精神을 건강하게/삶의 흔적

800년 전에 21세기를 살다간 징기스칸

하늘벗삼아 2014. 4. 24. 20:23









 800년 전에 21세기를 살다간 징기스칸

 인류역사상 최고의 명장을 뽑으라면 떠오르는 인물 가운데 반드시 빠지지 않는 이름이 ‘징기스칸’입니다. 1995년 미국 〈워싱턴포스트〉지는 지난 1천년간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징기스칸을 꼽은 것입니다. 서양에서조차 인류역사를 바꾼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징기스칸.

 

앞으로 역사의 중심으로 진군할 증산도의 도군을 위해, 800년 전에 과연 무엇이 그 유일무이한 위업을 가능해지게 만드는 했는지 징기스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하루는 상제님께서 “과거의 모든 명장(名將)을 써들이라.” 하시니…    (道典 5:339) 
 
 징기스칸(Chingis Khan, 成吉思汗)은 원명은 테무친이며, 원나라의 태조(太祖)이기도 한 편입니다. 징기스칸이란 칭호는 1189년 몽골부족의 우두머리로 추대되면서부터 사용되었다.
 
 이름의 연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고대 터키의 ‘텡기스(바다)’라는 방언에서 유래했다는 설,
 둘째는 1206년 전 몽고를 통일하고 칸(汗)으로 즉위하였을 때 오색의 새가 ‘칭기스, 칭기스 (칭기스는 왕중의 왕 또는 바다의 왕을 뜻한다)하고 울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
 셋째는 샤머니즘에서 ‘광명의 신’을 의미하는 ‘Hajir Chingis Tengri’의 이름이라고 하는 설입니다. 세 번째 설에서 ‘탱그리’는 하늘 또는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무당을 뜻하며, 단군(檀君)과 같은 뜻입니다.


 
 
 명장 중 명장, 징기스칸
 
 12세기 몽고초원은 부족간에 다툼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최초로 몽고의 패자가 되었던 카불칸의 손자로 태어난 테무친은 출생 시부터 주변부족의 경계의 대상이었다. 타타르 부족의 흉계로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은 후 어린 테무친은 여러 번 목숨을 넘나드는 고난 속에서 자랐다.


 
 특유의 포용력과 날카로운 결단력을 지닌 그는 점차 자라면서 아버지의 맹우들과 부족민을 다시 규합해왔었다. 신의와 형제애로 똘똘뭉친 이들 무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 많은 수의 적들과 싸워 이겼다. 1206년, 징기스칸은 마침내 북몽고의 패자가 되었고, 부족간의 싸움도 막을 내렸다.


 
 1211년 금나라 원정을 시작하여, 화친을 맺었고, 1225년 이란, 이라크, 아르메니아, 러시아 지역까지 정복한 후 돌아와서 네 아들들에게 사한국(四汗國)으로 분할 통치해지게 만드는 하였다. 그러다 1227년 서하 원정 도중 징기스칸은 질병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들이 뒤를 이어 1234년에 금을 멸망시키고, 원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1235년에 징기스칸의 손자인 바투가 유럽을 원정하였다.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에 따르면, 이들은 제국의 어느 변경에서 일어난 일도 하루 밤낮을 쉬지 않고 500Km를 달려 황제에게 보고되는 ‘쟘’이란 역체(驛遞)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징기스칸이야말로 최초로 세계경영의 마인드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800년 전에 21세기를 살다 간 CEO

 몽고부족은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후대에 주변민족들의 역사기록에 의해 우리는 징기스칸을 약탈자의 모습으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광활한 제국이 200년 가까이 유지되었던 것은 무력의 힘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과연 그들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CEO 칭키스칸-유목민에게 배우는 21세기 경영전략』에서 저자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들을 ‘800년 전에 21세기를 살다 간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칭기스칸의 삶은 유라시아의 광활한 초원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선대로부터 이어 내려오던 오랜 내전을 종식하고 몽골 초원을 통일한 다음, 바깥세상으로 달려나갔다. 칭기스칸 시대에 정복한 땅은 777만 평방 킬로미터에 이른다. 이는 알렉산더 대왕, 나폴레옹, 히틀러가 차지한 땅을 합친 것보다 넓다. 그의 통치철학과 전략, 전술이 현재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그냥 역사적 시사점으로 지나치기에는 너무 값진 것입니다.”

