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튼소리 *~+~+
조그마한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힘은 손톱 끝의 때나 다름없고
시간은 나의 뒤의 그림자이니까
거리에서는 고개 숙이고 걸음 걷고
집에 가면 말도 나지막한 소리로 걸어
그래도 정 허튼소리가 필요하거든
나는 대한민국에서는 제일이지만 이북에 가면야 꼬래비지요
< 1960. 9. 25 > * 김수영 전집 1 (시)
오래된 여행가방 - 김수영
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 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곱게 말린 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 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히 생각해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눈 - 김수영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 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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