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성이 강한 차 보이차(普이茶)
차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익히 보이차(普이茶)의 명성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최근에는 여러 찻집에서도 쉽게 보이차를 맛볼 수 있으니 맛으로도 그 명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중국(中國) 명차(名茶)의 하나인 보이차는 각종 차 중에서도 강한 개성을 가지고 있는 차이다. 먼저 대부분의 차들이 채집에서 가공까지의 시간이 짧은 햇차를 중요시하고 귀히 여기는데 보이차의 경우 제조과정에서 오래 묵히면 묵힐수록 고가품의 차가 된다. 대체로 20년 이상이면 최고품에 든다고 하니, 어두운 밀실에서 적당한 온도에 오래 묵힐수록 높은 가격과 명성을 얻는 포도주와 같다고 하겠다. 게다가 보이차는 미생물의 발효라는 특이한 제조과정을 거치는 차이므로 개성적이라고 하면 이를 따를 차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보이차(普이茶)는 운남성(雲南省) 서쌍판납(西雙版納), 사모(思茅) 등지에서 생산되는 중국의 명차(名茶)이다. 보이차의 명칭은 생산된 지명을 따서 붙인 것이 아니라 그 지역 차의 집산지명을 따서 붙인 것이다. 옛날 서쌍판납 등지는 보이부(普이府) 관할지역에 있었고 그 인근 지역인 당시 전남(전南) 등지에서 생산된 차는 모두 보이부에 집산되었다. 보이부를 통해 이 지역에서 생산된 차가 공급되었으므로 붙여진 명칭인 것이다. 최근에는 운남성(雲南省) 뿐 아니라 광동성(廣東省)에서도 소량이지만 보이차가 생산되고 있다.
보이차는 후발효차(後醱酵茶)로 흑차(黑茶)류에 속한다. 차잎을 우려낼 때 보면 마치 녹물이 흐르는 듯한 진한 적갈색이 인상적이며, 다 우러난 색은 홍차와 유사한 적갈색을 띤다. 차맛은 떫은 맛이 없고 약간의 곰팡이 냄새가 나는데, 이 독특함 때문에 처음 접한 경우 낯설으나 맛을 들이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보이차의 이러한 맛은 기름기가 많은 음식과 잘 어울린다. 따라서 중국요리 중에서도 기름을 많이 사용하는 광동(廣東)요리를 먹은 뒤 보이차를 마시면 구색을 잘 맞힌 것이 된다.
보이차의 제조 방식은 독특한 맛과 같이 특별한 공정과정을 거친다. 먼저 보이차에 사용되는 차잎은 운남대엽종(運南大葉種)이다. 원료 차잎을 덖음 녹차와 같이 가열 처리하고, 적당히 수분을 가하여 대나무 통이나 상자에 퇴적시켜 공기 중의 미생물에 의한 발효가 일어나도록 한 뒤 숙성시켜 만든다. 미생물에 의한 발효라는 독특한 제조 과정과 그로 인한 향내 때문에 속칭 '곰팡이차'라고도 불린다.
보이산차(普이散茶)의 외형은 줄기가 굵고 잎이 비대하며 짙은 적갈색을 띤다. 보이차는 오랫동안 건강 음료로 알려져 왔다. 현대 임상실험을 통해서도 보이차가 콜레스테롤을 낮추고 비만을 방지하며 소화를 돕고 위를 따뜻하게 하며, 면역력 증강, 숙취해소, 갈증해소와 다이어트에도 효과가 있음이 입증되었다. 이 때문에 보이차는 일본, 독일, 이탈리아, 홍콩, 호주 등의 국가에서 '미용차' '비만해소차' '장수차' 등의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보이산차(普이散茶)를 원료로 하여 증압가공(蒸壓加工) 과정을 가친 긴압차(緊壓茶)로는 보이타차(普이타茶), 칠자병차(七子餠茶, 圓茶), 보이차전(普이茶전) 등이 있다. 최근 보이타차(普이타茶)는 외형상 솔방울 모양을 하고 있는데 진한 향과 독특한 맛으로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중국인도 몰랐던 차 보이차(普이茶)의 명성
옛날 보이차는 주로 덩어리차인 단병차(團餠茶)로 제조하였다. 가장 좋은 품질의 차를 아차(芽茶)라고 불렀고 3∼4월 채집한 차를 소만차(小滿茶), 6∼7월 것을 곡화차(穀花茶)라고 불렀다. 큰 덩어리 차를 긴단차(緊團茶)라고 하였고 작은 덩어리차를 여아차(女兒茶)라고 하였다. 청대(淸代) 조학민(趙學敏)이 쓴 『본초강목습유(本草綱目拾遺)』에 의하면, 가장 큰 보이차는 "한 덩어리에 5근(斤)으로 사람 머리만하다고 하여 인두차(人頭茶)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보이차(普이茶)는 생산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처음부터 중국인들이 생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국인들은 남송시대(南宋時代 1127∼1279)에 이르기까지 보이차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남송시대 사람 이석(李石)이 쓴 『속박물지(續博物志)』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서남이(西南夷)는 보차(普茶: 보이차)를 음용하였는데 이는 당대(唐代)부터이고 매병(每餠) 40냥(兩)의 가격으로 서번(西蕃)으로 판매되었다. 당항(黨項, 즉 西夏)에서 이를 귀하게 여겼다. 