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모든것들/나의 이야기

생을 살아가면서....

하늘벗삼아 2011. 6. 9. 10:55



 

세일즈맨의 죽음 - 아서 밀러 (Arthur Asher Miller)

 

 

한 남자가 투영하는 시대의 자화상.

1981년 작 <세일즈맨의 죽음>은 한마디로 ‘더스틴 호프만’의 영화다. 그저 한사람의 배우가 아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아적인 존재다. 한 배우가 영화에 미칠 수 있는 파급력을 보여주는 듯한 그의 연기는 소름이 돋는다. 사회와 가족에게 버림받은 남자의 자화상, 슬픈 기운에 못 이겨 미쳐버린 남자의 체념. 감정의 심포니를 가뿐히 뛰어넘는 그의 호흡에 보는 이는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다.

 

이 영화가 ‘더스틴 호프먼’의 대표작은 아니다. 대중은 그를 영화 <졸업>에서 신부의 손을 낚아 체 달리는 혈기왕성한 사내나 <투씨>의 여장남자 그리고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의 이혼한 아버지의 모습들로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의 영향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모든 감정을 자신의 온몸에 새겨 넣어 관객을 향해 소리치는 그는 어린시절부터 함께한 헐리웃 키드의 영원한 우상이다.

 

40년이 넘는 배우생활동안 수없이 많은 작품을 해온 '더스틴 호프만'

왼쪽은 투씨에서의 그의 모습, 그리고 레인맨에서의 모습.


적막하다 못해 미약한 빛도 허락하지 않는 듯한 어두운 길에 한 남자만이 덩그러니 차를 몰고 있다. 어느 순간 누군가 뛰어들어 차를 덮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걸까? 남자는 울컥대는 마음을 다잡는듯한 모습으로 사시나무 흔들리듯 떨고 있는 핸들의 손을 다잡기 바쁘다. 이 외로운 주행에 그 누구도 그를 위로하지 못한다. 가족도 친구도 직장상사도 지금 이 시점에서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30년 넘게 평생을 바쳐온 직장에서 해고되고, 큰 인물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신의 두 아들은 그의 바람과는 다른 길을 가려한다. 그래서인지 남자는 체념한 듯한 얼굴로 핸들을 꺾어 버릴 듯 돌려대며 이 불안한 주행을 멈추려한다. 자신이 죽어야 생의 의미가 생기는 이 아이러니를 견뎌내기 힘들다.


<양철북>으로 유명한 ‘폴커 슐레도르프’감독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미국의 대표적 극작가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원작으로 한 TV영화다. 워낙 희곡으로 유명하다 보니 영화는 희곡의 분위기를 그대로 빌린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서인지 85년에 제작된 영화라는 점을 감안해도 세트구성이 허술하고 미술과 음향효과에서 부족함 면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그런 허술함이 배우들의 명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한 편의 연극을 보듯 배우들의 호흡 하나하나에 집중하여 극에 빠져든다.

 

원작 '아서 밀러'의 희곡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 그리고 더스틴 호프먼의 모습.


이 영화는 비슷한 소재를 다룬 ‘한재림’ 감독의 2006년 영화 <우아한 세계>와 그 뜻을 같이한다. 가족을 위해 평생을 일한 이 시대의 가장에 대한 우울한 자화상. 시대와 공간이 다름에도 느껴지는 정서는 같은 것이다. 돈을 벌어 평생 가족을 위해 사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 어떤 나라의 그 어떤 시간에 다르리오. 그 모습은 한결같이 고되고 지친 발걸음을 상징할 뿐이다. 그 무거운 발걸음을 대신하는 자가 ‘더스틴 호프먼’이다. 비틀비틀 거리는 발걸음으로 한 남자가 인생에 저지른 과오를 되새기는 그의 모습은 내 아버지의 향취를 깊게 뿜어낸다. 술에 취해 들어온 아버지의 양복냄새를 맡아본 이만이 느낄 수 있는 심연 속 슬픔이 마음을 자극한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에 반항하는 아들 비프(존 말코비치 분)가 그를 향해 소리친다.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비프는 어릴적부터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오며 성장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외도사실을 목격한 이후에 급격하게 무너져 내린다. 자신의 잘못으로 아들이 빗나가 버렸다는 죄책감에 아버지는 가슴이 무너진다. 아버지는 과거를 향해 도망칠 뿐이다. 유독 자주 등장하는 회상장면은 이 영화가 오로지 과거를 향한 향수에 현실도피만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알게끔 한다. 현실엔 그의 노력과는 반대의 시들어버린 꽃이 마지막 잎사귀를 떨어뜨리고 있을 뿐이기에 그는 전진할 수 없다. 과거로 도망치는 아버지의 ‘더스틴 호프만’과 아버지의 기대에 부담감을 느껴 오열하는 아들 ‘존 말코비치’의 솔직한 대화들이 깊은 유대감을 형성한다. 두 배우의 열연에서 나오는 대화들이 마음을 울린다.

