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힐러리 / Edmund Percival Hillary
(1919년 7월 20일 ~ 2008년 1월 11일)
"뛰어난 사람만 인생을 잘 살수 있는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동기다. 진정 무언가를 원한다면 온 맘을 다해라"
- 에드먼드 힐러리 경
1919년 7월 20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퍼시벌 오그스터스 힐러리와 저트루드 힐러리의 아들로 태어났다.[1] 이듬해인 1920년에는 갈리폴리 전투에 참전했던 아버지를 따라 오클랜드 남쪽 투아카우로 이사를 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 땅을 할양받았다.[2] 그의 조부는 19세기 중반 잉글랜드 요크셔에서 이민을 온 후에 북쪽 와이로아에 정착을 한 정착민이었다
힐러리는 투아카우 초급학교(Tuakau Primary School)를 졸업한 이후 오클랜드 그래머 스쿨(Auckland Grammar School)에서 교육을 받았다.[2] 초등학교를 2년 빨리 졸업했지만, 고등학교에서는 평균 점수를 따라가기도 쉽지 않았다.[3] 그는 처음에 친구들보다 왜소했기 때문에 매우 소심했고, 책 속에서 위안을 찾았으며, 모험에 대한 공상을 즐겼다. 고등학교까지 등하교는 각각 왕복 2시간 이상이 걸렸고, 그 시간을 독서를 하는데 보냈다. 그는 상자쌓기를 배운 후 자신심을 찾게 된다. 16세 때, 수학여행을 통해 루아페후 산(최고 2,797m)을 등반함으로써 등반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자극하게 된다. 그는 195cm의 꺽다리에다가, 근육이 잘 발달하지는 못했지만 육체적으로 강하고, 트램핑을 하는 다른 동료 학생보다 지구력이 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오클랜드 대학에서 수학과 과학을 공부했고, 1939년에는 남알프스 산맥의 쿡 산 근처에 있는 1,933m의 올리비어 산을 등정하게 된다. 그의 형제인 렉스의 도움으로 1936년부터 양봉가로 이름을 떨쳤고, 이것은 여름의 한시적 직업으로 겨울에는 등반을 하면서 뉴질랜드의 스키와 등산의 지도자가 되었다.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의 대관식을 앞두고 에베레스트 정상정복을 위해서 영국의 원정대가 도전하지만 반드시 영국인이 최초의 정복자가 되야한다는 사명 아래 출발한 1차 원정대가 실패하고 돌아왔을때 힐러리는 1953년 4월26일 2차 영국원정대에 속해 에베레스트로 가게된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변방 뉴질랜드 출신이라는 이유로 동료들에게 무시당하는 왕따였던 그는 33살의 세르파 텐징 노르게이와 정상에 올라가면서 조국 뉴질랜드의 국기를 품에 안고 떠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인간적 면모를 짐작하게 하는 일화가 있다.
정상 공격 중 힐러리가 뒤쳐지고 텐징이 앞서가는 상황이 되었고
뒤쳐진 힐러리가 드디어 정상을 눈앞에 둔 지점에 도착했을때
텐징 노르게이는 힐러리가 올때까지 기다려주었다고 한다.
이윽고 힐러리가 도착했을때 어서 정상에 오르라고 하는 텐징에게
힐러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
"이곳은 당신의 나라야. 당신이 먼저 정상을 밟아야지"
드디어 1953년 5월 29일 정상을 밟은 후 텐징은 그의 딸이 정상에 묻어달라고 한 색연필을,
힐러리는 조국 뉴질랜드의 국기를 꺼내어 에베레스트 정상의 눈 속에 묻었다.
그런데 그는 정상에 올라서도 텐징의 사진만 찍었을뿐 자신의 사진은 찍지 않았는데
이것은 후에 누가 먼저 정상에 올랐는가 하는 많은 의혹을 일으켰다.
그러나 힐러리도 텐징도 그 의혹에 해명하지 않았다.
내가 짐작컨대 그들은 그런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비웃었을 것이다.
그들은 "함께" 올랐으니까.
이미 무엇을 해내고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한 사람들에게
세계최초 세계최고 같은 겉멋들은 칭호 따위는 유치한 것이었을테니까.
스스로 자신의 삶에 자신있는 사람들에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뜬금없는 사족이지만
히말라야에서의 그들의 사진은 마치 한쌍의 연인같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영국원정대 소속이었으므로 그 당시 에베레스트 정복은
영국인의 업적으로 귀속되었고 그들의 조국 뉴질랜드와 네팔과 세르파족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았다.
