精神을 건강하게/삶의 역사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하늘벗삼아 2012. 9. 24. 00:01


 

 

 

결과의 평등은 보장 없겠지만....

기회의 평등은 꼭! 보장 되어야 한다,

어느 유명한(?) 장관 딸의 특채...


오늘날 노블리스 오블리제" 흔히 회자된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않다, 특히 고위층(?)의 실천은 가능성이 없는걸까?

첫번째 - 권력은 절대로 나누어 가질 수 없다.

두번째 - 사랑(여자) 또한 나누어 가질 수 없다.

서번째 - 돈 이 또한 절대로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ㅡ - 질투와 분노는 끝이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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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와 분노는 끝이없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 귀족이 목숨을 받쳐서 백성을 구한다, 위기에 처했을때 귀족과 양반이 먼저 나가서 싸운다,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말의 근원을 생각할때 이사벨 왕비가 생각났다.   부왕 에드워드2세를 처형하고 그 애인의 성기까지 잘라버린 질투의 왕비..  서릿발 돋는 이야기다.


(비참한 에드워드2세)

비참한 최후를 마친 왕은 영국 플랜타지넷 왕조의 에드워드 2세이다.
그는 스콧랜드 원정에 실패하는 등 부왕 에드워드 1세에 비해 소극적이라고 역사는 평가한다.
또 가베스탄이란 평민을 너무 총애하여 그에게 막강한 권력을 줌으로써가신들의 비난을 샀다.

가베스탄은 캔터베리 대주교를 처형하고 재정과 관직을 전횡하다가 암살당하고 에드워드는 슬픔에 잠기다가 다시 스펜서란 애인을 새로 얻는다. 


한편 프랑스 공주 출신의 왕비 이자벨은 권모술수에 능한 모티모어경과 결탁하여 왕을 몰아내고 아들 에드워드 3세를 즉위시켜 섭정한다.

이자벨은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 스펜서의 성기를 잘라 태우라고 명한다. 왕은 런던탑에 갇혀 있다가 달군 쇠막대를 항문에 꽂는 형벌을 받았다.


영국 왕실사는 이렇게 잔인한 피로 얼룩져 있었는데 에드워드 2세가 좀 더 자기의 사랑과 국정을 혼동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오블리스 노블리제칼레의 시민 조각상과 에드워드3세  


프랑스의 칼레의 시민이 생각나는군요.

우리의 조상중에도 그 사람들 못지않은 훌륭한 분들이 계셨다는게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칼레의 시민>은 조각가 로댕(Rene-Francois-Auguste Rodin: 1840-1917)이 제작한 조각 작품입니다.

칼레市가 1347년 영국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시민들을 위해 밧줄에 목을 매어 처형받기로 자원한 6명의 칼레시민들을 조각한 작품입니다.


1347년 도버해협 양쪽의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 때의 일입니다.

1년 가까이 영국의 공격을 막던 프랑스의 북부도시 칼레는 원병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백기를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칼레시의 항복사절은 도시 전체가 불타고 모든 칼레의 시민이 도살되는 운명을 면하기 위해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하였습니다.


완강한 태도를 보이던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항복의 조건을 내 놓았습니다.

"좋다. 칼레시민들의 생명은 보장하겠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동안의 어리석은 반항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 도시에서 가장 명망이 높던 대표적인 시민 대표를 골라 목에 교수형에 사용될 밧줄을 목에 걸고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로 영국군 진영으로 가서 도시의 열쇠를 건넨 후 목을 매 처형받아야 한다."


시민들은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습니다. 누군가 6명이 그들을 대신해 죽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용감하게 누군가 선뜻 나섰습니다.

모두 그 도시의 핵심인물이며 절정의 삶을 누리던 부유한 귀족이었습니다.


Eustache de St Pierre



칼레에서 가장 부자인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가장 먼저 자원했습니다.


"자 칼레의 시민들이여...나오라...용기를 가지고..."



그러자 시장이 나섰습니다.

상인이 나섰습니다.

그의 아들도 나섰습니다.

드디어 일곱 명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빠져도 되었지요.

제비를 뽑자는 말도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생피에르는 "내일 아침 장터에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을 빼자" 제의했고 이에 모두 동의했습니다.

그들의 고통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여섯 명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생 피에르가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궁금했습니다. 모두 안 나와도 그는 나올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죽음을 자원한 사람들의 용기가 약해지지 않도록 칼레의 명예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처형되려던 마지막 순간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왕비의 간청(당시 임신중)을 듣고 그 용감한 시민 6명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로부터 550년이 지난 1895년 칼레市는 이들의 용기와 헌신을 기리기 위해 생피에르에 조각상을 제작하기로 하고 조각가 로댕에게 의뢰했습니다.

이 작품이 바로 <칼레의 시민>입니다. 1895년 6월 3일 기념상이 제막되었습니다.


비장한 슬픔으로 얼룩진 이 조각상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교훈을 남겨주었습니다.



 

 
Rodin. The Burgher of Calais



Message Of Love - Don Benne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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