 

이런 배우들의 열연과 함께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영화가 추구하는 사회의식이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의 원인은 돈이다. 그것이 이 비극이 있어야 하는 이유이고, 이 이야기의 존재가치다. 참 아이러니 한 것이 윌 리가 그렇게 살려고 발버둥치며 30년 넘게 세일즈맨을 해왔지만 그에게 삶의 무게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죽음을 선택한 순간 그에게는 아들에게 기회를 줄 보험금이라는 돈과 할부금을 모두 부은 집이 남길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은 그 정도의 값어치를 한 것이다. 장례식에는 인간관계를 중시해 온 그의 예상과는 달리 한산했다. 그는 이제 돈이 되지 않는 송장에 불과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되지 않는 그는 의미가 없다. 가족이라는 집단에도 돈이 없으면 가치가 사라져버리는 이 사회의 치가 떨리는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통렬한 배신감이 그들의 작은 집을 메운다.

 

 

문을 나서면 지나온 과거가 미쳐버린 그의 뇌리에 스쳐 지나온다.

과거만이 그가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문과 문을 통해서 이어지는 갑작스런 시공간의 변화는 이 영화의 가장 특이한 점이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발달하면서 점점 사라져버린 연극적인 기법인데 다시 보니 매우 신선하게 다가온다. 미쳐버린 아버지의 자아와 적절하게 연계되며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은 기술적 한계로 많은 영화를 도중에 하차하는 이 시대의 젊은 감독들이 적절히 차용할만한 기법이라 생각된다. TV영화로 제작된 영화답게 돈을 최대한 적게 쓰면서 배우의 힘으로 영화를 걸작으로 만들어낸 감독의 솜씨가 빛나는 것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연극으로 아직도 자주 상영된다. 최근에도 대학로에서 상영한 이 작품을 본적이 있다. 이 이야기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모든 극단의 단골메뉴가 된 것이다. 아직도 이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을 찌르고 울린다. 사람이 태어나서 공부를 하고, 기술을 익혀, 돈을 벌고, 결혼을 하며, 자식을 낳고, 늙어간다. 그것이 순리다. 하지만 이 사회는 돈을 버는 것을 위해 태어난 기계로 인간 생의 의미를 축소시킨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겉만 번지르르한 도심의 높은 건물들과는 달리 그 내부는 자본주의 구린내로 아스피린을 찾게 한다. 순수한 노동의 가치는 이제 세일즈맨의 지친 땀방울로 대변되지 않는다. 순수한 노동이란 가슴속의 이상일 뿐이다. 나 자신이 걸어야 할 내 아버지의 지친 어깨가 그저 눈에 아른거릴 뿐이다. 자신이 만든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택한 한 남자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관객의 딜레마로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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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喜 一 悲 란?

세일즈 맨의 삶이다.

나 또한 23년의 세일즈맨의 시간을 보냈다. 

인생 사 다 일희 일비 하며 살아가는 삶이 겠지만.... 

어떤 일을 하든 인생이란?

모두다 힘들고 고달프겠지...

더러는  희열도 느끼겠지만...

아직도 우리사회에서는 사농공상의 뿌리 깊은 관습이 존재한다.

요즘엔 돈의 많고 적음으로 삶의 모습을 정하는  신계급이 새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