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두 사람은 모두 저 세상으로 갔지만, 오늘의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은 여전히 주은래 계보의 정치세력이 틀어쥐고 있습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무릇 모택동쪽에 섰던 사람들은, 강청을 비롯하여 모조리 타도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중국의 역사에는 ‘성공도 실패도 모두 소하(萧何) 때문이다’(成也萧何,败也萧何)는 유명한 고사가 있습니다.
초한(楚漢) 시절 유방(劉邦)을 찾아왔다가 쓰이지 못하자 떠나려는 한신을 소하가 붙잡고 극력 천거하였는데, 훗날 공을 이루고 왕까지 되었던 한신(韓信)이 다시 소하의 계책에 걸려 여후(呂候)의 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때 한신이 내뱉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패러디한 또 다른 유명한 성어(成語)가 있습니다. ‘성공도 실패도 모두 주공(周公) 때문’(成也周公,败也周公)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공(周公)이란 바로 주은래(周恩来)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찍 문화대혁명 기간에 주은래를 직접 주공(周公)이라고 지칭하면서, 정치적으로 그를 제거하려고 획책하였던 모택동을 두고, 역사학자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1983년에 상해에서 발간되었던 “报刊文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싣고 있습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외교부 부부장에까지 올랐던 모택동의 조카 왕해용(王海容)은, 문화대혁명 이후 중공중앙 전문안건심사소조에서 격리심사를 받았습니다. 왕해용이 주은래 총리를 핍박하고 박해하였던 죄행을 추궁 받을 때 급해맞아 녹음테프를 내놓았는데, 이 테프속에는 모택동의 육성녹음이 들어있었습니다. 모택동은 왕해용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주공을 비판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직 시기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전국의 인민들이 아직 각성하지 않고 있다. 너무 일찍 주공을 타도하면 전국에 혼란이 올수 있다.” (原話: 周公不是不批,而是时候未到,全国人民还没觉悟,过早打倒周公,会引起全国大乱.)
중공중앙 전문안건심사소조에서는 왕해용이 내놓은 이 녹음테프를 엽검영(叶剑英)에게 바쳤고, 엽검영의 손을 거쳐 등소평(邓小平)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 테프의 내용을 직접 듣고 나서 등소평조차도 “원래는 이렇게 된 영문이었구나. 이 일은 더 이상 조사하지 말기 바란다.”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왕해용은 무사히 놓여나왔고, 처분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나서 이런 사실들이 하나, 둘 씩 세상에 흘러나왔을 때, 놀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모택동은 문화대혁명기간에 주은래까지도 해치려고 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관방에서는 이런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끝없이 제작되고 있는 영화, 드라마들에서 모택동과 주은래야말로 세상에서 둘도 없이 친밀한 전우이며, 동지였던 그런 관계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떠하였는지에 대하여 오늘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원래 주은래는 중국공산당 창당 초기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서기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모택동보다 훨씬 더 높은 직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또한 중국공산당의 특무기관을 총괄하였던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일명 중앙특과(中央特科)라고 불리는 이 특무기관의 최고 지도자였던 주은래는 1927년 4월12일, 발생하였던 청당사건(상하이 쿠테타, 또는 4,12 청당사건, 4, 12반혁명정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때에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은래의 곁에서 가장 유력한 조수로 있었던 사람이 해방 후, 중국인민해방군의 대장이 되었던 진갱(陳賡)과 한때는 중국공산당의 정치 이론가로 평가받다가 사후에는 야심가로 규정되어 출당제명당한 강생(康生)이었습니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가 1933년에 ‘인간의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장편소설까지 쓸 정도로, 이 사건은 전 세계를 놀래었었습니다.
우리는 이때까지 이 사건을 직접 조직하고 막후 조종하였던 장본인이 장개석인줄로만 알고 있었지만, 최근에야 공개되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4. 12 반혁명정변’의 실제 주역은 장개석이 아니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대단히 존경하고 높이 평가하고 있는 북경대학의 창시자 채원배(蔡元培)선생이었습니다. 중국의 대교육학자이며 당시 국민당의 중앙집행상무위원이었던 채원배 선생이 직접 수차례나 회의를 소집하고 공산당을 청당하라고 장개석에게 내리 먹였던 사실이 공개된 것입니다. 그리고나 서 이 결정을 직접 집행하였던 군벌이 이종인(李宗仁)과 백숭희(白崇喜)었습니다.
20대의 젊은 청년이었던 주은래는 바로 이 사건 직후 중국공산당의 중앙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진독수와 더불어 대표적인 공산주의 선구자이며 창시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이대소까지도 북경에서 처형당하고, 중국공산당 중앙지도부가 거의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을 때에, 주은래는 국제당 총서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季米特诺夫, Устинов Дмитрий Федорович)에 의해 중국공산당 중앙군위 서기로 임명되며, 바로 그해 8월 1일, 남창에서 발생하였던 ‘8. 1 남창봉기’를 총지휘하게 됩니다.