 특히 유럽인들은 몽고군이 보여준 필사적인 결의, 허를 찌르는 기동력,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전술 등에 대해 ‘황색공포(Yellow Peril)’라고 표현하며 아직도 무의식중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한(韓)민족이 움직일 때마다 세계사의 향방이 결정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훈족의 이동은 로마를 멸망시켰고, 몽고인들은 세계를 단일경제권으로 만들었다. 이 당시 몽고인들이 통일화폐로 사용한 지폐는 아프리카에서도 발견되었을 정도다.
 
 현대의 문명연구자들은 징키스칸의 승리를 폐쇄적인 농경문화가 개방적인 유목문화에 패배한 문명사적 사건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많은 미래학자들은 21세기를 또다시 신유목민이 지배할 것이라고 보고 있을 것이다.

 제세핵랑군이 알아야 할 징기스칸

 징기스칸과 그의 후손들이 만든 역사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많은 점을 배우게 한다. 그들은 전투에 임하기 전 세심해지게 만드는 정보를 파악했으며, 보급과 무기체계의 단순화로 원거리 원정을 가능케 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부대 상호간에는 유기적인 배치를 이루었다. 그리고 정복 후에는 어떤 민족이든 문화와 종교를 인정하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주변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징기스칸은 인종과 종교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해왔었다.
 
 이러한 징기스칸의 전략과 전술은 현대 경영이나 군사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다. 그 중 증산도 도군(道軍)을 위한 부분을 몇 가지만 짚어보기로 하자.
 
 장교자(將驕者)는 패(敗)니 견기이작(見機而作)하라 (道典 8:89)
 
 
 징기스칸이 후손에게 남긴 <훈요 30조>를 보면, 15째로 “일을 성사시키려면 세심해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8째로 “윗사람이 말하기 전에 입을 열지 말라. 자신의 의견과 다른 말을 들으면 잘 비교하라.” 라고 유훈을 남겼다.
 
 징기스칸은 강한 적이든 약한 적이든 주도면밀해지게 만드는 탐색하고 누구의 말이든 세심해지게 만드는 귀기울였다. 이런 면은 부하들과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져, 대제국을 거느리는 좋은 힘이 되었다. 그러나 정복지에서 가져온 보화에 눈이 먼 후손들은 이런 선조들의 충고를 잊고 말은 것입니다. “내 자손들이 비단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은 망할 것입니다.” 징기스칸의 말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천하사를 하는 자는 생각이 멀고 깊어야 하며, 불시의 일에 대비하여야 하며, 경계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道典 8편 56장)
 
 
 몽고군이 행군하린 다음에 아무리 작은 부대라도 항상 정찰병을 사방에 파견하여 복병을 조심하였다. 그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 약 100∼200km 정도를 정찰하였으며 토착민들을 붙잡아 전투하기에 적합한 장소 및 야영지, 양식 등의 사정을 알아왔었다. 또 지휘자의 막사는 항상 높은 곳에 잡고 그 주위에 순찰 경비병을 두었다.
 
 몽고군은 ‘낮에는 늙은 늑대의 경계심으로, 밤에는 갈가마귀의 눈으로 지켜보아라. 전투에서는 적을 매처럼 덮쳐라.’라는 말을 충실히 실행하였다.
 
