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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淸日戰爭):1894~1895년

하늘벗삼아 2014. 2. 11. 00:28

청일전쟁(淸日戰爭):1894~1895년 

 

1880 년대, 값싼 노동력을 발판으로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은 아시아에서는 가장 빨리 자립적으로 근대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급속히 발전하던 일본의 경제에 위기가 왔다. 유럽 산업혁명의 영향과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일으켰던 섬유공업, 그리고 제국주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군수공업의 문어발식 확장으로 경제가 어려워졌던 것이다. 또한 1889년에는 흉작으로 쌀 생산량이 크게 감소하여 설상가상의 상태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1890년도 일본의 무역은 심각한 적자 상태에 직면했다. 결국 일본은 시장 확보를 위해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전에 일본은 이미 제국주의적 대외진출을 도모하기 위해 1871년에는 청과 수호조약(교제를 갖자고 약속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화친관계를 맺었었다. 그러나 두 나라는 동아시아의 패권(으뜸가는 권리)을 두고  갈등이 심화되었다. 1874년 류큐인이 타이완인에 의해 살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타이완에 병사를 보내 청의 간섭을 받지 않고 타이완을 일본의 세력권 아래에 두게 되었다. 그 후 1879년에는 종래 양국이 종주권을 주장해 오던 류큐를 병합하여 오키나와현을 설치하였고, 중국은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으로 들어온 세계의 열강들 중 영토분할을 주도하고 있던 영국은  러시아를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적수로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영국은 일본이야말로 러시아의 세력을 견제해 줄 가장 강력한 동맹국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미국도 영국처럼 러시아를 위험시하고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를 견제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분위기만 살피고 있었다.

영국, 일본 등 서양 열강들의 중국 나누어 먹기.

(중국이 뒤에서 "안 돼!"라고 외치지만 열강들은 들리지 않는 듯...)

 

그 런데 1894년 조선에서 갑오농민전쟁이 발생했다. 당시 조선의 지주들은 소작인들에게 막대한 이득을 취했으며, 고리대금업으로 농민들을 점점 낭떠러지로 몰고 갔다. 특히 전라도 지방 지주들의 횡포가 가장 심했는데 이 지역에 동학 사상이 전파되면서 농민들은 혁명을 외쳤다. 그리고 마침내 척왜척양(일본과 서양 세력을 배척)를 부르짖으며 전봉준을 필두로 관군과 대립했다.

 

갑오농민전쟁의 필두였던 전봉준의 생가(브리테니커 백과 사전)

 

순 식간에 남부지방 전역을 휩쓴 농민군의 기세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농민군 진압을 위하여 청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6월 8일 청군 2,400여 명이 아산만에 상륙하여 12일부터 군사행동을 시작했다. 조선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은 톈진 조약(조선에서 이후 변란이나 중요사건이 발생하여 청일 두 나라 또는 어느 한 나라가 파병할 때는 먼저 문서로 연락하고,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철병할 것)에 의거하여 청군의 조선출동 통고를 받자마자 곧 조선에 침입했다. 그들은 일본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 아래 해군과 육군의 대부대를 파병했고, 이어 인천과 서울간의 요충지를 장악했다.

 

요 청은 청나라에 했는데 일본군이 침입하자 당황한 조선정부는 갑오농민전쟁이 이미 진정되었다고 하면서 양국(청나라. 일본)의 철병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의 오오토리 공사는 갑오농민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하면서 조선의 내정개혁을 요구했다. 이는 조선을 보호국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보호국이란 다른 나라에 외교와 내정을 감독받고 제한받는 나라를 말한다. 그러자 조선정부는 일본이 철수해야 내정개혁을 실시할 수 있다고 하며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일본은 7월 23일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쿠데타를 통해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했고, 1894년 7월 25일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8월초에 일본군은 아산, 공주, 성환 등지에 포진하고 있던 청군에 공격을 가하여 승리하고, 계속 북상하여 9월에는 평양에서 청군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에게 격침되는 청나라의 배. 왼쪽은 일본 함대, 오른쪽은

청나라 군함. 정말 섬나라 오랑캐로만 알고 있던 일본의 힘이 이렇게 대단한

것을 보고 청나라는 깜작 놀랐을 겁니다. 물론 우리도 놀랐죠.)

 

(성환전투 : 1894년 7월 29일) : 왜 너네들은 남의 나라에 와서 싸우고 그랬니, 응?

 

청군은 9월 16일 밤 평양을 포기하고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 평양전투의 승리를 전기로 하여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평양 전투 : 1894년 9월)

 

일 본군은 식량은 물론 전쟁에 필요한 부수 물자를 모두 조선에서 얻었으므로, 전쟁터가 된 조선의 민중은 큰 피해를 입었고 조선은 자주권을 잃었다. 농민들은 척왜를 외치며 항쟁했으나 12월 우금치전투에서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훈련된 일본군에게 패배했다. 조선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청나라를 격파한 일본군은, 10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본토로 진격하고 11월 6일 진저우 성을 점령했다. 부패한 청군 지도부의 무책임한 대처는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켜, 11월 22일 뤼순이 점령되었다. 일본군은 뤼순 시내에서 시민과 포로 약 6만 명을 학살하고 시가지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쟁에 패한 청나라는 강화를 시도하고 대표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이홍장을 강화 전권 대사로 하는  대표단을 시모노세키에 파견하여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1. 배상금 2억 냥(3억 엔) 지불

2 .랴오둥, 타이완, 펑후의 할양

3. 쑤저우 등 4개 도시의 개항

4.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 파기

를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산둥 반도 부근에 함대를 집결시키고 랴오둥 반도 포기를 권고해왔으므로 일본은 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랴오둥 반도 반환의 보상으로 일본은 3,000만 냥을 더 얻었다.

 

 

청 일전쟁은 이후 동아시아 3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얻은 막대한 배상금 등 제반 이익을 바탕으로 어려웠던 일본 자본주의 경제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조선은 갑오농민전쟁의 자주적 개혁이 좌절되어 일본과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대상으로 되어갔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중국의 땅은 열강들로부터  본격적으로 분할이 진행되어 동아시아에 제국주의시대의 막이 열렸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더니 일본이 제국주의를 표방하면서부터 우리 나라는 그야말로 연속해서

새우의 처지가 되었다. 등이 터질 때마다 살아남기 위해 피를 토했다. '청일전쟁'은 우리 나라의 고난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이 글은 두산 대백과 사전, 브리테니커 백과 사전에서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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