精神을 건강하게/삶의 역사

왕은 누가 죽였나???

하늘벗삼아 2012. 9. 3. 23:44




 

20세기에 청춘을 보내고 21세기에 중년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단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래 글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쩌면 당시 인조의 나이 가 우리 나이 또래 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변하는 국내외 환경이 급변하는 사회 속  우리들의 삶…….

참으로 고단하고 힘든 삶 아닐까.

친구들에게 한번쯤 생각할 기회를 주고자 몇 자 적어 본다.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광해군 4)∼1645(인조 23). 인조의 맏아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왕.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領敦寧府事 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1625년(인조 3)에 세자에 책봉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그해에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 회빈(愍懷嬪)과 혼인하였다. 이원익(李元翼)·장유(張維) 등을 빈사(賓師:세자시강원의 1품관)로 맞아 왕자의 덕을 닦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옮겨 청나라에 항전하려 하였으나, 청군의 빠른 남하로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자진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 및 주전파 재신(宰臣)들과 같이 인질로 심양(瀋陽)에 갔다. 심양에 9년 동안 있으면서 1642년 3월과 1644년 정월에 두 차례 본국을 다녀가기도 하였다.



심양에서의 그는 단순한 질자(質子)가 아니라 대사(大使)이상의 외교관 소임을 하였다.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무리한 물자를 요구하면 그를 막으려 노력도 하였다. 청나라는 조선과의 일을 인조가 병중이라서 담판할 수 없다 하여 세자의 재량으로 처리하도록 강요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세자는 본국에서는 무력한 존재이나, 심양 관에서는 조청(朝淸)양국 간에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하게 됨으로써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는 격이 되었다.

그는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청의 왕족 및 장군들과 친교를 맺고 양국 간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1644년 9월에 그는 청군을 따라 북경(北京)에 들어가 70여일을 머물면서 서양인이 주관하고 있던 천문대를 찾아가 역법(曆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독일인 신부 아담 샬(Schall, J. A., 일명 湯若望)과의 친교로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천주상(天主像)을 전래함으로써 서양문물의 적극적인 수용을 통하여 문화적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서인들의 집권이 되면서 반청친명정책(反淸親明政策)을 고수하여 소현세자의 처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듯하다.



특히, 소현세자는 300명이 넘는 시강원 관원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청의 요구를 막지 못하고 그들에 영합하면서 막대한 경비만을 국고에 부담 지웠고 때로는 사무역(私貿易)을 자행하여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세자의 행위는 인조에게 친 청적인 인물로 보였으며, 조선 국왕의 후계자로서 부적격하다고 간주된 듯하다.



그 위에 인조의 총비 조소용(趙昭容)은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세자를 백방으로 모함하였으니 심양관에서 세자의 과도한 영리추구는 잠도역위(潛圖易位:세자가 인조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르기 위한 공작) 또는 세자를 대신하여 인조를 청에 입조시키려는 공작이라고 모함하였다.



그리하여 인조는 심양관에 밀정을 보내어 세자의 동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세자는 9년간의 인질생활 끝에 1645년 2월 18일에 입경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환영보다는 냉대였으며, 세자에 대한 군신의 진하(進賀)도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세자일행이 북경에서 가져온 서양문물에 관한 서적과 물자도 인조의 노여움을 가중시켰다. 뜻하지 않은 부왕과의 갈등으로 인하여 그해 4월 23일 병석에 눕게 되고 4일 만인 26일에 급서하였다.



이와 같은 세자의 급서는 의관 이형익(李馨益)의 책임이라 하여 엄벌을 요구하였다. 이형익은 조소용의 외가와 관련된 인물로 3개월 전에 특채된 의관이었다. 인조는 세자의 사인을 규명하려 하지 않고 관례적인 책임도 지우지 않은 가운데 입회인을 제한하여 입관을 서둘렀다.



《인조실록》에는 시신은 9혈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진흑(盡黑)으로 변해 있었다고 하여 은연중에 독살되었음을 시사하고 그 하수인으로 이형익을 지목하고 있는 느낌을 주게 한다.

그 뒤 세자빈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민 회빈은 물론 두 아들과 그의 친정식구, 그리고 세자빈과 친했던 많은 궁녀들이 죽음을 당한 것을 볼 때 살세자(殺世子)의 장본인은 바로 인조일 가능성이 높다. 처음에는 소현묘라 하였으나 고종 때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다. 장지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있다.



인물계보에도 나와 있듯이 소현세자는 청에 볼모로 있으면서 청의 태종 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견뎌냈었고 그 또한 삼전도의 굴욕을 잊지 않으려했다.


또한 명나라에 대한 숭배정신도있었지만 8년이라는 시간동안 있으면서 복수심만이 있었던것은아니다. 당시 청은 외국 선교사들과의 교류와 여러 무역으로 서양의 물건들이 많이 들어와있었다. 자명종과 지구본 안경등…….


이것을 본 소현세자는 자신의조국인 조선왕조를 위해 들여올 생각을 한다.


그러나 조선조정에서는 이일로 오해를 하고 부왕인 인조도 오해를 사서 결국 귀국 2개월 만에 죽게 되는데 분명 말할 것도 없이 사인은 독살이다.


급사를 하지 않고 다른 이유라면 왜 7일도 못되어 갑작스럽게 죽고 온몸이 검게변함과동시에 피가 여러 군데에서 나오겠는가???


그리고 몇 사람만 들어오게 해서 사인을 확인시킨 인조의 행동과 서둘러 장례를 치르게 한 점 이후 며느리인 세자빈 강씨와 원손 2명을 죽게 한 장본인도 인조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인조는 소현세자가 청에 있으면서 회유됐다는 것만 생각해 그런 행동을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복 또한 몇 달 만에 벗으라하고 자신은 7일 만에 벗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현세자는 청에 있으면서 선교사였던 아담샬을 거의 매일 찾아가 서양에 대한 공부나 질문 그리고 새로운 문물들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샬은 당시 세조 순치황제가 할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인물이다.


소현세자

만약 그가 왕이 되었다면 역사는 어떠했을까?

조선말 백성을 핍박한 삶으로 몰아넣었던 {세도 정치(안동김씨, 풍양조씨)와 삼정물란..

일제의 강점} 등 많은 변화가 있었을것으로 추측될 수 있을것이다.

광해군, 소현세자

 

그들의 생각속엔 과연 백성(조국과 민족)이란 어떤의미로 자리매김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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