이때로부터 1935년 ‘준의 회의’에서 모택동에게 군권을 내어놓기까지, 주은래는 7년 동안 명실 공히 중국공산당의 실제적인 제 1인자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간에 주은래와 함께 중앙무대에서 활약하기 시작하였던 구라파 유학파 출신들로 주덕(朱德)、엽검영(叶剑英)、등소평(邓小平)、진의(陈毅)、리부춘(李富春)、리립삼(李立三)、리위한(李维汉)、섭영진(聂荣臻)、채화삼(蔡和森, 귀국 후 한때 중앙정치국 위원과 중앙 총서기 담임)、운대영(恽代英, 귀국 후 중공 광동성위 서기 담임), 진영년(陈延年, 진독수의 아들, 광동구위 서기 담임)、향경여(向警予, 채화삼의 아내, 귀국 후 정치국 위원 담임)、채창(蔡畅, 채화삼의 여동생, 중공중앙 위원)등 사람들은 모두 주은래의 계열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당사학자들은 ‘중국공산당의 막후에서 권력핵심을 이루고 있었던 구라파 유학파’(留欧派)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황포(黃埔)군관학교의 정치부 교관주임 출신이라는 신분 때문에, 주은래는 당시 황포군관학교 출신 군사간부들이었던 임표(林彪), 좌권(左權), 섭영진(聶榮臻), 이달(李達), 엽검영(葉劍英), 소경광(蕭勁光), 서향전(徐向前), 진갱 등 사람들의 좌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정치적, 군사배경을 등에 지고 있었던 주은래는 명실 공히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의 최고의 실권자였습니다. 혹시 ‘최고’라는 말의 타당성을 두고 주은래의 위에는 모택동이 있지않았느냐고 반론하는 이들도 혹시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도 홍군에 대한 국민당군의 5차례에 걸친 반포위토벌전을 치르고 나서, 홍군의 군사지휘권은 서서히 모택동에게로 넘어갑니다. 장정(長征)중의 ‘준의 회의’에서 중앙군사위원회 3인 지도소조에 모택동이 들어가게 되고, 군대의 작전 지휘권을 직접 모택동이 장악하게 되지만, 홍군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여전히 모택동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이는 또한 주은래의 배후에 진 치고 있었던 제 3 공산국제의 정치적 배경과 갈라놓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국민당을 도와 황포군관학교를 만들었던 공산국제 파견원 파벨 미프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스탈린과, 스탈린의 친구였던 공산국제의 총서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였습니다. 주은래는 바로 이 디미트로프와 프랑스에서 유학할 때부터 서로 알고 지냈던 사입니다. 주은래가 유학생시절 해외에서 디미트로프의 간첩으로 활동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귀국 후 주은래가 중국공산당 중앙에 낙하산식으로 투입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디미트로프의 덕분이었습니다. 역사에서 보면 중앙쏘베트시절 홍군의 권력은 ‘왕명’을 대표로 하는 ‘좌경’모험주의 자들이 통제하고 있었고, 공산국제로부터 직접 파견 받고 온 소련공산당의 중앙대표와 군사고문 오토브라운이 직접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최고 실권은 여전히 주은래에게 있었습니다.
관방의 공식적인 소개는 주은래가 모택동의 편에서 줄곧 왕명과 대립하였던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역사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은래는 줄곧 왕명의 편이었고, 왕명도 주은래의 앞에서만은 항상 눈치 보면서 겁에 질려 지냈다고 합니다. 그것은 왕명이 주은래와 디미트로프의 특별한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당시 왕명 등이 홍군내부에서 사상투쟁을 일으켜 숙청운동을 진행 할 때, 무릇 주은래와 친분이 있는 간부들은 아무리 사형 판결을 받았어도,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숙청위원회 주요 권력자였던 강생이 바로 주은래의 말만 듣고, 다른 사람의 말은 조만해서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강생은 상해에서 지하공작을 할 때부터 주은래의 지도를 받았던 중국공산당 중앙특과의 요원이었습니다. 주은래는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군위 책임자였을 뿐만 아니라 중공중앙의 특무기관도 모조리 틀어쥐고 있었습니다. 모택동은 제3차 반포위토벌전투 때부터 왕명에게 군권을 빼앗기게 되었는데, 제4차 반포위토벌전은 주은래가 직접 주덕을 데리고 지휘하였습니다. 그리고 제5차 반포위토벌전 때는 주덕까지 밀어내고 유백승에게 모든 작전권을 주었으나, 유백승이 전투를 잘못 지휘하는 바람에 주은래가 처음으로 위기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모택동과 주덕의 유격전술대로 하면 국민당 군과의 제5차 반포위토벌전투도 승리했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유격전술을 채용하지 않고 진지전을 고집한 유백승에 대하여 주은래가 진지전을 지지한 것은 모택동에게 군권을 빼앗길가봐 걱정하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이 작전 직후 모택동을 지지하는 장령들 속에서 직접 공개적으로 주은래와 유백승에게 욕을 퍼부었던 사람이 바로 팽덕회였습니다. 해방 후 모택동으로부터 제일 처음 박해를 받고 죽었던 팽덕회야말로 중앙쏘베트시절부터 모택동의 가장 충실한 지지자였고 군사조수였습니다.
제5차 반포위토벌전투가 실패가 돌아간 후 장정을 시작하면서부터 주은래의 군사 권력을 가장 위협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팽덕회였습니다. 팽덕회는 언제나 공개적인 장소에서 주은래에게 대들고 높은 소리로 불평을 털어놓곤 했다고 합니다. 모택동은 주은래의 군권을 빼앗기 위하여 팽덕회같은 군사장령들을 자기의 손에 넣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팽덕회 외에도 주덕의 부대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청년군관 임표를 손수 배양하였는데, 류양전역(浏阳战役) 때, 임표는 주덕과 진의가 사단 전체를 버리고 도주할 때 홀로 배후에 남아 뒤를 쫓아오고 있었던 국민당군 한 개 퇀을 통째로 소멸하였던 기적을 창조하였습니다. 이 전투 이후 주덕은 자신의 부대를 모조리 임표에게 맡기다시피 하였습니다.
홍군이 장정을 시작하였을 때, 중앙홍군의 선후를 담당하였던 주요한 군사장령은 바로 임표와 팽덕회였습니다. 임표가 선두였고 팽덕회가 후위였는데, 이 두 사람이 다 모택동의 지지자들이었던 반면에 주은래의 곁에는 총참모장 유백승밖에 없었습니다. 유백승에게는 직접 움직일 수 있는 부대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준의 회의’에서 주은래가 모택동에게 직격탄을 맞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당시 모택동은 주은래의 권권을 빼앗기 위하여 군사상에서는 주로 팽덕회와 임표에게 의지하였는데, ‘준의회의’ 때 회의장을 모조리 둘러싸고 있었던 부대가 바로 임표의 부대였습니다.
