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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수상 빌리 브란트의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학살 사과

하늘벗삼아 2013. 8. 14. 08:30

독일 수상 빌리 브란트의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학살 사과

[German Willy Brandt chancellor apology for WW2 Poland Warsaw Getto Holocaust]

 

 

 

폴란드 바르샤바 유태인 격리구역 게토내의 야시장에 모인 유태인들의 인파 - 1941년

 

 

 

 

 

 

 

바르샤바 게토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유태인 경찰 - 1941년

 

 

 

 

어쩔수없이 나치의 앞잡이가 되어 동족을 관리하는 바르샤바의 유태인 경찰들 - 1941년

 

 

 

게토에서 그릇을 파는 노점상

 

 

 

바르샤바 게토의 소년 소녀 노점상

 

 

 

 

바르샤바 게토의 상점앞에 앉은 나라잃은 폴란드 유태인 노인들

 

 

 

 

 

 

 

바르샤바 게토내의 시장 풍경

 

 

 

 

 

 

 

 

 

 

 

 

 

헐벗고 굶주려 거지꼴이 되버린 유태인 소년들

 

 

 

 

 

 

 

 

바르샤바의 유태인 노점상

 

 

 

 

 

 

 

 

길거리에서 굶어죽은 유태인의 사체

 

 

 

 

영양실조로 병든 바르샤바 게토의 유태인 어린이들

 

 

 

 

 

 

바르샤바 게토의 시체 수검반 유태인

 

  

 

 

 

병들고 굶어죽은 동족들을 공동묘지에 묻는 유태인

 

 

 

게토 구역의 연결 다리

 

 

 

 

 

게토내에 형성된 시장의 모습 - 1941년

 

주로 내다 파는 것은 먹거리임을 살펴볼수 있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동냥을 받는 유태인 어린이

 

 

 

한편으로 별천지 같았던 상류층 유태인들의 연극 무대

 

 

 

 

 

 

 

유태인 집단 구호시설의 이발소

 

 

 

 

한끼의 식량을 얻기 위해 공사장 일자리로 향하는 유태인 인부들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한후  바르샤바에 만든 유태인 격리구역 게토(Getto)의 비참했던 모습 - 1941년

 

 

 

 

 

 

 

1970년 12월 7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는 쌀쌀한 초겨울 날씨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날 서독의 빌리 브란트 수상은 폴란드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폴란드를 방문했는데,

그는 2차 대전 후 최초로 폴란드를 방문한 독일의 현직 수상이었다.

그는 폴란드 내 유대인 학살의 상징적인 장소인 ‘게토 기념비’ 앞에 섰다.

(‘게토’란 중세 이후 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을 강제로 격리하기 위해 설정한 유대인 집단거주지역을 말한다.)

1940년 당시 바르샤바의 북서쪽 날레위키에는 45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 숫자는 전 세계에서 뉴욕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숫자였다.

그해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는 유대인 분리정책을 위해 ‘게토’를 세우기 시작했다.

1940년 당시 폴란드의 유대인들은 대략 300만을 헤아렸는데 나치는 이들을 몇 개의 게토로 분산하여 집단 수용했다.

그 중 가장 큰 규모가 바르샤바 중심부에 위치한 바르샤바 게토였다.

1942년에 접어들자 나치는 이곳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죽음의 캠프’로 불린

테블린카로 이동시켰는데

여기서 바르샤바 출신 유대인 30만 명이 죽었다.

이를 견디다 못한 유대인들은 1943년 맨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나치는 게토 가운데 있는 교회 하나만 남겨놓고 모든 건물을 파괴하였으며,

게토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을 전부 학살하였다.

 당시의 참상을 <뉴욕타임스>가 사진과 함께 1면 머릿기사로 보도한 바 있다.

 

 

 

 

 

 

나치 독일의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학살을 보도한 <뉴욕타임스> 1943년 5월 10일자 1면 기사

 

 

 

 

브란트 수상이 게토 기념비 앞에 섰을 때 현장에 있었던 독일과 폴란드의 언론인과 수행원,

 그리고 폴란드인들은 브란트 수상이 의례적인 사죄 연설이나 뒤늦은 추도사 같은 걸 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브란트 수상의 행동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기념비 앞에 잠시 서 있던 그는 비가 내려 젖은 기념비 앞 콘크리트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어버렸다.

 이는 그 자신은 물론 주변의 그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무릎을 꿇은 채 브란트 수상은 눈을 감고서 두 손을 모았다.

그제서야 주변 사람들은 그가 독일국민들을 대표하여

이곳에서 희생된 영령들에게 참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소식은 급전(急電)으로 전 세계에 타전됐고, 세계는 그의 진정한 참회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브란트 수상의 ‘무릎 꿇음’ 소식을 전해들은 한 폴란드 한 여인은 독일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독일과 폴란드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눈물로 얘기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당시 상황에 대하여 브란트 수상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침에 길을 나설 때 진심을 전달할 수 있을 무언가는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일의 숨길 수 없는 악행의 역사를 증언하는 장소에서

나치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영령들을 대하는 순간 저는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이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세계를 감동시킨 이 한 장의 사진 - 바르샤바 게토 기념비에 무릎 꿇고 사죄하는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수상

 

 

 

브란트 수상이 당시의 ‘무릎 꿇음’에 대해 “사람이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다고

표현한 걸로 봐 즉흥적이었던 것은 분명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그 행동의 바닥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이 깔려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건 곧 진정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그의 사죄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이로써 독일은 침략국이라는 원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브란트 수상의 이날 ‘사건’을 두고 한 언론은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압축해 표현한 바 있다.

 또 다른 한 언론은 “나치와 싸웠던 빌리 브란트 총리는 그 곳에서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총리는 실제 무릎을 꿇어야 함에도 용기가 없어

꿇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무릎을 꿇었다”고 극찬했다.

바르샤바에는 브란트 총리의 ‘무릎 꿇음’을 기리는 기념물이 있다.

침략국 독일의 수상인 그가 피해자인 폴란드인들에게 ‘기념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에 비하여 같은 침략국으로 일찌기 조선을 침략하여 수많은 조선인들을 학살시켰던

일본에서도 서독의 브란트 수상과 같은 인물은 과연 나올수 있을 것인가?

 

 

 

 

 

 

 

photo from : Histom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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