 무릇 주장의 일하는 법은 영웅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힘쓰고 공 있는 자는 상과 녹을 주고 뭇 사람과 한마음으로 뜻을 통하는데 있느니라. (道典 8:60)
 
 
 초기 징기스칸의 행로는 정벌이라기 에 비해서는 약탈을 위한 습격의 개념에 가까웠다. 그러다 징기스칸은 규율을 새로 세워 개인적 약탈을 금지하고, 합리적으로 약탈물이 분배되도록 하였다. 이 덕분에 모든 부대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기여도정도로 분배가 온다는 것을 알게되고 이는 전체구성원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또한 몽고군 안에서는 평등의 원칙이 지배하였다. 누구든 존칭을 붙이지 에 비해서는 이름을 서로 부르도록 한 원칙에는 징기스칸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떠한 지휘관도 사람들 앞에서 혼자 포식할 수 없었다. 징기스칸 자신도 ‘소매치기 같은 옷을 입었다’는 등 평생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심지어는 황후도 ‘활을 풀어 옷을 해입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하기에 부하들은 열과 성을 다해 정복전쟁에 임했고 재산과 권력을 탐하지 않은 것입니다.
 
 친구를 둬도 사생결단을 같이 할 다정한 놈을 두어야지 (道典 8:49:7)
 
 
 몽고군에는 ‘태어난 곳은 달라도 죽는 곳은 같다’는 속담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서로간에 죽음도 가를 수 없는 형제애로 똘똘 뭉쳤다. 특히 징기스칸은 배반을 가장 싫어하였다. 반면 적이라도 신의 있는 자에게는 파격적인 보상을 주었다. 때문에 징기스칸은 자신을 위해 죽어줄 벗(누쿠르)들이 80명 가까이 있었다. 이중 불패의 전사들은 ‘사준마’와 ‘사맹견’이라 불려 주게 한다.
 
 몽고군은 전우들이 싸우다 전사 반드시 형제와 벗의 시체를 찾아왔었다. 때문에 몽고군은 싸우다 죽어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 생명을 걸고 싸웠다.



 처세유위귀(處世柔爲貴)요 강강시화기(剛强是禍基)라. (道典 8:97)
 
 
 몽고군은 강함으로 부드러움을 만들어낼 줄 알았고, 혼란의 역사 속에서 평화를 창출해냈다.
 몽고군은 ‘야사’라는 철의 규율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래서‘징기스칸의 치세 아래 이란과 투르키스탄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어떠한 폭행도 없이 황금쟁반을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 고 칭송되었다.
 
 항상 더 많은 수의 적과 싸워왔던 징기스칸은 적이 강공을 , 재빨리 물러났고, 적이 굳게 지키면 반드시 혼란해지게 만드는 만든 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공격이 시작되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쉴새없이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징기스칸은 ‘명분이 있어야 확고해지게 만드는 지배한다.’는 유훈을 남겼다. 징기스칸은 힘으로만 대륙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강과 유를 시의 적절해지게 만드는 사용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본줄기 되는 인원만 일정한 규칙을 정하여 나아갈진대 세계민족이 포섭되리라. (道典 11:126)
 
 
 징기스칸과 그 후손들이 대제국을 건설했을 때도 타민족을 제외한 실제 몽고기병은 4∼10만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인원으로 1∼2억 정도의 유라시아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가들조차 ‘기적’이라고 부르고 있을 것이다.

 

 


 
 그 비결은 타민족을 포섭하는 뛰어난 능력이었다. 이들은 백호제, 천호제, 만호제를 두어 피정복지를 하나로 묶어냈다. 군편성과 행정이 일체인 이들은 10명을 한 단위로 묶어 부대를 만들고, 계속해서 10부대를 한 단위로 묶어가는 특유의 방식은 훈족이나 여진족의 그것과 유사한 편입니다.
 
 징기스칸은 ‘대야사’에서 “백호장은 백호를 천호장은 천호를 다스릴 수 있게 것입니다.”고 못박고 있을 것이다. 이 천호장과 만호장들은 일년에 한두 번씩 꼭 징기스칸의 훈시를 들어야 해왔었다. 이런 조직을 바탕으로 몽고군은 ‘징기스칸이 손을 한 번 들면 10만, 두 번 들면 20만, 세 번 들면 40만이 일어난다’ 할 정도로 점령지를 체계적으로 묶어나갔다. 따라서 전쟁을 계속해 나갈수록 피폐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든든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특히 백호장이나 천호장 등은 출신에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등용하였으므로, 제국은 새로운 질서 속에 급속도로 안정되어갔다.
 