당시 중앙홍군은 3개의 방면 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총사령은 줄곧 주덕이었으나 총정치위원은 주은래와 장국도, 모택동이 번갈아가면서 담임하였습니다. 중앙군위 3인 지도소조에 들었던 주은래와 총사령 주덕이 모두 1방면군에 있었기 때문에 1방면군은 중앙홍군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1방면군에 소속되었던 팽덕회와 임표, 유백승 세 사람가운데 직접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사람은 바로 적극적으로 모택동을 지지하고 있었던 팽덕회와 임표였습니다.
때문에 제 1방면군에 의해 공략된 준의에서 중앙홍군의 군사지휘권이 모택동에게로 넘어갈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일이었습니다. 적지 않은 사가들이 ‘준의 회의’를 ‘준의 정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전 계획 없이 돌연스럽게 개최된 ‘준의 회의’에서 제5차 반포위토벌전투의 실패의 책임을 묻게 되었는데 주은래와 유백승이 비판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장국도(张国涛)의 회고록에서 보면, 그 자신이 모택동의 군사지휘권을 줄곧 승인하려고 하지 않았던 원인이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당의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결석한 ‘준의 회의’에서 주은래와 유백승이 모택동과 팽덕회 임표 등 사람들의 공세에 몰려 군권을 내놓았던 것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장국도는 줄곧 자신이 지도하고 있었던 홍군 제 4방면군이야말로 중앙홍군이라고 고집했고, 모택동의 군사지휘권은 불법이라고 떠들었습니다. 당의 자력(资歷)면에서 모택동이나 주은래보다 훨씬 선배인 장국도는 공산당의 창건자였던 이대소의 가장 친밀한 조수였습니다. 명의상에서 당은 이대소와 진독수가 창당한 것으로 나오지만 밑에서 직접 조직사업을 틀어쥐었던 사람은 바로 장국도였습니다. 대신 모택동은 제6차 당대표 대회 때까지도 당내 서열이 진운(陈云)의 뒤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안에 도착한 뒤에는 판세가 완전히 역전되고 장국도는 모택동에게 몰려 종당에는 연안을 탈출하여 장개석에게로 가서 투항하게 됩니다.
당초에 장국도가 능히 모택동과 대립하고 모택동에게 달려들 수 있었던 원인은 그 자신이 중앙홍군보다 수량상 훨씬 더 많은 제 4방면군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은래는 다릅니다. 그는 줄곧 제 1방면군과 함께 행동하였고, 제 1방면군의 주요 권사장령들인 팽덕회와 임표는 직접 모택동의 지휘를 들었습니다. 이처럼 정치적 세력균형이 군사역량에 의해 판가름 나던 시절에 주은래가 자진하여 군권을 모택동에게 내놓고, 그의 밑에서 협력자로 나선 것은 지혜로운 처사였습니다.
이때로부터 중국의 역사에는 1인자였던 모택동의 밑에서 죽을 때까지 2인자로 실각하지 않고 오뚝이마냥 살아남았던 주은래의 신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연안에 도착한 뒤에 주은래의 영향력은 모택동이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위협적이었습니다. 제 1방면군에 볼모로 잡혀 연안까지 왔던 주은래의 주변에는 그의 수많은 옛 부하들이 다시 몰려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장국도가 몰락하고 제 4방면군의 살아남은 장령들은 대부분이 모택동은 경원하면서도 주은래는 좋아하였습니다. 중앙보위국과 사회부가 모두 주은래의 직접적인 장악 하에 있었는데 전문성이 강한 이 분야는 모택동도 함부로 왈가불가 할 수 없는 주은래만의 성역이었습니다. 사회부 부장과 부부장을 맡고 있었던 강생과 리극농 두 사람 모두가 중앙특과(中央特科) 시절의 주은래의 조수들이었습니다.
일본이 투항하고 나서 중국인민해방군이 4개의 야전군으로 편성되기 직전, 중국인민해방군은 주로 팽덕회의 서북 군과 유백승의 태항종대, 그리고 진의의 화중부대와 서향전의 화북 군이 주력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동북으로 나갔던 임표의 동북 군과 팽덕회의 서북군 두 군사 집단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갈래의 군사집단은 전부 주은래의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세력균형을 깨기 위하여 모택동은 서향전을 끌어당겼으나 서향전이 말을 듣지않았다고 합니다.
주은래에게는 정치적으로 하마터면 크게 실각할 수 있었던 시련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최근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중경 1945년’은 일본이 투항하고 나서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내전을 앞두고 진행하였던 ‘국공담판’에 대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왔고, 드라마에서 구경하였던 사실과는 판판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담판을 주선하였던 미국은 이 두 정당이 함께 연합정부를 세우게 될 경우에, 이 정부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적임자로 바로 주은래를 꼽고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미국뿐이 아닙니다. 담판 때에 미국은 중국에 국공 연합정부가 들어서고 미국식 민주주의 국가로 변할 것을 희망하였으나 담판이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내전이 일어나고 장개석의 군대가 장강 이남으로 모조리 쫓겨났을 때, 이번에는 소련이 나서서 장강을 사이에 두고 국민당과 공산당 두 개의 정권이 각기 생존할 것을 바란 것이었습니다. 스탈린이 모택동에게 장강을 넘어서지 말라고 지시하였던 사실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그때에도 만약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굴복하고 장강을 사이에 두고 국민당과의 전쟁을 멈추었더라면, 나라가 두 개로 나뉘지 않았으면, 또 다시 미국과 소련의 개입 하에서 국공연합정부론이 재기되었을 것입니다. 중국의 국공내전을 연구하고 있는 미국의 역사학자들은 연합정부가 나오게 되었을 경우, 유일하게 양쪽 정당으로부터 추대되고 공인받을 수 있는 사람은 주은래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결코 근거가 없는 주장이 아닙니다. 모택동 자신이 그의 저작에서 직접 인정하디시피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에게 소멸되지 않았던 원인은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이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3대의 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3대 법보중의 가장 주요한 하나가 바로 통일전선인데, 중국공산당에서 이 전선을 총괄하였던 사람이 바로 주은래였습니다. 주은래 자신이 공산당뿐만 아니라 국민당내에도 허다한 부하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국민당내에 잠복하고 있었던 공산당 지하일꾼들도 모두 주은래의 부하들이었고, 국민당 고위층에 침투한 공산당의 붉은 간첩들도 모두 주은래가 직접 장악하고 파견한 요원들이었습니다. 때문에 대만의 역사학자들까지도 장개석의 실패를 두고, 장개석은 그 자신의 황포군관학교 시절 부하였던 주은래에게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총명한 모택동인데 이와 같은 이해관계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을 리 있겠습니까.