이러한 사실을 송(宋)나라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이 기사에 따르면, 서남지역의 소수민족들은 보이차를 즐겨 마셨는데 이는 이미 당(唐)나라 때부터이고 덩어리 차로 만든 이 차를 한 덩어리에 40냥의 가격으로 서번(西蕃), 즉 토번(吐蕃)에게 판매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사실을 당시 송(宋 960∼1270)나라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었다니 차가 문화의 종주(宗主)인 한족(漢族)만의 것이라고 자부할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중국차의 원산지가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 등 서남지역에 치우쳐 있는 것을 보아도 차 문화가 처음부터 중원의 문화가 아닌 지방 문화로서 발전되었으며, 이중 소수 민족 내지 주변 이민족들의 차 문화는 중국 차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이차의 명성은 명청대(明淸代)에 이르러 중국 전역에 자자해졌다. 『전략(전略)』에 "사서(士庶) 모두 보차(普이茶)를 마신다"고 하여 명대(明代) 보이차가 두루 애음되는 차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대에 이르면 그 명성이 더하여 『전해우형지(전海虞衡志)』에는 "보이차의 명성은 천하에 알려졌다. ……산에 들어가 차를 재배하는 사람이 수만인이고 차상인이 차를 매입하여 각처에 운반하느라 길에 가득 찼다"라고 하였다. 완복(阮福)이 쓴 『보이차기(普이茶紀)』에는 "보이차의 명성은 천하에 두루 퍼졌고 맛이 가장 진하다. 경사(京師)에서 더욱 귀중히 여긴다.……2월에 딴 섬세한 잎으로 만든 것을 모첨(毛尖)이라고 하였고 이를 진공(進貢)하였다. 진공한 후에야 민간으로의 판매가 허가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보이차의 명성은 명차(名茶) 중의 명차라는 반열에 올랐는데, 이러한 명성을 얻기까지 어떤 요인들이 작용하였을까? 물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인들에게 알려지기 이전부터 보이차는 귀한 차로 여겨진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제조방식과 개성있는 맛, 생산량 등 여러 요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 내지에서도 똑같은 명성을 얻게 된 것이 자연스러웠다고 할 수 는 없다. 독특한 제조 방식과 개성있는 맛은 자칫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과 같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운남 등 주변지역에서의 명성이 그대로 중국 전역에까지 이어지게 하였을까. 여기에는 개성있는 맛과 제조기술의 특징, 효능 등 여러 요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보이차에게 명차 중의 명차라는 명성을 얻게 해준 것은 만주족(滿洲族)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주족은 본래 중국 동북지역에서 유목과 수렵을 하던 민족으로 이들의 식습관은 육류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중국의 통치자로서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한 내지 지배생활을 하면서 풍부해진 식문화로 인해 소화작용이 강한 음료가 요구되었다. 여기에 적합했던 음료가 바로 보이차였던 것이다. 보이차의 효능에 관해서는 이미 명청대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데, 조학민(趙學敏)은 『본초강목습유(本草綱目拾遺)』에서 육식의 독을 해소시키는 능력이 강하고 소화와 담즙을 활성화하며 위를 깨끗하게 해준다고 하였다. 이로써 청 조정에서 보이차를 높이 평가하고 운남으로부터 진공(進貢)하게 하자 "보이차는 천하 명차 중의 제일이다" 혹은 "보이차의 명성은 천하에 두루 퍼져있고 …… 경사에서 더욱 귀중히 여긴다"는 등의 보이차에 대한 명성이 이어졌던 것이다.
이밖에도 음차(飮茶) 방식의 변화에 따른 영향이 보이차가 자연스럽게 알려지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주지하다시피 송대(宋代)까지는 덩어리차를 갈아서 마시는 점차법(點茶法)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는 차의 약용적(藥用的)인 인식에 따른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차법은 원대(元代)를 거치면서 거의 소멸되고, 명대(明代)에 이르면 포차법(泡茶法)이라고 하여 차잎을 그대로 넣고 우려 마시는 방식이 정착되었다. 이는 음료로서 기호적인 측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라고 하겠다. 즉 소금 등 인공적인 맛을 가미하거나 진한 맛을 즐기던 것에서 차 그대로의 맛을 즐기려는 경향이 높아진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경향은 보이차와 같이 개성있는 차 맛을 가지고 있는 차에 대한 관심의 고조로 이어졌고, 보이차는 운남과 토번(吐蕃)에서의 명성 그대로 자연스레 중국 내지에 알려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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