精神을 건강하게/삶의 역사

주은래, 모택동에 기생한 권력가였는가?

하늘벗삼아 2012. 8. 1. 14:05

간혹 주은래를 비판하고자 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주은래의 문화혁명 기간 동안의 행적을 두고 말한다. 그것은 모 주석의 뒤를 이어 당시 명실상부한 제2인자로 떠오르던 유소기가 문혁 기간 동안 총리직에서 쫒겨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그 기간동안 많은 혁명동지들 역시 비참하게 죽거나 인민들이 희생당하는 과정에서 그가 침묵했다는 것이다. 또한 모택동의 주치의였던 이지수가 쓴 『모택동의 사생활』에는 모택동에 대한 주은래의 굴욕적인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데 주은래는 모택동에게 보고할 때는 침상 옆에 꿇어앉아서 했고 방광암 수술을 받고싶어도 모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2년간 고생했다는 것이다.

1974년 6월 주은래의 아내 등영초는 모택동 전담 치료의사단에 속한 여성 검사원에게 부탁하여 모주석으로부터 수술허가를 겨우 얻어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주은래는 혁명을 그 스스로가 지속시키고자 했다. 여기서 혁명이란 문화혁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신중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혁명을 말하는 것이다. 문화혁명의 과정에서 주은래 역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구하지 못한 동료와 인민들도 있겠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주은래의 책임으로 모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나치 독일의 2인자들은 괴벨스, 히믈러, 괴링 등은 모두 제각각의 길을 걸었다.

그 중 괴벨스가 제일 영리한 인물이었지만 그 역시 광신적인 히틀러 추종자였기에 히틀러의 자살 이후 자식들마저 쏴죽이고 지하 벙커에서 자살한다. 괴링은 몰락해 가는 히틀러의 곁에서 총통의 지위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독촉하다가 교수형에 처해진다. 이런 인물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주은래의 처신은 대단히 융통성있었고 유연했다. 물론 그의 처신이 항상 옳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미 모 주석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으며 주은래는 모주석의 사후에 대비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중에 그가 치뤘던 고통 역시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추측해 보면 신중국 수립 이전부터 모택동과 주은래의 사이는 전우이자 정책협력자로 모택동은 국가중대사를 결정할 때마다 반드시 주은래에게 조언을 구했고 주은래 또한 중국의 지도자로서의 모택동에게 적극적인 협력과 지지를 보냈다.

'문혁'도 주은래가 모택동 의견의 존중과 함께 당 내부의 분열을 막기 위한 최후의 선택으로 여겨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때문에 주은래가 해야 할 일은 더욱 많아졌다. 중국 신문에서는 다들 '문혁' 중에 주은래의 중요성을 '주은래가 없는 문혁의 결과는 상상할 수 없다'고 할만큼 칭찬하고 있다. 중국 정부측은 주은래를 하나의 상징이자 신화로 만들어가고자 한다. 그것은 쿠바가 '체 게바라'를 통해 혁명과 정권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노력과 비슷하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모택동의 길도 주은래의 길도 아닌 길로 너무 많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