한 번도 공산국제와 스탈린의 명령을 어겨본적 없었던 모택동은 이때 스탈린의 권고도 가차 없이 무시하였습니다. 해방군이 장강을 넘어 장개석을 대만으로까지 내 쫓은 뒤에 주은래는 자신의 정치적 원견이나 군사적 재능이나 모두 모택동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로부터 주은래에 대하여 각별히 경계하기 시작하였던 모택동은 매번의 정치투쟁을 일으킬 때마다, 주은래를 그 첫 표적으로 삼지 않았던 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은래는 번마다 그 표적에서 기적적으로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은래의 대신으로 희생물이 되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첫 번째의 희생물이 바로 고강(高岗)이었습니다. 고강은 모택동과 주은래 사이의 정치투쟁에 대하여 가장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모택동이 주은래를 질투하고 시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주은래에게 불질을 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고강이었습니다. 그러나 모택동은 설사 자기가 뒤에서 고강을 밀어준다고 해도 자기와 고강 두 사람의 힘으로 주은래를 거꾸러뜨릴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고강이 주은래를 공격한 것은 순수하게 모택동에게 발라맞추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고강을 모택동은 처음에 은근히 흔상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고, 모름지기 고강에게 힘을 실어주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은래 측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주은래는 즉시 유소기와 손잡고 등소평, 진운 등의 도움으로 고강을 몰아붙였습니다. 결국 고강은 자살하고 말았는데, 모택동은 고강 쪽이 궁지로 몰리자 바로 주은래의 편에 서서 물에 빠진 고강에게 돌을 던졌던 것입니다. 훗날 모택동은 임표까지 죽고 나서, 그때 고강을 지켜주지 못하였던 것을 많이 후회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고강의 충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고강을 핍박하여 자살까지 하게 하였던 모택동은 더욱 더 주은래를 미워하였는데, 고강의 몰락으로 가장 실익을 챙긴 사람은 바로 유소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유소기는 고강을 거꾸러뜨릴 때, 진의와 합작하여 요수석까지 한데 같이 거꾸러뜨린 것이었습니다.
신사군 정치위원 출신이었던 요수석은 유소기의 오랜 부하였습니다. 일찍 유소기가 만 주성 위원회 서기로 있을 때 그의 밑에서 성위 공청단 서기로 있었고, 유소기가 신사군 정치위원으로 있을 때도, 그의 밑에서 부정치위원으로 있다가 정치위원 자리를 이어받았던 사람입니다. 신사군 정치위원 시절에는 군장이었던 진의와 사사건건 반목하였고, 진의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여 속유에게 모조리 일임하였던 적도 있었습니다. 진의가 화동야전군의 허수아비 사령관(실제 작전지휘권은 부사령관이었던 속유가 장악)으로 있을 때, 화동 당, 정군의 최고 권력자였던 요수석에게 박해받았던 일은 유명합니다.
역시 중국인민해방군 10대 원수의 한 사람이었던 진의는 주은래의 직계 심복이었습니다. 주은래를 제거하려다가 자기에게 충성하였던 고강을 잃어버리고 유소기 좋은 노릇만 하였던 모택동은 이때 주은래 못지않게 유소기도 경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모택동과 유소기 사이의 공개적인 분규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었습니다. 모택동은 당내에서 고강을 이용하여 주은래를 공격하려다가 실패한 뒤, 군 대내에서 팽덕회를 이용하여 주은래의 직계 부하였던 유백승과 속유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국방 부장이었던 팽덕회의 가장 주요한 타수(打手)는 바로 대장 황극성(黃克成)이었습니다. 속유는 황극성에게 몰려 총참모장직에서 밀려나고 맙니다.
그러나 이때 팽덕회까지도 또 모택동에게 당하게 됩니다. 팽덕회야말로 모택동이 주은래의 군권을 탈취하는데서 제일의 공로자입니다. 그런 그가 여산회의에서 모택동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순전히 모택동에 대한 충성과 자기 자신의 양심에 의한 것이었지, 결코 모택동을 반대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좀 우직한 편이기는 하지만 순수하고 거짓말을 할 줄 몰랐던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의견을 제기하고 나섰습니다. 이때 하마터면 곤경에 빠질번 했던 모택동은 다행히도 임표의 덕분에 위기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팽덕회가 모택동에게 당한 것은 ‘괘씸죄’때문이었습니다. 모택동은 당시 어찌나 노했던지 그 뒤로 팽덕회가 죽을 때까지 박해하였고 병 치료도 하여주지 않았습니다.
주은래의 직계 부하들은 모택동이 자기의 맹장이었던 팽덕회를 구박하는 것을 은근히 즐거워하는 눈치였습니다. 팽덕회가 완전히 실각하였을 때, 주은래는 물론이고 아무도 나서서 팽덕회를 위하여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만 북경군구 참모장이었던 종위(鐘偉)가 혼자 나서서 떠들다가 군복까지 벗기고 안휘성 농업청 부청장으로 쫓겨 내려가고 말았습니다. 종위장군도 주은래의 직계 부하는 아닙니다. 그는 제 4야전군 출신으로 임표의 부하였습니다.