마치 손기정 선수의 올림픽 금메달처럼 말이지.
덧붙이면 힐러리와 텐징의 인연은 이후에도 이어져서
50년 후 힐러리의 아들 피터와 텐징의 아들 자믈라는 함께 다시 에베레스트에 오르게 된다.
50년 전 그들의 아버지들처럼.
이후에도 힐러리는 남극점 도달과 히말라야 10개 봉우리 등정 등의 기록을 세운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위대한 것은 이 다음부터이다.
그가 존경받는 이유는 자신에게 영광을 안겨준 세르파족을 결코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1962년 히말라야기금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히말라야 산지의 세르파족 마을을 찾아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그들을 돕는 활동을 벌였다.
그는 에베레스트 등정 몇달 뒤 루이즈 메리 로즈라는 여성과 결혼하며 세자녀를 낳았는데
1975년 힐러리가 네팔에서 병원 건설에 바쁜 동안 카트만두에서
아내와 딸을 비행기 사고로 잃는 아픔도 겪지만 그는 생애 120차례가 넘도록 네팔을 방문하여
그들을 위해 헌신하며 세르파족과 네팔에 감사했다.
힐러리는 일생 산악인으로서 언제나 "삶의 자세"를 강조했다.
그는 동행했던 텐징과 함께가 아닌 자신만이
"에베레스트 첫 등정가"라는 영예를 누리는 것을 거부했으며
평생을 세르파족과 네팔 오지 주민들 돕기에 바쳤고
2006년 뉴질랜드 등반가가 죽어가는 영국인 동료를 산에 버려두고 온 사건이 있었을 때
"죽어가는 사람을 지나친 채 정상에 오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그를 비난했다.
그에겐 산에 올랐다는 결과보단 어떻게 올랐느냐는 과정이 더욱 중요했으니까.
에드먼드 경은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등산한 사람으로서 뉴질랜드 5달러 지폐에 초상이 실렸다.
살아 있는 인물로 지폐에 실린 몇 안되는 인물 중 한명이 된 것이다.
2008년 1월 그가 타계했을때 뉴질랜드 국민들은
"위대한 키위가 우리 곁을 떠났다"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키위는 뉴질랜드인을 부르는 애칭이다.
무엇이 지구의 변방이며 영국의 식민지였던 소국 뉴질랜드 출신의 그를
국민적 영웅이 되게 하고 감히 Sir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전 영국연방의 존경과
전 세계 산악인과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하였는가
그것은 그가 세계최초로 제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갔다는 사실이 아니라
산악인, 모험가로서의 명성외에 인생 그 자체로도
사람들에게 교훈과 영감을 던져준 인물이기 때문이며
아내와 자식을 비행기 사고로 잃고도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이며
숨지기 1년 전까지 자신의 영혼의 고향인 네팔을 찾아 감사할줄 알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국 목적보다 과정과 동기 그리고 성공 뒤의 일에 더욱 마음을 썼던
따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대한 꿈을 세우고 그것을 이룬 사람을 존경과 감탄의 눈으로 바라본다.
때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과정이나 동기쯤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기도 하지
더구나 그 목표를 이루고 났을때
자신의 성공 뒤에 숨겨진 과정과 노력들에 감사를 챙길줄 아는 사람들도 많지않고.
그러나 우리가 힐러리를 존경해야한다면 그 이유는
그가 세계최초로 세계최고로 높은 곳에 올라갔다는 사실이 아니라
정작 그가 어떻게 올라갔으며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온 후 어떤 삶을 살아갔는가 하는 것에 있을것이다.
그는 1951년 뉴질랜드 가르왈 원정대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히말라야산맥을 접한 이래
1952년에 초오유산 원정에 참가하였고
1953년에는 영국의 에베레스트 원정대원으로 선발되어
5월 29일 세르파 텐징 노르게이와 함께
에베레스트산을 처음으로 올랐으며
그 공로로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1954년에는 뉴질랜드의 히말라야 원정대 대장이 되었고
1957과 1958년 뉴질랜드 남극횡단원정대에서도 활약하였으며
인도 갠지즈강 발원지 탐색에 참여하여
인도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또한 1960년에서 1966년까지
뉴질랜드 미국 영국의 합동 히말라야 원정대 및
1967년 남극 히셀봉 원정대를 지휘하였다.
그는 에베레스트 최초등정이라는 기록뿐만 아니라
일생동안 남극점 도달과 히말라야 10개 봉우리 등정이라는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이다.
