精神을 건강하게/삶의 역사

자유시로 가다(1921년 2월)

하늘벗삼아 2012. 8. 30. 10:24






 

자유시로 가다(1921년 2월)

북간도독립군이 자유시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북로군정서도 들어오는 줄 알고 자유시로 가려고 길을 떠났다. 이곳서 사귄 이용무 라는 동지와 동행이 되었다. 러시아 여행은 처음이다. 민가를 찾아가 숙박을 하면서 삼일 만에 철로역까지 왔다.

마침 화목운반차를 탔다. 타고 보니 독립군들이 곳간마다 타고 있다. 나는 중대장을 찾아가서 나의 신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우리 군정서 부대소식을 물어보니 자기는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이 부대는 연해주 지방에서 활동하던 ‘박 그레고리 부대’라고 한다. 중대장은 친절하게 대해준다. 자유시를 채 가지 않고 솔밭 정거장에 군대는 하차했다. 나와 용무도 같이 따라섰다.

중대장 호의로 같이 군인들과 같이 농가에 배치하여 숙박케 하여 준다. 그럭저럭 군속 비슷하게 따라 다녔다. 차츰 연해주로 서간도독립군이 들어왔다. 들어온 독립군은 모두 1천여 명이나 된다고 했다. 그러나 서로군정서는 들어왔으나 북로군정서는 중국으로 도로 나갔다고 한다. 이제 와서 도로 중국으로 갈수도 없고 난처해졌다.

간도독립군들의 불평을 들어보니 연해주에 모인 독립군은 삼천 여명이었는데 이천여 명은 헤어지고 이곳에 온 군은 1천여 명 가량이었고, 홍범도와 이청천 총사령관이 따라왔다고 한다. (이들은 자유시로 이동할 때 러시아 혁명군들로부터 무장해제를 당했다.) 애초의 약속은 무장을 해제했다가 자유시에 가서 도로 내준다고 해서 무기를 벗어주었는데 이곳에 와서는 이 핑계 저 핑계하고 주지 않는다는 것이 큰 불평의 하나이고 또 하나는 (아무런 군수품이나 식량이 주어지지 않아) 농가로 다니며 걸식하는 것이다. 모든 희망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탈주하는 생각뿐이다. (한국 독립군대들은 러시아 혁명정부 후원하에 본격적인 항일민족독립운동을 하고자 자유시로 집결했다. 그러나 가망성이 없어 보였다.)

‘박 그레고리 부대’의 소대장 최씨가 나에게 탈주 의사를 묻기에 나도 찬동했다. 그날로 탈주하지 않으면 다시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군대가 이동하는 아침에 칠십여 명이 탈영하였다. 삼일동안 길을 왔다. 이곳에서 강만 건너면 안심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행군 도중에 러시아 기마대가 전후에서 포위해온다. 우리는 투항하고 무장해제를 당했다. 포로가 되어 자유시로 끌려갔다.

이 군대는 볼셰비키 혁명군이고 중앙정부에서 보낸 군대다. (러시아에 거주하는 재로 한인들 간의 주도권 장악 문제로 대립하고 있던) 박 그레고리와 오하묵과 분쟁을 조정하러 온 부대인데 박 그레고리 부대가 탈주할까봐 미리 포위망을 펴 논 터에 우리가 걸려든 셈이었다.

' 한 독립군 병사의 항일전투'(1984년 박영석 전 국사편찬위원장 책에서 ) 러시아 혁명정부는 러시아 백계군(구 제정군)을 토벌하는데 한국 독립군 세력을 이용하고 난 후 이들을 볼셰비키 혁명군에 흡수, 재편성 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 백계군을 지원하는 일본군을 물러나게 하기 위해 일본군과 타협했다.  "한국 항일독립군을 러시아 영내에서 추방하라."는 일본군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었다. 당초 한국 독립군에게 약소민족의  해방투쟁을 돕겠다는 약속을 저버렸다. 결국 한국 독립군은 소련혁명정부당국의 기만 술책에 넘어가 철저히 이용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