다음은 유소기도 그렇습니다. 조금만이라도 중국공산당의 당사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유소기가 얼마나 모택동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추종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택동사상’의 이론을 제출하고 그것을 보급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사람도 바로 유소기였습니다. 그런 유소기의 국민적 신망이 점차적으로 모택동을 능가하게 되었을 때, 모택동은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이 유소기를 타도하기 위하여 일으킨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당시 당 주석과 국가 주석을 맡았던 이 두 사람 사이의 권력투쟁이 문화대혁명으로까지 번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소기는 문화대혁명 초기에 벌써 타도되었고 모택동은 완승하였습니다. 만약 유소기를 타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문화대혁명은 일찍 감치 막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 뒤로 10여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또 만약 유소기는 타도하였지만 그의 반동노선에 섰던 잔여세력들을 마저 쓸어내기 위하여 문화대혁명이 계속 필요했던 것이라고 하면, 무엇 때문에 유소기 버금으로 가는 제 2호 주자 파(走资派) 우두머리였던 등소평은 유소기처럼 거리바닥에까지 끌려 다니면서 홍위병들에게 구타당하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택동은 등소평을 강서성의 농장에 보내어 노동시키는 방법으로 그를 보호하여 주었습니다. 그다음 등소평 다음으로 주자 파 우두머리 취급을 받았던 담진림(谭震林)도 중남해 회인당에서 엽검영과 함께 대놓고 강청에게 욕설을 퍼부었지만 무사하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는 결코 주은래의 연고(緣故)와 갈라놓을 수가 없습니다. 주은래는 모택동이 본의 아니게 자기에게 가장 충성하는 부하들을 하나, 둘 씩 내칠 때 절대로 나서서 그들을 위하여 선처를 호소하였던 적이 없습니다. 고강, 팽덕회, 유소기, 도주(陶铸)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등소평, 하룡, 진의 등 자기의 직계 부하들은 모조리 보호하였습니다. 유소기나 팽덕회, 팽진, 육정일 같은 사람들이 모두 홍위병에게 잡혀 직접 거리바닥에까지 끌려 나가 조리돌림을 당하고 육체적 구타를 받아 갈비뼈까지 부러지는 일이 발생하고 있을 때도 주은래가 보호하고 있었던 직계 부하들은 한사람도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하였던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 힘을 가졌던 주은래가 고강, 팽덕회, 유소기 등이 차례로 타도되고 있을 때에도 모택동의 곁에서 단 한번이라도 그들을 도와 말을 하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유소기에 대하여 주은래는, 유소기가 절대로 모택동을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유소기는 결코 주은래처럼 배후에 자기 계보의 막강한 정치적, 군사적 힘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타도되었을 때, 그와 함께 물려나온 반역자집단의 주요 우두머리들이란 당시 중공중앙 서기처 서기 겸 북경시 시장을 맡고 있었던 팽진(彭真)과 공안부장을 맡은바 있었던 나서경(罗瑞脚, 타도 될 무렵에는 중국인민 해방군 총참모장이었습니다.)밖에 없었습니다. 그 외 대부분이 문화교육선전부야의 간부들이었는데 이처럼 형편없는 실력을 가지고 유소기가 어떻게 모택동에게 반기를 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유소기는 국가 주석으로 있으면서 당 주석에 있었던 모택동을 허수아비처럼 만들어놓으려고 했다는 증거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3년 대재해 첫해였던 1961년에 개최된 한차례 공개군중대회(북경의 시민들 7천여 명이 참가)에서 유소기는 공개적으로 모택동을 빗대어놓고 ‘수령은 신이 아니다. 수령도 착오를 범 할 때가 있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말아야 한다. 만세를 부르는 것은 봉건주의적인 것이다.’는 등등 내용의 발언을 하였습니다. 도리 상에서야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유소기의 이 발언 이후 모택동은 자아검토를 했으며 2선으로 은퇴하겠다고 선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택동은 유소기가 이처럼 창궐하게 자기에게 덤비고 있는 원인을 찾아보았습니다.
당시 모택동은 자기를 지지하는 요문원(姚文元)의 문장을 ‘인민일보’와 ‘북경일보’에 발표하려고 하였는데, 이것도 ‘인민일보’와 ‘북경일보’를 직접 통제하고 있었던 중공중앙 서기처 서기 팽진에 의해 거절당하는 망신을 당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팽진의 중공중앙 서기처 서기는 원래 등소평이 맡았던 직책이었는데, 어느 날 등소평이 자진하여 물러나면서 이 자리를 팽진에게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팽진을 이 자리에 추천한 사람이 바로 유소기였습니다. 그러나 등소평으로 하여금 서기처 서기를 내놓게 한 사람은 주은래였습니다. 결론은 아주 간단한바 모택동과 거리 두기를 시작한 유소기는 주은래의 정치세력과 손을 잡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팽진보다는 훨씬 더 당내와 군대내의 위망을 가지고 있었던 등소평을 팽진의 뒤로 빼돌린 것은 주은래의 지혜였습니다. 이때 주은래는 유소기와 팽진을 앞에 내세워 모택동과 부딪치게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유소기와 주은래가 손을 잡게 되면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세력이 완전히 주은래 쪽으로 기울게 되어있었고 군대도 역시 주은래의 직계 부하들이 모조리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10명의 원수들 중에 팽덕회가 이미 타도되고 나영환이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나머지 8명의 원수들중 임표 한 사람을 제외하고 7명(朱德、林彪、刘伯承、贺龙、陈毅、叶剑英、聂荣臻、徐向前)이 주은래의 직계 부하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주은래는 유소기와 팽진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이 아끼는 부하 등소평은 뒤로 빼돌리는 등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였으나 필경 모택동의 눈길을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한편으로 모택동을 허수아비처럼 만들어놓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모택동을 계속 우상화하였던 유소기의 심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모택동은 이들을 반격하기 위한 첫 보조로 공안부장에 있었던 나서경을 공안부장 자리에서 내려오게 합니다. 겉으로는 강직된 것이 아니고 반급을 더 올려 총참모장으로 임명하지만, 한편으로 임표에게 지시하여 원 북경 위수구의 부대를 북경 밖으로 이동시키고 임표의 직계 부대인 38군을 북경으로 옮겨오게 합니다. 38군은 오로지 임표의 말만 듣는 부대였습니다.