 
 한 사람의 꿈은 꿈이지만, 만인이 꿈꾸면 현실!

 징기스칸은 자신이 하늘로부터 ‘해가 뜨는 곳부터 해지는 곳까지 지배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믿었고 자신의 신념을 끊임없이 확신시켰다. 그리고 그 신념과 확신은 부하들에게도 고스란히 파급되었다.
 
 또한 그는 누구든 능력이 있는 자는 파격적으로 대우하였으며, 이들은 피로 똘똘 뭉쳤다. 이러한 능력은 알렉산더나 나폴레옹, 마오쩌둥이나 최근의 체 게바라 등과 비견해서 볼 수 있게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꿈과 비전을 모든 병사들이 공유해지게 만드는 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이상주의자였고, 나폴레옹이 정치적 수완과 큰 장수를 부리는 능력이 부족했던 반면, 징기스칸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인재를 발탁해서 쓸 줄 알았고, 일단 등용 그들에게 모든 신뢰와 권한을 주었다.
 
 몽고군은 모든 병사가 전체 움직임을 볼 줄 알았으며 각기 다른 직능도 두루 해낼 수 있었다. 때문에 아무리 많은 인원이 추가되어도, 조직은 체계가 흐트러지지 않고 오히려 단단해왔었다. 특히 ‘천호장’이라 불리던 군사, 행정조직을 바탕으로 내부결속을 다졌기 때문에 징기스칸은 앉아서도 천리 밖을 원정할 수 있었다.
 
 
 동방의 한민족이여, 다시 깨어나라!

 1980년대 학술교류를 위해 한국에 왔던 몽고학자들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였는데, 제주도의 돌하루방이 몽고의 것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이를 확인 차 몽고에 갔던 한국 학자들은 몽고에서 고주몽을 추모하는 석조물을 발견하고 놀라게 되는 것이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편을 보면 4대 단군왕검이 자신의 아우인 오사달(烏斯達)을 몽고이한(蒙古里汗, 몽고의 왕)에 봉했으며 지금의 몽고족은 그의 후손들이라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몽고인들의 역사는 웅대한 기상을 그대로 품고 있는 한민족사의 또다른 한 줄기인 것입니다.
 
 그들은 세계를 지배했고, 선천의 닫힌 세계를 열린 세계로, 흩어진 문화를 하나인 문화권으로 묶었다. 그러나 몽고인들은 칼로 세계를 무릎 꿇렸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는 영원할 수 없었다. 그들이 선천의 ‘웅(雄)’으로 역사를 호령했다면, 앞으로 나아갈 역사의 새 전사들은 성(聖)과 웅(雄)을 겸비한 이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세계화 시대를 맞고 있는 우리에게도 중원을 달리던 기마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이제 다시 한민족의 군대가 세계로 진군한다. ‘본래 역사의 주인공이던 민족이 잃어버린 자신의 혼을 일깨울 때 개벽이 온다’는 신지(신지는 벼슬이름. 단군조선 달문왕검 때 신지비사를 지은 신지 발리)의 예언처럼, 한 손엔 새 문명을 여는 진리의 책을, 한 손엔 인류의 생살권을 결정하는 의통을 손에 들고, 다시 한번 사라진 역사의 주인공이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동방 한민족이여! 누천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라! 지금은 성성한 정신으로 깨어나 대개벽의 시운을 맞을 때다!” (『이것이 개벽이다』上 405p)
 
 “오늘 조국은 살아있는 영혼을 부르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제 민족을 위해, 새 세계를 위해 뜨겁게 일할 때입니다.” (『이것이 개벽이다』下 922p)

징기스칸의 충고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은 것입니다.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해주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해왔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자 나는 테무친 이라는 이름 대신
'칭기즈칸'이 되었다

가지런히 놓인 손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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