왕 해리만이었다. 그런데 해리만이 갑자기 죽었고, 이등박문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것은 연해주에 독립기지를 구축하던 한국인에게 너무나 위협적인 일이었다. 고종을 포함해 국가적 차원에서 이등박문을 처단하려는 모든 노력이 경주되었고, 마침내 10월 26일 오전 9시 운명의 시간은 오고야 말았다.

 

내각-외무성-여순도독부 지휘체계로 이어진 일제의 내밀한 정탐망에도 ‘배일의 본원은 한국 황실’이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실제로 고종황제의 비밀첩보기구인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가 중차대한 역할을 맡았다.”

 

 

아시아의 미래 담긴 ‘동양평화론’

 

이 위원장이 설명한 하얼빈 거사의 지휘체계는 이렇다. 고종황제와 비밀리에 연결돼 있던 제국익문사 요원 중 정재관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총책으로 스티븐슨 저격을 성공시킨 그는 하얼빈 거사 직전에 서울을 거쳐 연해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여기서 최재형 등과 대한의군 참모부 회의를 열고 특파대(안중군,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를 구성했다.

 

 

“그렇다면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과 그가 혈서로 충성을 맹세한 ‘대한제국 국가원수’ 고종황제는 어떤 관계였을까? 나는 안중근의 유묵(遺墨), 즉 붓글씨에서 그 단서를 찾았다. 사형 언도를 받고 상고를 포기한 안중근은 자서전을 탈고한 다음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면서 약 60점의 붓글씨를 남겼다. 예외 없이 맨 뒤에 이름이 적혀 있고 손도장이 찍혀 있는 붓글씨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증여 대상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꼼꼼하게 살펴보면 증여 대상의 유무에 따라 이름 뒤에 붙는 표현이 다르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증여 대상이 있으면 ‘안중근 근배(謹拜)’라고, 없으면 ‘안중근 서(書)’라고 쓴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증여 대상이 없는데도 근배, 즉 ‘삼가 절한다’라고 쓴 유묵이 석 점 있다.”

 

 

이 위원장은 청중에게 직접 유묵을 보여주었다. 우선 ‘위국헌신 군인본본(爲國獻身 軍人本分)’과 ‘임적선진 위장의무(臨敵先進 爲將義務)’가 눈길을 끌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 ‘적을 앞에 두고 먼저 나가는 것은 장수된 자의 의무’라는 뜻으로, 자신이 군인의 신분임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유묵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마지막 유묵 ‘사군천리 망안욕천((思君千里 望眼欲穿) 이표촌성 행물부정(以表寸誠 幸勿負情)’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천리 밖 임금을 걱정하니 바라보는 눈 뚫어지려 하네. 작은 충성 표하였사오니 저의 정성 잊지 마소서’라는 뜻인데, 이게 과연 누구에게 보낸 것이겠는가. 나는 안중근이 죽기 전에 국가중심인 고종황제에게 보낸 편지라고 확신한다. 문제는 ‘무능정부·바보군주’ 덫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이런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여순·대련 반환과 평화회의기구 설치 △한·중·일 공동군단 설치와 참가 청년 다른 2개 나라 언어 학습 △공용화폐 발행과 은행 설립(수억의 동양인 1엔씩 모금해 회원제로 운영, 성공하면 태국과 인도로 확대) 등이 담긴 ‘동양평화론’에 아시아의 미래가 있다.” 정리=정지환 인간개발연구원 편집위원/감사나눔신문 편집국장 lowsaejae@gamsa.or.kr

 

 

이태진 위원장의 이력

 

▲ 서울대 사학과 졸업 ▲ 서울대 사학 석사 ▲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문화연구소장, 인문대학장, 명예교수 ▲ 역사학회 회장 ▲ 미국 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 방문교수 ▲ 한국학술단체연합회 회장 ▲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장 ▲ 교육과학기술부 동북아역사재단 비상임이사 ▲ 안중근하얼빈학회 공동회장 <상훈> 치암학술상, 제43회 백상출판문화상 저술상, 제51회 3.1문화상 학술부문 수상 <저서> 고종시대의 재조명, 한국병합의 불법성 연구(공), 왕조의 유산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서,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 :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동양평화론(공)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