이때야 나서경은 자신이 하늘이라도 찌를 수 있었던 공안부장이라는 권좌에서 아무런 실권도 없는 총참모장자리로 따돌리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곧바로 수도 북경을 임표의 38군에 맡긴 모택동은 상해와 항주에 거주하면서 북경대학의 섭원신(聂元梓)을 사주하여 ‘반란하는데 는 도리가 있다’는 대자보를 쓰게 합니다. 바로 그 대자보를 중앙인민방송국에서 방송하였을 때, 이 대자보에 선동된 전국의 천백만 젊은 지식청년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임표의 38군을 북경으로 이동시킬 때, 모택동은 이미 주은래와 유소기 사이의 연맹이 와해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모택동이 알고 있는 주은래는 절대로 극단적으로 일을 몰아붙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군사적 대결 국면이 만들어질 것 같으면 백프로 주은래 쪽에서 먼저 뒤로 물러나리라는 것은 불 보듯이 뻔 한 일이었습니다. 결과는 전면에 나섰던 유소기와 팽진만이 당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때 모택동은 주은래와 유소기의 사이에서 다시 한 번 누구를 버리고 누구와 손을 잡을 것인가를 고민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유소기를 버리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제거 가능하고 제거하기 쉬운 유소기부터 타도하는 것은, 그 연후에 주은래의 정치적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첫 보조라고 판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때까지 알고 있었던 문화대혁명의 정치적 본질과는 판판 다른 내면에 잠재하여 있었던 또 다른 모습입니다. 관방에서 만든 ‘주은래’라는 영화를 보면, 문화대혁명 기간 주은래가 얼마나 많은 굴욕을 치욕을 참아가면서 소란을 바로잡기 위하여 눈물겨운 노력을 경주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도 주은래가 ‘8.1 남창봉기’의 주역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자신의 직계 부하였던 하룡을 보호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이야기는 나오지만, 주은래에 의해 이용되고, 다시 주은래에 의해 버림받았던 유소기의 이름자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주은래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학자들은, 주은래가 유소기를 지켜주지 않고, 또 유소기와 끝까지 함께 가지 않은데 대하여, 유소기와 함께 연루되었던 수많은 중국 인민들을 버린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유소기, 팽진, 도주, 육정일 등이 모두 잡혀나와 거리바닥에서 고깔모자를 쓰고다닐 때도 주은래는 그들을 모조리 외면 한 채로 오로지 자기 계보의 관료집단을 지키기에만 주력한데 대하여, 그나마 자신의 정치적 세력마저 잃어버린다면 더는 모택동의 횡포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잃게 되기 때문에, 그 힘을 지키기 위하여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용서합니다.
어쩌면 이는 옳은 말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소기가 타도된 뒤에도 모택동과 주은래의 정치투쟁은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유소기를 타도한 뒤에 모택동은 바로 주은래를 공격합니다. 첫 번째는 바로 연동(联动)이라고 부르는 홍위병조직을 사주하여 북경의 거리에다가 주은래가 1927년 ‘4. 12’ 청당사건‘ 때에 체포된 적이 있었다는 대자보를 써 붙이게 한 것입니다. 이 대자보에서는 주은래가 국민당 반동파들에게 체포된 뒤에 오호(伍豪, 주은래의 당시 별명이었습니다.)라는 이름으로 중국공산당에서 탈당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한 적이 있는 반역자라고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대자보가 나붙은 뒤에 모택동은 강청을 시켜 직접 홍위병들을 국무원에 파견하였습니다. 국무원 총리 판공실을 점령한 홍위병들은 주은래를 에워싸고 하루 밤 낮 동안 반역사실을 교대하라고 공격하였으나, 갑자기 나타난 군대들에 의해 홍위병들은 모조리 쫓겨 갔고, 주은래는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후에 모택동은 왕동흥을 시켜 그때 주은래를 구출한 군대들이 어느 부대의 소속인지 알아보려고 하였으나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3년 뒤에 중국에 와서 주은래와 만났던 미국 기자 스노(斯诺)의 회고에 의하며 주은래가 직접 그에게 말하기를, 중남해에서 홍위병에게 포위되어 공격받았으나 해방군의 도움으로 구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해방군이 홍위병에게 총까지 쏘았는데 몇 명이 죽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주은래가 위기에 몰리자 군대들까지 동원되는 것을 본 모택동은 또 다시 고강을 던져버렸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연동’의 홍위병 우두머리를 잡아들이게 합니다. 그 우두머리들에게는 반혁명 죄가 씌어졌습니다. 그리고는 모택동이 직접 나서서 주은래는 반역한 적이 없다고 비호하였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모택동이 얼마나 주은래를 아끼고 사랑했던 가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 함부로 주은래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군대가 나선다는 것을 알게 된 모택동은, 주은래를 타도하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군 대내에서 주은래를 추종하는 세력들부터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 모택동이 두 번째로 주은래를 공격한 사건은 바로 중앙문화대혁명소조의 왕력(王力)과 관봉(关锋)、척본우(戚本禹)를 시켜 군 대내에서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한줌도 못되는 주자 파를 잡아내야 한다는 운동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이 바로 엽검영, 담진림, 등 군대의 노장들이 중남해 회인당에 쳐들어와 책상을 두드리며 떠들고 갔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 이어 곧바로 1967년 여름에는 문화대혁명의 역사상 ‘무한병변’(武汉兵变)이라고까지 불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모택동으로부터 직접 파견을 받은 중앙문화혁명소조 조장 왕력이 무한 군구에 도착하여 주자 파 색출하는 운동을 벌이려고 하자, 무한군구 사령원 진재도(陈再道) 정치위원 종한화(钟汉华)는 아주 왕력을 구금하여 버렸던 것입니다. 또한 모택동이 직접 무한에 도착하여 왕력을 지지한다는 말을 듣고, 수십만 명의 무한 시민들이 비행장으로 몰려들게 하였습니다. 모택동은 얼마나 놀랐던지 무한비행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주은래가 이 소식을 듣고 직접 무한으로 날아와 진재도에게 ‘당신이 직접 모주석을 모시고 북경으로 함께 가자. 북경에 도착한 뒤에는 당신의 생명안전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때 진재도가 살아 돌아오리라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은래는 약속을 지킵니다. 모택동은 함부로 진재도를 건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주은래의 부하였던 진재도를 제거하기는커녕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였던 왕력, 관봉, 척본우에게 돌을 던지고 맙니다. 이때 모택동이 왕력, 관봉, 척본우에게 덮어씌웠던 죄명은 아주 유명합니다.