산악인이라는 그의 분야에서 화려한 그의 경력은 감탄을 자아낸다.
네가 속한 분야에서 그보다 더한 화려한 경력을 가질 자신이 있는가
그러나 이보다 더한 경력도 언젠가는 깨어진다.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네팔을 위해서도 봉사하였는데, 그의 사후 네팔 정부는 에베레스트 산과 가장 가까운 공항의 명칭을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를 기념해 텐징 힐러리 공항(Tenzing Hillary Airport)으로 바꾸었다.
1955년 남극 탐험 대원이 되었으며, 1958년 남극점에 도달하였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 주인도 대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2008년 1월 11일, 오클랜드 병원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향년 88세).
그러므로 지나고 나면 부질없는
세계최초
세계최고
그것이 너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는다.
무엇이 되었느냐 보단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았느냐가 진짜로 중요하니 말이다.
그리고 눈을 감고
마음과 양심의 에베레스트를 보자
세상의 Top of the World 보다 더욱 높고 아름다운 곳
힐러리가 갔던 곳 우리가 가야할 곳
Sir 힐러리의 Top of the World
바로 진정한 우리들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거기 있을 것이다.
p s.
뉴질랜드 마오리족 언어로 아오테아로아
긴 하얀 구름의 나라로도 불리우는 아름다운 그곳에 어울릴만한 사람
Sir 힐러리라는 위대한 키위의 죽음에 존경을 담아 그를 추모한다.
Engelbert Humperdinck는 영국과 인도계 혼혈인 Anglo-Indian 혈통의 가수입니다.
1947년 영국으로 이사하기전까지 인도에서 살았으며 아버지가 영국군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1967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적 히트곡인 "Release Me (And Let Me Love Again)"로 일약 슈퍼스타의 반열에
올라 잘생긴 외모에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60~70년대 최고의 팝 발라드 가수로 평가받았죠.
미국에 엘비스 프레슬리가 있다면 영국엔 잉글버트 험퍼딩크가 있다는 찬사를 받은 영국의 국민가수 입니다.
루이 암스트롱의 것과는 대조적인 감미롭고 부드러우며 아름다운 What a Wonderful World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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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a Wonderful World / Engelbert Humperdinck
(His Greatest Love Songs, 2004)
I see trees of green, red roses too
푸른 나무들과 빨간 장미들이 보입니다
I see them bloom for me and you
당신과 저를 위해 활짝 피어있죠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이런 생각이 들어요, 참 멋진 세상이야
I see skies of blue and clouds of white
파란 하늘과 새하얀 구름들이 보입니다
The bright blessed day, the dark sacred night
밝고 복받은날, 어둠고 성스런 밤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이런 생각이 들어요, 참 멋진 세상이야
The colours of the rainbow, so pretty in the sky
하늘에 있는 무지개의 색깔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Are also on the faces of people going by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 또한 아름답죠
I see friends shakin' hands, sayin' "How do you do?"
"안녕하세요?" 악수 하는 친구들
They're really saying "I love you"
그들은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해" 하고 말하네요
I hear babies cryin', I watch them grow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전 그들이 자라는걸 지켜봅니다
They'll learn much more than I'll ever know
그 아이들은 제가 모르는 것까지도 모두 배우게 될 겁니다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이런 생각이 들어요, 참 멋진 세상이야
Yes,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정말, 그런 생각이 들어요, 참 멋진 세상이야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마침내 힐러리는 네팔의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지상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 정상 8,848m를 최초로 등정하였다. 그들이 정상에 머문 시간은 약 15분 가량이며, 그들은 1924년 올랐다는 멜로리 탐험대의 증거를 찾았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힐러리는 얼음도끼를 들고 있는 유명한 텐징의 포즈를 사진찍었다. 그러나 텐징이 사진을 사용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정작 자신의 사진을 남기진 못했다. 이것은 이후 논란을 일으켰다. '과연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서 사진을 찍었을까 안 찍었을까' 등이 논란이 된 것이다.
힐러리는 아래로 내려다 보는 사진 등 증거를 남기기 위해 그곳에서 몇 장의 사진을 더 찍고, 그곳에 텐징은 초콜렛을 남겼고, 힐러리는 자신이 받은 십자가를 남겼다. 지금은 그 논쟁이 없어진 상태이지만 아직도 에드먼드 경은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등산한 사람으로서 뉴질랜드 5달러 지폐에 초상이 실렸다. 살아 있는 인물로 지폐에 실린 몇 안되는 인물 중 한명이 된 것이다.