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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 계기 - 황산대첩(이성계) - 퍼온글

하늘벗삼아 2012. 11. 27. 04:18

 

어휘각, 황산대첩사적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기 이전인 고려 말 우왕 때, 이곳 황산 일원의 왜구를 섬멸하고 그 이듬해에 다시 이곳을 들러 자신의 어휘와 황산대첩과 관련한 글씨를 새긴 바위

 

대한민국 성인 중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까? 오늘은 어제에 이어 용비어천가에도 그 내용이 나온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관련한 자료들을 올린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에 소재한 황산대첩사적지를 다시 찾는다. 사적지 바로 옆으로는 비전마을이 있는데 함께 둘러 보면 좋을 곳이다. 비전마을은 판소리 동편제의 대가인 송홍록과 송만갑 선생의 출생지이자 명창 박초월 선생이 성장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휘각이다.

수직의 바위면을 보호하는 집인지라 특이하게도 앞 쪽의 기둥과 뒷쪽의 기둥 길이가 서로 다르다.


 

글씨를 새겼음직한 사각의 바위면이 보이나 글씨는 없다. 황산대첩이 자신들에게는 치욕의 역사가 되기에 1941년 일제 강점기 때 왜인들이 철정으로 쪼아버렸단다. 이 글씨를 보호하는 집이어서 어휘각이라 한다.

 

왜인들은 황산대첩비를 폭파시켜 버리고 나머지 흔적마저도 철정으로 쪼아버린 것이다,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

사적 제104호 (1963.01.21)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344-2에 소재한다.

남원에서 인월 방면으로 24번 국도를 타고 가다 운봉을 지나면 비전마을 입구에

황산대첩비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을 따라 비전마을로 진입하면 마을 다리 건너 황산대첩비가 있다.

황산대첩에 대해서는 일전의 자료에서 밝혔으므로 오늘은 어휘각과 황산대첩사적비를 중심으로 올린다.
황산대첩비지 앞으로는 하천이 흐르며 전체 면적은 약 6,600㎡이 넘는다.

바깥 마당과 솟을삼문 안으로 들어서면 약 3,300㎡ 가량의 안마당이 있다.

1380년(우왕 6) 9월 당시 도순찰로 임명 받은 이성계는

이곳 황산에서 발악하던 포악한 왜구들을 섬멸시켰으니

이름하여 황산대첩이라 하였다.


이 때 전사한 왜구들의 피로 강물이 물들어 6, 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피바위는 황산대첩비에서 인월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남천변에 있는데 당시 왜구들이 흘린 피로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하여 붙여진 것이란다.
주변 마을 이름의 유래도 이와 관련한 것들이 많다.

 '인월'은 날이 저물어 도망가는 왜구를 쫓아 달을 당겨놓고

밤늦게까지 싸워 전멸시킨 것이에 유래하였고,

'인풍'은 이성계가 바람을 몰고 다니며 싸웠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황산 부근에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토성이 있고,

당시 군대가 주둔할 때 말을 매어 놓은 곳이라 하여 '군마동'이라 하였다.

황산대첩이 자신만의 공로가 아니라 여러 충신들의 공로임을 알렸다는 것이다.
어휘각은 이 글을 새긴 바위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비각(碑閣)의 이름이다.


명 홍무(洪武) 12년(1379) 기미 9월에 왜적이 함양을 함락하고 남원을 공격하였다.

운봉을 불사르고 인월에 주둔하면서

곡식과 말을 몰아 북쪽으로 올라간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나라 전체가 크게 혼란하였다.
태조와 정몽주가 남원에 다다르자 배극소 등이 찾아와 뵙자 태조는 다음날 전투를 개시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은  "적들이 험준한 요새에 의지하고 있으니

그들이 나올 때를 기다렸다가 전투를 벌이는 것만 못합니다."고 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군사들의 적개심이 충천하여 오히려 적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거늘

지금 적을 보고서도 공격하지 않는 것이

옳은가?" 하고 꾸짖었다. 아침이 되자 많은 병사들 앞에서 맹서하고 운봉을 넘어

황산의 정산봉에 오르니 적이 갑자기 튀어 나왔다.
태조는 대우전을 쏘고, 계속하여 유엽전을 쏘아 모두 적들의 얼굴에 적중시키니

활시위 소리에 따라 죽지 않은 자가 없었다.

무릇 세 차례 싸움에 모두 이겨 섬멸하였다. 그곳이 진흙 벌이어서 피아가 모두 진흙탕 속에 빠져 싸웠다.

그러나 정작 빠져 나와보니 죽은 자는 모두 적이고, 아군은 한사람도 부상하지 않았다.

왜적은 산에 웅거하고 스스로 굳게 지켰다.


태조가 병사를 지휘하여 요지를 나누어 웅거하게 하고,

휘하 이대중 등 10여 인에게 도전하게 하자 적이 사력을 다해 돌진해 왔다.
태조는 병사들을 돌아보면서 고삐를 단단히 잡아 말이 넘어지지 않도록 일렀다.

다시 소라를 불어 병사를 정돈하게 하고 개미떼처럼 적진을 향해 기어올랐다.

적장이 창을 뽑아들고 곧바로 태조 뒤를 공격하니 매우 위급하였다.

이두란이 말을 달려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공은 뒤를 보시오." 태조가 미쳐 돌아보기도 전에 이두란은 이미 활을 쏘아 적을 죽였다.

적이 화살을 쏘아 태조의 왼쪽다리를 맞추었다.
태조의 기개는 더욱 치솟고 전투 또한 급박하였다.

이 때문에 군사들은 태조가 다친 것을 알지 못하였다.


태조가 부상하자 적이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곧바로 선 자리에서 여덟 사람을 죽이자 적은 감히 앞에 나서지 못하였다.
태조께서 해를 가리켜 맹서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겁을 내는 자는 물러가도록 하라.

나는 적에게 죽겠다." 하니 장사들이 감동하여 용기 백배하였다.

나이 겨우 십 오륙 세 되는 적의 장수가 한사람 있었는데 용감하기가 비할 데가 없었다.

그가 향하는 곳마다 무너졌는데 아군은 그를 아지발도라 불렀다.


태조는 그의 용감하고 날쌤을 아껴서 이두란에게 생포하도록 명하자

이두란이 말하기를 "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사람이 상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그의 투구 꼭지를 맞추어 땅에 떨어뜨렸다.

이두란이 활을 쏘아 그를 사살하자 이에 적의 기세가 꺾이었다.


태조가 급격히 적을 몰아쳐 대파하니, 이에 이듬해 경신 년에 화수산 서쪽 바위벽에

태조께서 어휘와 공을 함께 한 기록을 새기게 하고, 8원수 4종사 이름을 열기(列記)하였다.

이는 모두가 함께 이룬 공적을 의미한 것이다. 그 높은 공과 위업이 504년에 이르도록 더욱 빛나니,

오호 그 기상이 어찌 장하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