“군대내의 한줌도 못되는 주자 파들은 나의 장성을 망가뜨리려고 하는데, 왕,관,척은 나의 장성을 빼앗으려 든다.”(军内一小撮是毁我长城,要王关戚“还我长城)
모택동의 이 말 한마디로 이들 세 사람은 거꾸로 죄를 덮어쓰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모택동은 주은래와의 싸움에서 위로는 고강, 유소기로부터 아래로는 왕력, 관봉, 척본우에 이르기까지 먼저 써먹고는 그들이 제구실을 잘 하지 못할 때는 바로 구렁창속에 차넣어던지군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명은 모택동과 이들 사이에서 심부름을 하였던 강청이 대신 덮어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관방에서 공식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역사사실들은 어떠합니까? 연동의 홍위병조직이 주은래를 반역자라고 공격하는 대자보를 썼을 때도 모택동이 나서서 주은래를 지켜주었고, 왕, 관, 척 이들 세 사람이 주은래를 공격할 때도 역시 모택동이 나서서 주은래를 지켜주었던 것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주은래를 가장 악랄하게 공격했던 강청이 모택동의 사후에, 법정에서 심사를 받을 때 “나는 모주석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한 마리의 개였다. 모주석이 누구를 물라고 하면 나는 누구를 물었다” (我是毛主席的一条狗,他叫我咬谁,我就咬谁.)고 말했겠습니까.
모택동과 주은래의 사후에 역사학자들은 놀랍게도 모택동의 가장 주요한 정적은 바로 다름 아닌 주은래였으며, 주은래는 자기를 제거하는데 모택동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고강, 유소기, 임표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모두 모택동의 손을 빌어 제거하는 고도의 지혜를 발휘하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택동은 이 지혜에 꼼짝없이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은래는 특별히 유소기가 타도되었던 것을 마음 아파하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모택동과의 정치투쟁에서 유소기는 분명히 주은래에게 이용되었고, 유소기가 타도될 때에 주은래는 모택동의 켠으로 붙어서면서 유소기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을 후회하였을지도 모릅니다.
1970년 여름 여산에서 개최되었던 9기 2차 대회에서 모택동은 갑작스럽게 진백달(陈伯达)을 비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회의 참가자들에게 모택동이 임표를 제거하기 시작하였다는 하나의 암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눈치를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짐작한 주은래는 회의가 결속된 후 100여명이나 되는 당과 군대의 고급간부들이 모인 장소에서 갑작스럽게 자신이 홍군시절 중앙군위 주석으로 있으면서 진의를 파견하여 모택동의 군권을 박탈하였던 적이 있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회의 참가자들은 누구도 이런 사실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은래는 아주 교묘하게 자신이 그때 이처럼 불경스러운 착오를 범했다고 검토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두 가지 정보를 흘렸습니다. 첫 째는 자신이 한때 모택동보다도 더 높은 직위에 있었단 사실과, 둘째는, 자신과 모택동의 사이에는 한때 엄중한 의견분규가 존재하였던 적도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회의 직후에 주은래의 지시로 당시 “광명일보”는 “장관의 의지대로 경제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不可按长官意志支配经济)라는 사론을 발표하였는데 전국이 들썽했습니다.
몇 해 지나 그때의 회의 장소에서 주은래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던 군대의 한 장령은 이 일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때 몹시 놀랐다. 주은래총리가 원래 모주석보다 당내의 직위가 더 높았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물론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였다. 더욱 놀란 것은 모주석과 주은래총리의 사이가 그렇게 겉에 드러나 있는 것처럼 좋지만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더 깊게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다. 섣불리 말을 잘못 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이 일어나고 나서야 주은래가 갑작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용의를 알 수 있었다.”
주은래는 이때도 모택동이 또 한 번 자기를 제거하기 위하여 획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고, 이를 방비하기 위하여 임표를 희생물로 던지게끔 모택동을 유도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임표에게 박해를 받았던 군대의 불만세력들이 모조리 주은래의 주변에 운집해있었고, 주은래는 이들에게 모택동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하나, 둘씩 흘리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이 모조리 모택동의 귀에 들어가게끔 만들었습니다.
사실 임표의 박해를 받고 모조리 지방으로 쫓겨났었던 해방군의 원수들은 모두 주은래가 나서서 임표를 제거해주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은래는 줄곧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주은래는 임표를 거꾸러뜨리는 방법도 가장 좋기는 모택동 자신이 궁지에 몰릴 때 마다 먼저 선수를 써서 자기의 부하들을 하나, 둘씩 제물로 던져버리곤 했던 그런 기회가 다시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도 실속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임표가 당시 부통수에까지 오르고 당장에까지 기재되는 모택동의 합법적인 후계자로까지 지목 되였지만 주은래가 임표를 제거하자고 마음만 먹으면 아주 쉽게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임표가 도주할 때에 임표의 경호 책임자(衛士長)가 임표를 따라 함께 떠나지 않고, 홀연히 주은래에게로 돌아오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임표가 자기의 수족같이 믿고 있었던 이 경호 책임자까지도 실은 주은래가 직접 임표에 신변에 묻어두었던 비밀 요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모택동의 경호부대 책임자 왕동흥이 직접 장악하고 있었던 중앙 경위퇀에서 하룡을 구금(拘禁)하였던 적이 있었으나, 주은래의 전화 한통으로 하룡을 빼내올 수가 있었습니다. 하룡이 어떻게, 누구를 통해 놓여나갔는지 왕동흥 본인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왕동흥에게서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모택동의 불안한 마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주은래의 특무기관이 모택동의 경위퇀 내부에까지도 모조리 침투하여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며, 이들은 모택동의 생전에도 일사불란하게 주은래의 명령에만 따르고 있었다는 설명이 됩니다.
하물며 임표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당시 임표의 직계 부하들이었던 오법헌, 강등교, 구회작 같은 군인들까지도 모두 주은래가 한번 명령을 내린다하면 함부로 아니 ‘불’ 자를 입에 담지 못했다고 합니다. 임표가 탔던 비행기가 북경으로 돌아오려고 했을 때도 공군사령 오법헌에게 지시하여 비행기가 북경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막은 사람이 바로 주은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오법헌이 누굽니까? 바로 임표 사후에 ‘림표반혁명집단’의 주범 중의 한 사람으로 판결 받고 감옥살이까지 하였던 사람이 아닙니까. 해외에서 출판된 오법헌의 회고록에는 임표의 아내 엽군 에게 전화하여 임표의 아들 임립과가 모택동을 암해하려고 했던 사실을 모택동이 이미 알고 있다고 알려준 사람이 바로 주은래였다고 합니다. 이런 전화를 받은 뒤에도 임표는 도망하려고 하지 않고 북경으로 돌아와 모택동과 만나 해명하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임표는 결국 주은래가 지키고 있는 북경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부하였던 오법헌까지도 주은래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국무원 부총리였던 기등규(继登奎)는 임표가 비행기사고로 죽었을 때 주은래의 곁에 있었습니다. 기등규의 회고에 의하면, 임표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고 주은래는 인민대회당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제갈량이 주유의 죽음을 통곡했던 것과 완전히 같은 경우입니다. 마음속으로야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임표까지 죽고 나서 모택동에게는 주은래와 싸울쑤 있는 아무런 힘도 없었습니다.
제 4차 전국인민 대표대회는 주은래의 독무대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 대회에서는 주은래는 임표까지 잃어버린 힘없는 모택동을 마음대로 괄시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모택동에 의해 발탁된 반란파 출신 당 부주석 왕홍문을 견제하기 위하여 홍군출신 장령인 이덕생(李德生)을 중공중앙 부주석과 중앙군위 부주석으로 기용했는가하면, 공개적으로 ‘네 가지 현대화’에 대한 슬로건을 내놓고 모택동의 ‘계급투쟁노선’을 퇴색화시켜버렸습니다.
이때의 모택동이야말로 후회막급이었습니다. 자기의 손으로 직접 자기에게 충성하였던 팽덕회, 고강, 임표 등을 모조리 때려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임표가 죽은 뒤에는 제 4야전군 출신의 장령들이 대부분 감옥에 잡혀 들어갔고, 겨우 불러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진석련(陳錫聯)이나, 허세우(許世友)같은 사람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원수와 대장들이 아직도 적지 않게 살아있었던 중국인민해방군에서 진석련이나 허세우같은 사람들이 함부로 나서서 큰 소리를 칠 수는 없었습니다. 모택동이 믿을 수 있는 심복들이라고는 이때 ‘4인방’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마저도 제 4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주은래는 ‘4인방’에게 문 관직이나 몇 개 주고 모든 주요 권력들은 자신의 직계들에게 주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주은래는 모택동의 모든 팔 다리를 다 잘라버렸고, 모택동을 중국 공산당의 정치무대에서 가장 외롭고도 고독한 허수아비로 만들어놓는데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진의가 죽고 나서 모택동은 부득불 군대의 살아있는 원수들한테 화해의 제스처라도 취하지 않았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진의의 추도식에 참가하여, 그동안 임표를 중용하였던 자신의 불찰을 인정하고야 맙니다. 이때다 싶었던 주은래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더욱 많은 자기의 직계 부하들을 모조리 요직에 기용하게 되는데, 모택동은 이를 묵묵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모택동은 성격이 조폭하고 화를 잘 내기로 이름 있었습니다. 대신 주은래는 항상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으며 조만해서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택동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한 번도 공개적으로 나서서 가로막았던 적이 없습니다. 모택동이 하는 일을 모조리 지지하였고 추진하였으며, 자기 보기에 옳지 못하였던 일도 그대로 밀고나가서 망가지게 만들었고, 그 망가지는 꼴을 모택동 본인이 스스로 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모택동이 보는 앞에서 먼저 자신의 잘못부터 검토하는 아량을 보여 주군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택동이 스스로 이게 옳지 않구나고 자성하고 반성하기를 기다려주었습니다. 때로는 끝까지 자성하고 반성하지 않을 때가 많았지만 주은래는 그렇다 고해서 굳이 그것을 바로잡아가려고 노력하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주은래의 생전에 이미 모택동은 당심, 민심, 군심까지도 모조리 잃어버린 고독한 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평생 동안 모택동과 정치투쟁을 벌여왔던 주은래를 모택동 먼저 쓰러뜨린 것은, 모택동이 아닌 병마였습니다. 주은래가 죽고 나서 그의 추도식에 모택동은 참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택동도 바로 주은래의 뒤를 따라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비록 두 사람은 모두 저 세상으로 갔지만, 오늘의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은 여전히 주은래 계보의 정치세력이 틀어쥐고 있습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나서 무릇 모택동 쪽에 섰던 사람들은, 모택동의 아내 강청을 비롯하여 모조리 타도되고 말았습니다. 모택동, 임표와 함께 주은래를 공격했던 사람들은 모두 당적을 제명당하고 군대에서 쫓겨났으나, 주은래와 함께 하였던 사람들과 그의 연고자들은 모두 대대손손으로 일취월장(日就月將)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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